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89화 (289/510)
  • 00289 꼭두각시 전쟁  =========================================================================

    ‘자, 잠시만. 아가씨. 아무리 나라도 아가레스를 감당할 수는 없어!’

    ‘이제 와서 겸손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라우라가 싱글벙글거렸다.

    ‘장군께서는 일개 부사령관도 무시할 만큼 대단한 분이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아가레스는 일신의 무력이 대단하다고 한들 브르타뉴의 객장. 벨레드 장군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

    ‘아니면……혹시, 객장을 상대할 자신도 없으면서 본관의 지휘에 간섭하신 것입니까?’

    벨레드 형님이 땀을 뻘뻘 흘렸다.

    ─ 휙.

    형님이 고개를 돌렸다. 제발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내 쪽을 쳐다본 것이었다. 참고로 나는 이미 그 시선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한참 전부터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아, 이 막사, 정말로 고급스러운 호피(虎皮)로 지어졌네……얼마나 비쌀까…….

    ─ 휘익.

    벨레드 형님이 이번에는 바르바토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바르바토스가 어디 눈치밥으로 누구한테 뒤질 여자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땅바닥만 보고 있었다.

    형님에게는 미안하지만, 바르바토스랑 나는 알고 있거든. 라우라가 얼마나 쫌생이인지 말이다. 평소에는 대범하게 넘어가지만 그런 애일수록 자기가 정해놓은 일선이 침범당하면 얄짤없다. 봐라. 섹스하고 난 다음날 아침에 바르바토스가 사라졌다고 해서 엄청 구박하지 않았던가. 자고로 현자란 그런 여자가 화났을 때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 법이다.

    벨레드 형님은 표정이 절망에 물들었다. 아우에게도 주군에게도 버림받은 상황. 희망은 없어보였다.

    ‘저기, 라우라~.’

    만약 마왕군에 유일무이한 천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예, 시트리 언니. 말씀하십시오.’

    ‘벨레드 저 아저씨가 재수없는 건 맞는데, 그래도 아가레스를 혼자서 상대하기란 불가능해. 아까운 전력 하나가 낭비될 뿐이거든. 조금 봐줘라.’

    하고 양손을 모아서 귀엽게 윙크하는 시트리.

    여기서는 마왕들이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트리는 산악파의 강경파였고, 벨레드는 평원파의 강경파였다. 두 사람은 사사건건 대립해왔다. 이곳에서 벨레드를 절대로 지지하지 않을 사람을 골라보라면 단연 시트리가 뽑히겠지.

    그런데도 시트리는 사적인 감정을 배제했다. 순전히 아군 전체를 생각해서 발언했다.

    ‘……시트리 언니의 말씀이 옳습니다.’

    라우라가 한숨 쉬듯이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시트리가 저리 나와서야 라우라도 개인적인 감정을 고집할 수 없었다.

    ‘마왕 아가레스는 강적. 벨레드 장군님 역시 강하시나 단신으로 그녀와 맞붙는 것은 무리수입니다. 아가레스에게 대처하는 방법은 추후에 다시 논하겠습니다.’

    ‘고, 고맙소. 부사령관.’

    벨레드 형님이 벌떡 일어서서 라우라한테 허리를 숙였다. 죽다 살아났다. 그런 느낌이 온몸에서 풀풀 풍겨났다. 라우라는 덤덤하게 사과를 받았다.

    ‘본관에게 고마울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머리를 어디로 돌려야 하는지, 그 정도는 장군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입니다. 적의 동태에 유의해주십시오. 이상.’

    라우라가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각탁에 앉은 마왕들이 일어났다. 라우라가 망토를 펄럭이며 막사 바깥으로 걸어나가자 마왕들이 군례를 올림으로써 배웅했다. 지금 이 순간, 부사령관의 권위는 다시금 확실하게 정립되었다.

    ‘크흠, 크음. 저기. 시트리.’

    벨레드 형님이 시트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멀대 멧돼지?’

    ‘……아까 전에 도와줘서 고맙다.’

    시트리가 미간을 좁혔다.

    ‘착각하지 마. 그거 너 도와주려고 한 말 아니거든? 누가 멍청하다고 욕하지 않을까봐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멍청하게 꿀꿀거리네.’

    ‘뭐, 뭐라고?’

    ‘어차피 너 혼자 나대봤자 아가레스가 할버드 한방 휘두르면 깨개갱 하고 개처럼 나가떨어질 거 아냐. 저어번에 호기롭게 아가레스한테 달려들었다가 너 오른팔 날렸다며. 멀대 멧돼지 수준이야 뻔하지.’

    시트리가 혓바닥을 내밀어서 메롱했다. 벨레드 형님의 이마에서 힘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한방이 아니다……스무 합은 견뎠다.’

    ‘그래. 어차피 아가레스 상대할 마왕은 정해져 있어. 너랑 나, 그리고 몇 명 추가되는 정도겠지. 네가 스무 합 견뎌주면 결과적으로 내가 편하잖아. 그러니까 봐달라고 한 거지. 너 좋으라고 한 말 이니니까 꿈 깨렴, 고자 새끼야.’

    시트리가 깔깔깔 웃으면서 막사를 나섰다. 산악파의 마왕들도 숨 죽여 웃으면서 시트리를 쫓았다.

    벨레드 형님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얼른 다른 마왕들한테 묻혀서 막사를 빠져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등 뒤에서 벨레드 형님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아아악! 언젠가 반드시 썰어줄 테다, 창녀 새끼!’

    이것이 보름 동안 일어난 주요 사건이라고 할까.

    라우라는 군량고를 알아내는 한편 내부를 정리했다. 달리 말해 아군의 작전목표를 명확하게 했고, 목적 달성에 필요한 내부의 힘을 한데로 뭉쳤다.

    바깥과 안쪽. 둘 중 어느 하나만 무너져도 전쟁에선 결코 승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라우라에게 지난 보름은 결코 의미없는 시간이 아니겠지.

    “벨레드 형님 말입니다. 약간 지나치게 심술궂지 않았습니까?”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사령부에 반항하는 멍청이는 이쪽에서 사양이다. 그게 아무리 강력한 병사라 할지라도.”

    라우라가 냉정하게 말했다.

    “바르바토스 각하와 파이몬 각하, 마르바스 각하가 소녀를 지지해주고 있지만 다른 마왕들은 아니다. 소녀의 지휘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 인간에게 명령 따위를 들을까보냐. 내심 그런 심정도 있을 것이다.”

    “뭐. 부정할 수 없지요.”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왕들은 모두 자존심 덩어리다. 파벌의 수장들이 찬성했다고 하나 쉽사리 인간 소녀의 명령에 수긍할 리 없다. 마족과 인간종은 수천 년 동안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거듭해왔다. 종족 사이에 파인 갈등은 생각보다 깊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에 이해 따위는 필요없다.”

    라우라가 푸른 눈동자로 전방을 노려보았다.

    “필요한 것은 실적. 더 많이 죽이고, 더 효율적으로 죽이고, 더 냉정하게 죽이는 것뿐이다. 살육행위를 방해하는 위험요소는 뿌리부터 미리 뽑아놔야 한다.”

    “그래서 반쯤 의도적으로 벨레드 형님을 폭발시켰습니까.”

    “아아.”

    라우라는 일부러 장군들에게 작전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왜 보급로가 강탈당하는데도 잠자코 있는가, 왜 단기결전이 필요한 이때 장기전을 준비하는가, 왜 요새를 지으면서 동시에 땟목을 만드는가…….

    장군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답답했겠지. 성격이 활화산 같은 벨레드 형님이 가장 먼저 폭발했다. 결코 우발적으로 일어난 항명이 아니었다. 라우라가 일부러 일으킨 것이었다.

    “깔끔하군요, 라우라.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책략에도 통달했습니까?”

    “주군으로 모신 남자가 이쪽 방면의 전문가라서 말이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저절로 익숙해지더군. 정말로 훌륭하게 악랄한 주군이다.”

    이런, 말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가……씁쓸한 일이로군.

    내가 가신을 이길 날은 앞으로 영원히 오지 않겠지. 그날, 운명이 바뀐 밤. 나의 가벼운 도발에 넘어와서 혀를 깨물려고 한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사라지고 없다. 지금 내 옆에는 스무 살의 나이에 오만 대군을 휘어잡은 사령관만이 서 있다.

    그때였다. 꾸욱, 하고 무언가가 내 오른손을 잡았다. 내려다보니 그것은 라우라의 왼손이었다.

    “소녀는 대단하지 않다.”

    라우라는 여전히 전방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공작가에서 태어나 십오 년을 골방에 갇혀 지냈다. 소녀에게 허락된 것은 도서관이라는 이름의 감옥뿐. 머릿속에서 철학과 역사를 논하며 그것만이 자신에게 허락된 세계라며 위안했다.”

    밤하늘이 갑자기 밝아졌다. 브르타뉴의 마법사들이 광구(光球)를 쏘아올린 것이었다. 전장에 시야를 밝히기 위해서겠지. 아군을 향해 달려오는 브르타뉴의 군사가, 파도처럼 넓게 퍼진 기사단이 환하게 다 비추었다.

    “처음으로 저택에서 나갔을 때 소녀는 이미 성노예였다. 우스운 일이지 않는가. 귀족일 때는 저택에 유폐되어 살았다. 이제 드디어 저택에서 자유롭게 되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노예가 되었다. 어차피 소녀의 운명은 그런 것이라고. 자유란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다.”

    브르타뉴를 위하여! 여왕 전하 만세!

    군사의 함성이 들려왔다. 말발굽 소리가 온 사방을 뒤흔들었다. 기사들이 비정상적으로 긴 랜스를 꼬나쥐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맞서 군단장들이 침착하게 명령했다. 오크들이 장창을 던졌다.

    “알고 있는가. 주군을 만난 그 순간부터 비로소 소녀의 세계는 개화했다.”

    장창이 기사의 몸통을 꿰뚫는다. 종잇장처럼 인간의 몸이 구부러져서 형편없이 나가떨어진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몸뚱어리를 뒷선 군마의 말발굽이 무참하게 짓밟는다. 기사단은 동료의 죽음에 개의치 않고 돌격해온다.

    “세상이 주군을 뭐라고 질타하든 상관없다. 악질적인 어릿광대, 모욕하는 자, 쓰레기, 어떤 식으로 불러도. 주군은 소녀에게 다만 영원토록  주군이다.”

    “…….”

    “이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소녀의 명예는 오직 주군의 명예일 뿐이며, 소녀가 이루어낸 모든 것 또한 오로지 주군이 이루어낸 것에 지나지 않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왼손을 조금 더 강하게 잡았다.

    내가 멀리 전장을 바라보았다.

    “라우라. 저는 승리를 원합니다.”

    “주군이 바란다면 백 번의 승리를 가져다주겠다.”

    그녀가 즉답했다.

    “앙리에타 여왕이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검은 백합은 갈갈이 찢겨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절명할 것이다.”

    “아가레스가 죽기를 바랍니다.”

    “음, 두개골만은 소녀에게 선물해주기를 바란다.”

    “푸후.”

    내 입가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새삼스럽지만 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신하를 얻어버렸는가 실감했다. 정말로 반칙 같은 여자가 아닌가.

    양군이 격돌했다. 랜스와 장창이 엇갈렸다.

    기사단의 돌격은 생각보다 효과가 뛰어나지 않았다. 우리군이 참호를 파놓고 그곳에서 방어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참호 바깥으로 장창들이 튀어나와 있자, 기사단은 그렇지 않아도 각도가 나오지 않아 고생하는 판국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도하 지점에 참호를 판 것은 바싸고였다.

    보름 동안 대치를 하는 와중에 바싸고는 정령왕을 동원해서 비밀리에 참호를 팠다. 어떻게 감히 전(前) 서열 제3위이자 정령왕을 부리는 마왕인 자신에게 한낱 땅파기를 시키느냐며 으르렁거렸지.

    하지만 그 애늙은이, 뭘 시키면 의외로 잘 따라준단 말이지. 투덜거리면서 자기 할 일은 다한다. 자기 입장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기 때문이리라. 얼마나 이쁜가? 이래서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기사단이 세 차례쯤 돌격을 시도했다. 랜스만 낭비했을 뿐이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오크들의 투창에 꿰뚫려 낙마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참호와 투창의 조합은 거의 완벽하게 일제 돌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조급하겠지. 지금도 우리군은 뗏목과 부교를 사용해서 강을 넘고 있다. 이대로 도하가 완료되면 적군은 졸지에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린다. 무슨 수가 있더라도 그런 사태만큼은 피하고 싶을 거다.

    그리고 앙리에타 여왕에게는 실로 비장의 수가 주어져 있었다.

    “오는군.”

    “저한테도 보입니다.”

    한밤인데도 선명하게 불타오르는 붉은색 오러. 거대한 늑대를 타고 할버드를 쥔, 만인지적(萬人之敵)의 군마일체――.

    마왕 아가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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