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90화 (290/510)
  • 00290 꼭두각시 전쟁  =========================================================================

    *  *  *

    “뭐가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거냐, 애송이……!”

    바싸고가 무엇이든 씹어먹을 기세로 중얼거렸다.

    이번 원정에서 가장 의욕 없는 마왕이 바싸고였다. 이 위인은 자기 한몸이 편안하면 만족했다. 단탈리안이 향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았다면 전쟁에 참여할 일도 없었겠지.

    그렇지만 이건 이야기가 달랐다.

    “아가레스다!”

    “아가레스가 온다아아!”

    사방에서 마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족들은 서둘러 피하기 시작했다. 일개 병사들은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든, 심지어 수천 명이 달라붙어도 지금 돌격해오는 자를 막지 못했다. 병졸들이 하사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참호에서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단 세 사람. 그중에 바싸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향후에 안전해지든 말든――지금 당장 위험에 처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잖은가!”

    정말이지 이건 이야기가 달랐다. 만약 아가레스를 상대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정에 불참했을 것이다.

    “어이. 댁은 별로 위험하지도 않을 거요. 실제로 맞붙는 건 나랑 저 창녀니까.”

    “바싸고는 뒤에서 제대로 엄호해주기만 하면 충분해. 헤헤.”

    나머지 두 사람, 벨레드와 시트리가 말했다. 두 마왕은 각자 도끼와 사복검(蛇腹劍)을 쥐고 느긋하게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둔한 것들. 우리가 상대할 녀석이 누구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바싸고가 이를 바득 갈았다.

    “아가레스다. 학살자 아가레스야. 너희 따위는 서른 합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게 뻔하다. 너희가 없어지고 나면 그 다음 차례가 바로 본인이거늘, 어찌 위험하지 않겠느냐!”

    “응. 맞아.”

    시트리가 시원하게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위험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네, 바싸고!”

    “……빌어먹을 천치년.”

    이래서 뇌가 근육으로 이루어진 족속은 질색이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이렇게 무식한 녀석들과 함께 싸우라니 농담도 뭣도 아니었다.

    벨레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잡담을 떠드는 것은 좋은데 말이지. 슬슬 준비해야 할 시간이외다.”

    “여신들이시여. 부디 단탈리안을 저주하소서!”

    바싸고가 엄지를 깨물었다. 콰득, 하고 과육이 터지듯이 피가 튀었다.

    하늘빛 마법진이 바싸고를 중심으로 크게 원형을 그리며 팽창했다. 사십 미터까지 확장한 마법진은, 한계에 부닥쳤는지 돌연 멈추어섰다. 그때부터였다.

    마치 어미가 새끼를 치듯이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에서 동, 서, 남, 북, 네 방향에서 다시금 새로이 마법진이 나타났다. 마력이 지나치게 강력하게 울렁거려 공기의 흐름이 왜곡되었다. 바람은 돌풍이 되어 마법진에 휘몰아쳤다.

    “휘우.”

    벨레드가 휘파람을 불었다. 질풍에 머리카락이 날리고 있었다.

    지금 펼쳐지는 마법진은 세계에서 오로지 바싸고만이 할 수 있었다. 전 역사를 통틀어서도 그러하겠지. 아니, 네 개의 작은 마법진 중에서 하나라도 펼쳐낼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바싸고가 허공에 핏물을 흩뿌렸다. 하늘빛에 새파랗게 비추어진 미청년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전(前) 서열 제3위, 가장 현명한 마왕이라 불린 자가 소리쳤다.

    “――얼른 쳐나와라, 밥이나 축내는 종놈들.”

    마법 영창이라고 하기에는 적지 않게 천박했다. 그러나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동서남북의 마법진에서 마력이 찬란하게 폭발했다. 팔과 다리가 질풍을 꿰뚫고 나타났다. 그 인영(人影)의 숫자는 모두 더해서 넷.

    붉은 머리의 여인, <불의 정령왕>. 푸른 머리의 여인, <물의 정령왕>. 녹색 머리의 여인, <대지의 정령왕>. 하얀 머리의 여인, <바람의 정령왕>. 단 하나만 소환되어도 인간계에 능히 격변을 일으킬 만한 존재가 넷이나 소환되었다.

    ─ 어머나, 다들 이게 얼마 만이야?

    ─ 웬일이래니. 쫌생이 구두쇠 양반이 우리를 한꺼번에 부르고 말이야. 내 기억력이 잘못되지 않았으면 245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인데.

    ─ 불쌍하게도……언니는 벌써 노화가 왔나봐요. 2455년이 아니라 2454년이에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2454년 67일 7시간 48분이죠.

    푸른 머리의 정령왕이 눈썹을 찡그렸다.

    ─ 너 기억력 좋아서 잘났다, 얘. 그런데 그거 알아? 너 정말 재수없어.

    ─ 젊음을 질시하는 것은 노인의 특권이지요. 그걸 권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에요. 예에, 물론 저는 그런 의미에서 권리가 언니한테 있다는 걸 인정해요.

    ─ 어머나. 너희 정말 기운이 넘치는구나.

    ─ …….

    정령왕들이 소환자를 무시하고 잡담을 떠들었다. 오직 하얀 머리의 정령왕만이 조용하게 침묵을 지켰다.

    ─ 그런데 너희 화장이 너무 안 되었다, 얘. 언제 어디서든 소환될 수 있게 미리 준비해둬야지 그렇게 떡질이 되어서 어떡하니?

    ─ 너처럼 뇌수까지 분을 칠하지는 않았으니까 참견하지 마.

    ─ 맞아요. 언니는 태생이 못 생겨서 화장빨로 무마해야 할지 모르지만 저는 자연미인이라 그런 거 하나도 필요없거든요.

    정령왕들이 싱글거리는 낯빛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 어머나, 못생긴 년들이 말본새도 더러워라.

    ─ 남이사. 만년 노처녀 주제에.

    ─ 한번 붙어볼래요?

    ─ ……다들. 사이좋게.

    바싸고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벌써부터 두통이 몰려왔다. 이래서 웬만하면 네 정령왕을 한꺼번에 소환하기 싫었다. 그 결심은 이천 년이 넘도록 꾸준히 지켜졌으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단탈리안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바싸고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 역소환시키기 전에 내 곁으로 집합해라.”

    정령왕들이 잡담을 뚝 그쳤다. 그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바싸고를 쳐다보았다. 도저히 소환사를 바라본다고 생각할 수 없으리 만치 딱딱한 시선이었다.

    ─ 에에. 딱히 역소환시켜도 상관없는데?

    ─ 우리 부른 거 보니까 딱 심각한 사태인 게 뻔하지 뭐.

    ─ 무척 불쾌하네요. 어디서 같잖게 협박질이에요.

    ─ ……주제 파악. 필요.

    “제기랄! 정말로 역소환하고 계약 끊는 꼴 보기 싫으면 당장 집합해!”

    바싸고가 이빨을 악 물고 소리 질렀다. 그러자 정령왕들이 투덜거리며 바싸고한테 느릿느릿하게 다가갔다.

    ─ 저 봐. 얘는 동료의식이란 게 없어. 툭하면 계약이 어쩌고 저쩌고.

    ─ 으휴, 정이 붙을래야 붙을 수가 없다니까. 옛날에는 정령사들이 안 이랬는데.

    ─ 어쩌겠어요? 소환자가 까라면 까야죠.

    ─ ……횡포. 혁명, 절실.

    정령왕들이 나란히 대열을 이루었다. 다들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만연했다. 일하기 싫어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놀고 있는데 가족 행사에 불려온 방구석폐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보통 정령왕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 삼만 광년쯤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시트리와 벨레드는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떨떠름하게 수군거렸다.

    “……나. 바싸고가 왜 항상 전쟁에 나서기 싫어하는지 의문이었는데.”

    “……아아. 지금까지 겁쟁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만, 그 나름대로 절실한 사정이 있었던 거로군.”

    만약 마족들이 이 모습을 목격했다면 바싸고는 권위고 체면이고 땅바닥까지 내려갔겠지. 바싸고 역시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냉큼 전투를 끝낼 속셈으로 명령했다.

    “적수는 마왕 아가레스다. 기억해야 할 점은 단 한 가지. 너희가 상대했던 그 어느 용족보다 강력하다. 유일한 위안점이라면 마법을 전혀 쓰지 못한다는 것이며, 비극적인 사실은 마법을 쓰지 못함에도 어느 용족보다도 강력하다는 것이지. 요컨대 괴물이다.”

    그제야 정령왕들은 표정이 다소 진지해졌다.

    “우리의 아군은 두 명이다. 저기 보이는 마왕이지. 너희의 임무는 저 두 명을 원호하고, 서로 협조하고 보조하여, 어떻게든 최대한 길게 시간을 버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아가레스를 처치하는 편이 좋겠으나 일단 불가능하다고 여겨라.”

    ─ 어머나.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면서 싸움에 나섰어? 쫌생이 양반이 어쩐 일이래. 누구한테 협박이라도 당했어?

    “이제부터 개인적인 잡담은 금지한다.”

    정령왕들이 뺨을 부풀리면서 뾰로통하게 소환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번 일에 한해서만큼은 바싸고가 옳았다. 벨레드와 시트리는 이미 무기를 바로잡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저편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살기는 점점 다가오더니 이윽고 주변의 대지를 짓누르기에 이르렀다.

    근처에서 병졸들이 내지르는 고함이 들려왔다. 창칼이 요란하게 부딪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주변은 조용했다. 브르타뉴의 기사단도 이곳으로는 말발굽을 몰지 않았다. 마왕군의 장창병도 자리를 피한 지 오래였다. 공기마저 숨을 죽인 듯한 착각 속에, 불현듯, 늑대의 발걸음이 울렸다.

    “두 명은 예상한 얼굴이고. 한 명은 의외의 얼굴이군.”

    거대한 늑대에 올라탄 채 마왕 아가레스는 그곳에 있었다.

    “바싸고. 너마저 '그쪽'에 붙을 줄은 몰랐다.”

    “…….”

    “뭐, 좋지. 대세에 따르는 걸 탓할 수야 없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아무런 전조도 없이 화염이 쏟아졌다. 불의 정령왕이 내뿜은 불길은 순식간에 아가레스를 덮쳤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러나 겨우 삼 초가 흘렀을 때, 화염 한가운데에서 돌풍이 일어나며 불길을 두 쪽으로 갈랐다.

    화염이 사그라들고 그 자리에 검붉은 오러가 피어났다.

    “하지만, 본디 대세를 따르는 것은 약자들일 따름이지.”

    아가레스가 할버드를 쥐고 씨익 웃었다.

    “바싸고. 너가 바알 대신에 새로이 발견한 강자가 바르바토스인지 파이몬인지, 아니면 마르바스인지 상관없어. 마지막으로 질문할 기회를 주겠어.――그 녀석들, 나보다 강해?”

    “…….”

    지금 공격은 결코 탐색전 따위가 아니었다. 불의 정령왕으로서 가장 강력하게 먹일 수 있는 한방이었다. 완벽한 순간에 완벽한 공격이었거늘, 아가레스는 마치 촛불을 꺼트리듯 간단하게 막아냈다.

    그런 아가레스가 질문한 것이었다. 만약 그쪽이 불안하면 지금이라도 나한테 붙어도 용서하겠다고.

    바싸고가 입끝을 비틀었다.

    “……아가레스. 나 또한 한 가지 질문하마. 너는 바알보다 강한가?”

    “으음? 글쎄. 어떻게 되려나.”

    아가레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경우와 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맨몸으로 붙는 게 아닌 이상에야 내가 바알한테 패배하겠지. 이길 확률은 사할쯤일까. 그게 왜?”

    바싸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바알을 참살했다. 그걸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겠지.”

    “……흐음. 유감이야.”

    아가레스가 할버드 끝을 마왕들에게 겨누었다. 더 이상은 질문도 대답도 없었다.

    벨레드와 시트리가 기합을 지르며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아가레스가 할버드를 돌려서 두 마왕의 도끼와 검을 한번에 튕겨냈다. 협공을 막아낸 직후, 아가레스는 늑대에서 뛰어내려 시트리한테 뛰어갔다.

    시트리의 사복검은 평범한 무구가 아니었다. 자유자재로 길이가 늘어나기도 했고, 멋대로 휘어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공격해오기도 했다.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따라서 벨레드보다 시트리를 먼저, 라는 생각으로 단숨에 기습한 것이었다.

    시트리가 이를 물었다. 타이밍을 빼앗기고 말았다. 협공이 이토록 손쉽게 실패할 줄은 몰랐다. 시트리의 표정을 조소하며 아가레스는 할버드를 휘둘렀으나――.

    “――오호라.”

    할버드는 종잇장만한 차이로 시트리의 얼굴이 아니라 허공을 갈랐다. 아가레스가 슬쩍 아래를 확인해보자, 땅바닥에서 나무뿌리가 솟아나 자신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조금 힘을 주자 나무뿌리는 힘없이 끊어졌다. 하지만 그 틈에 시트리는 이미 멀찍이 물러섰다. 어느새 벨레드와 보조를 이루어 빈틈없이 아가레스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바싸고 곁에서 대지의 정령왕이 얄밉게 웃고 있었다.

    “과연.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벨레드와 시트리가 무기를 섞는 가운데 정령왕들이 방해한다. 상대측의 전술을 알아채고 아가레스가 웃었다.

    “방금 깨달은 것인데……나, 용족과 마족, 인간종과 아인종, 전부 가리지 않고 적어도 한 놈 정도는 죽여봤지만. 어째서인지 정령왕은 한 번도 배어본 적이 없군. 참 기이한 일이야.”

    아가레스가 할버드를 고쳐잡았다.

    “정령왕도 죽을 때 비명을 지르는지 어디 확인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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