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88화 (288/510)
  • 00288 꼭두각시 전쟁  =========================================================================

    “확실하지는 않다. 먼저, 정말로 군량고가 남쪽 강변에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또한 군량고의 위치는 극비로 취급되어 있을 터. 마왕군이 그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 역시 적다.”

    엘리자베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허나, 만에 하나라도 마왕군이 정보를 얻었다면 위험하다. 마왕군은 틀림없이 파리시오룸으로 진격하는 척 위장하겠지. 앙리에타는 황태후와 황제를 놓치면 안 된다. 파리시오룸으로 달려가서 황태후와 황제의 신변부터 확보할 게 분명하다.”

    최악의 경우는 군량고가 만약 파리시오룸이 있는 곳과 똑같은 방향에 지어졌을 때이다. 마왕군이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지 그 경로가 헷갈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굳이 최악의 경우를 입에 담지 않았다.

    “식량을 잃어버릴 경우 앙리에타는 계속해서 후퇴할 수밖에 없다. 약탈이 자행되겠지. 프랑크 제국에서 브르타뉴에 대한 증오심이 순식간에 커져버린다. 아니, 단탈리안이 노리는 것은 그런 상황일지도 모르겠군…….”

    “각하. 군량고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앙리에타 전하가 알지 못할까요?”

    유리아가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아예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엘리자베트는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마왕군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왕군은 정말로 파리시오룸을 노리는 걸 수도 있다. 파리시오룸인가 군량고인가, 어느 쪽도 확실하지 않은 이상 앙리에타는 군을 한곳에 집중시킬 수 없다…….”

    엘리자베트는 혹시나 모르므로 마법수정구를 복구해볼 것을 명령했다. 유리아는 진땀을 흘리며 반마법을 돌파하려 노력했다. 이십 분이 지나고 유리아가 기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 송구하오나…….”

    “복구가 안 되는가.”

    “예.”

    엘리자베트의 한숨이 깊어졌다. 전쟁터에서 적의 의도를 늦게 알아차리는 것은 때때로 치명타로 다가왔다. 조금이라도 빨리 눈치 채면 승률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하지만 이쪽에서 알려주는 것이 불가능했다.

    “7서클, 아니 8서클의 마법사가 반마법을 주도하는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본국의 마법전대를 동원하면 가능하겠는가?”

    “죄송합니다. 마법전대를 모두 동원해도 어려울 수준입니다. 고위 마법사뿐만이 아니라 서른 명 이상의 마족이 보조하는 듯합니다.”

    엘리자베트는 인간계와 마계의 마법전력 차이를 절감했다.

    마법사는 기사와 달리 양육할 수단이 부족했다. 지나치게 재능에 의존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숫자가 적은 마탑이 최근 몇 년 들어서는 어째서인지 합스부르크 북부로 넘어가는 바람에,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마법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길게 한탄했다.

    “우리가 아무리 서둘러도 파리시오룸까지 닷새가 넘게 걸린다. 그때는 이미 어떤 식으로든 결착이 났을 터다. 유리아, 우리에게는 친우의 행운을 빌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겠구나…….”

    “최대한 행군 속도를 올리겠습니다.”

    군마에 지속적으로 체력 회복 마법을 걸어주면 이틀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사흘에서 나흘이 걸리겠지. 엘리자베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공격해오는군요, 부사령관 각하.”

    “주군. 소녀를 놀리면 재밌는가?”

    라우라가 뺨을 부풀렸다. 햄스터 같아서 무척 귀여웠다.

    “당연하지요. 세상에서 라우라를 놀리는 게 가장 재밌습니다.”

    “정말이지, 주군은…….”

    라우라가 투덜거렸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부사령관으로서 체통을 지키라고 충고했겠지만, 전투를 코앞에 두고 군단장들은 전부 자기 부대로 돌아갔다. 지금 이 막사에는 라우라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 고블린 전령들이 대기하고 있지만 무시해도 좋겠지.

    원래라면 전령을 쓸 필요없이 마법수정구로 연락하지만 말이지. 현재 이 지역에는 광범위한 통신 방해 마법이 걸려 있다. 가미긴이 직접 와이번에 올라타 공중에서 절찬리에 반마법을 전개하는 중이다. 적군도 아군도 마법통신은 불가능하다.

    통신을 방해하는 목적은 교란이다. 외부와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인간은 불안해한다. 하물며 그 인간이 삼만의 병력을 이끌고 일국의 운명을 책임진 군주라면 심리적으로 대단히 압박을 받겠지.

    나는 전방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브르타뉴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횃불을 보아하니 전군을 끌고 온 모양이군요.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이럴 거면 매복군을 준비해둘 것을 그랬습니다.”

    “주군, 농담이겠지. 소수의 복병을 준비해봤자 마왕 아가레스에게 전멸할 뿐이다. 시간 벌기조차 안 된다.”

    “일만 이상으로 복병을 마련했다면 어떻습니까?”

    “그럼 우리는 일만이나 적은 병력으로 브르타뉴 기사단의 일제 돌격을 맞이해야겠군. 소녀가 기억하기로 저것보다 훨씬 적은 기사단에 주군은 초토화 당한 경험이 있다마는. 자신이 있는가?”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간 라우라에겐 당할 수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바르바토스한테 맡기는 수밖에 없군요.”

    “바르바토스 각하도 각하이지만, 베르시 준남작의 역할도 중요하다. 제때 시간에 맞추어주면 좋으련만.”

    우리군은 보름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군대가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지,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브르타뉴군이 배수진을 친 것을 보고 라우라가 내뱉은 말이 있었다.

    ‘우리는 싸우지 않는다.’

    배수진이란 무엇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쪽과 한판 붙겠다는 의지였다. 라우라는 상대방이 단기결전을 열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를 역으로 이용하고자 결심했다.

    그녀는 먼저 브르타뉴군의 군량창고가 어디 있는지부터 탐색했다. 파리시오룸에는 군량고가 없다는 것이 이미 확인되었다. 프랑크의 귀족들이 지속적으로 은밀하게 정보를 전해준 덕분이었다.

    파리시오룸에는 군량고가 없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지는 제도 근방의 요새들……문제는, 파리시오룸 근처에 크고 작은 요새가 자그마치 열일곱 개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많은 요새를 일일이 점령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라우라는 적진을 살펴보고 말했다.

    ‘조운선으로 군량을 운반하는군. 군량고는 강변에 위치해 있다. 주군, 강줄기에 맞닿은 요새가 몇 군데 있는가.’

    ‘여섯 개군요. 음, 확실히 경우의 수가 줄었습니다.’

    내가 만족하며 미소를 짓자 라우라는 도리어 눈썹을 찌푸렸다.

    ‘여섯 개도 여전히 많다. 북쪽 강변이 아니라 남쪽 강변에 위치한 요새를 추려봐라.’

    ‘그렇게 하면 네 군데로 줄어듭니다만……왜 하필 남쪽입니까?’

    라우라가 즉답했다.

    ‘우리군은 합스부르크 북부에서 공격해왔다. 경로상 파리시오룸의 북쪽으로 진군할 수밖에 없지. 주군이라면 적군이 다가오는 쪽에 군량고를 두겠는가, 아니면 반대 방향에 군량고를 두겠는가?’

    그 말대로였다.

    후보가 열일곱 개에서 네 개로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나는 바싸고에게 부탁해서 물의 정령을 풀었다. 조운선의 뒤를 쫓아서 군량고를 역추적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과연 앙리에타 여왕은 용의주도했다.

    조운선들은 어느 한곳에만 정박하지 않았다. 상류에 있는 요새부터 시작해서 하류에 있는 요새까지, 조운선들은 차례대로 정박해서 물건을 날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물건이 뭔지 알 수 없게 위장해놨다. 네 곳 중 하나만이 진짜로 식량을 운반하고 있겠지.

    이제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다 싶어 내가 의견을 내밀었다.

    ‘정령들을 시켜서 습격해보지요.’

    라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하다. 소란이 일어나면 우리가 군량고를 찾고 있음이 적에게 알려진다. 저들은 우리의 의도를 끝까지 모르고 있어야만 한다. 흐음. 주군은 정말로 전투에는 재능이 없군.’

    ‘……직접 확인해볼 수 없으면 무슨 수로 군량고를 알아냅니까? 그냥 찍을려고요?’

    ‘상상력을 발휘하라, 주군.’

    라우라가 씨익 웃었다. 악동처럼 짖궂은 미소였다.

    ‘굳이 우리가 알아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예?’

    ‘브르타뉴군은 스스로 군량고가 어디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의아해하며 질문하자, 라우라는 가만히 지켜보면 알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군은 브르타뉴군의 별동대에 시달리고 있었다. 프랑크 동북부에서는 '안전세'를 명목으로 군량미를 보냈는데,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번번이 중간에 적군한테 빼앗겼다. 별동대가 순짜 기사들로만 이루어져 소수의 호위대로는 감당하기 불가능했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가져온 식량으로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도 라우라는 숲에서 목재를 공급해오라고 명령했고, 그걸로 진영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장기전을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결국 벨레드 형님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어이, 부사령관 아가씨.’

    회의시간. 벨레드 형님이 벌떡 일어섰다.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자, 벨레드 형님이 라우라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댁이 바르바토스 각하랑 단탈리안의 애인이래도 내 할 말은 해야겠수. 제정신이오?’

    라우라가 덤덤하게 시선을 넘겨 받으며 대꾸했다.

    ‘저는 언제나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자부합니다. 벨레드 장군.’

    ‘흐. 브르타뉴의 애새끼들이 우리네 보급로를 번번이 털어먹고 있소. 장기전을 펼치는 것까지 말리진 않겠지만, 댁은 몰라도 우리는 먹을 게 없으면 싸우지를 못하거든?’

    벨레드 형님이 으르렁거렸다. 형님은 애당초 인간이 사령관을 맡는다는 것에 가장 격렬히 반대한 마왕으로서, 바르바토스만 아니었으면 반란을 일으켜도 진즉에 일으켰을 것이다.

    ‘호위병력을 늘리든가 그게 안 된다면 식량이 동나기 전에 적군을 깨부숴야 할 거 아니오. 그런데 부사령관 아가씨는 태평하게 나무를 배어와서 목책이나 쌓으라니, 내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아가씨가 저놈들이랑 싸우기 무서워서 겁쟁이처럼 틀어박힌 걸로 보여.’

    ‘……하아.’

    저편에 앉은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벨레드 형님은 끄떡하지 않았다.

    ‘부사령관 아가씨. 어디 설명 좀 해보시오. 미리 경고하건대, 만약 그럴듯한 대답이 안 나오면 나는 그냥 내 부대라도 이끌고 공격할 거요. 쫄리면 당장이라도 보급로에 호위병력을 추가하든가.’

    ‘불가합니다, 벨레드 장군.’

    라우라가 손에 깍지를 꼈다.

    ‘보급로는 계속해서 약탈당해야 합니다.’

    ‘……아가씨는 분명히 아까 전에 자기가 제정신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혹시 내 귀가 비루먹어서 잘못 들은 건가.’

    ‘제대로 들었습니다. 본관은 제정신입니다.’

    벨레드 형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 식량이 떨어져가는데 장기전을 치루라고? 어이, 아가씨. 아무래도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병법을 논해서는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리고 나는 왠지 모르게 아가씨가 입을 닥쳐야 하는 쪽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단 말이지.’

    ‘군량이란 상대적입니다.’

    라우라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에게 일주일치 군량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만일 적군에게 하루치 군량만 남았다면 우리의 승리입니다. 아군은 그저 적군보다 군량이 많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 아닌가! 저놈들은 강으로 계속해서 식량을 보급받는데 우리는 육로가 병신이 되었다!’

    벨레드 형님이 일갈했다. 상위 마왕의 살기를 온몸으로 받았을 텐데도 라우라는 얼굴에 표정이 털끝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브르타뉴군은 배수진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로막힌 형태입니다. 달리 말해, 저들은 육로로 보급을 받지 못합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여기서 본관이 질문하겠습니다. 벨레드 장군, 브르타뉴군의 별동대는 우리의 식량을 약탈해갔습니다.’

    라우라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들이 약탈한 식량을 어디로 운반하겠습니까?’

    누군가가 탄성을 질렀다. 시선을 돌려보니 파이몬이었다. 파이몬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소리쳤다.

    ‘군량창고로 향할 거와요. 그곳에 모았다가 보급할 생각으로!’

    ‘맞습니다, 파이몬 군단장. 별동대들은 약탈한 식량을 창고에 비축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관은 약탈을 허용하는 대신 별동대의 뒤를 추적했습니다.’

    라우라가 벨레드를 바라보았다.

    ‘이미 군량고가 위치한 요새를 파악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저 그 요새를 불태우는 일입니다. 벨레드 장군. 보다시피 본관은 제정신입니다.’

    ‘…….’

    ‘본관은 용감한 병사를 무척 좋아합니다. 벨레드 장군께서는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어서 몸이 불끈거리시는 것 같으니, 특별히 가장 화끈한 싸움을 맡겨드리겠습니다. 부디 마왕 아가레스를 상대해주십시오. 배신자 아가레스입니다. 더없이 즐거운 싸움이 될 것입니다.’

    벨레드 형님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라우라가 활짝 웃었다. 웃는 얼굴만 보면 순수한 천사나 다름없었다. 물론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사형선고였지만.

    ‘사양하지 않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장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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