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87화 (287/510)
  • 00287 꼭두각시 전쟁  =========================================================================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장군들 앞에서 단호하게 말했으나 앙리에타는 내심 조급했다. 대군은 강물을 건널 때 가장 허약해진다. 아홉 살짜리 어린애라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도 적군은 도하를 시작했다…….

    상대도 바보가 아니다. 위험을 감수한다면 거기엔 틀림없이 이유가 있다. 즉…….

    ‘충분히 방비가 되어 있거나 아니면 우리를 기만하는 것이다.’

    앙리에타가 막사에서 걸어나가 애마에 올라탔다. 이미 군중에서는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야밤인데도 불구하고 브르타뉴군은 부사관들의 지휘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이루었다.

    “밤을 겁내지 마라! 마법사들이 그대들의 앞길과 동료를 밝혀주리라! 동료에게 지나치게 접근하지 말 것이며, 지나치게 떨어지지도 말 지어다! 명령을 등불로 삼아 밤을 헤쳐나가라!”

    앙리에타가 군진을 돌아다니며 직접 병사들을 복돋우었다. 병사들은 그때마다 투구를 벗어 흔들거나 횃불을 흔들며 자랑스러운 여왕 전하에게 호응했다.

    “앙리에타 전하 만세! 만세!”

    “여신이시여, 여왕을 수호하소서!”

    야간에 전투가 임박했음에도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앙리에타 여왕은 그들에게 영웅이었다. 수백 년의 숙적인 프랑크 제국을 정벌한 군주가 바로 저 분이지 않은가!

    근위대장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가 씩씩하게 고했다.

    “제1진과 제2진의 배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전하. 당장이라도 출진할 수 있습니다.”

    “음.”

    앙리에타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들이 명령을 받고 곳곳에 흩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순식간에 배치가 완료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여왕은 조급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부대의 선두로 갔다.

    “연설은 생략한다. 즉시 출격하도록.”

    “예, 전하. 나팔수는 출진을 알리라!”

    근위대장이 나팔수를 향해서 소리쳤다.

    ─ 부우우우.

    뿔나팔이 길고 음산하게 밤하늘에 울렸다. 처음에는 한 자락으로 이어지던 뿔나빨 소리는 양옆으로, 앞뒤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동료의 소리에 잠이 깬 것처럼 뿔나팔 수십 개가 한밤의 공기를 흔들었다.

    소수의 수비군만 남기고 전군이 출진했다.

    ‘도하하는 와중인데도 충분히 방비가 되어 있다면……역시 진심으로 강을 건너려는 것이겠지. 우리군을 피해서 파리시오룸에 입성하는 게 목적이다.’

    앙리에타가 뒷머리를 한데로 묶으면서 생각했다. 그녀는 근위대와 함께 전체 병력을 선도하고 있었다.

    ‘문제는 만에 하나 적군이 기만책을 쓴 경우야.’

    이때, 마왕군은 어디엔가 병력을 매복시켜두었다는 얘기가 된다.

    아마도 아군이 도하하는 적군의 꼬리를 공격하는 순간을 노리겠지. 매복해 있던 병력이 튀어나와서 아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다. 도하인가, 매복인가. 어느 쪽이든 충분히 가능하다…….

    한 인영이 앙리에타 근처에 바짝 다가 붙었다. 이 인물은 군마가 아니라 붉은색 늑대에 올라타 있었다.

    “어휴. 아닌 밤중에 웬 난리래.”

    “……아가레스.”

    “꼬맹이는 밤에 자야 키가 쑥쑥 자라는데 하여간 생활습관부터 잘못되었어. 바르바토스 애송이가 밤톨이만한 거에 다 이유가 있어요.”

    마왕 아가레스였다. 그녀가 크게 하품하면서 중얼거렸다.

    “공중도 조심해라. 가미긴이라는 마왕은 와이번을 엄청 끌고 다니거든.”

    “공중에서…… 그렇네. 하늘에서 공격해오는 방법도 있었구나.”

    앙리에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야밤이라 시야가 어두운데 공중에서 와이번이 급습까지 하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실제 피해보다 병사들의 동요가 훨씬 더 큰 문제이리라.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에 빠지자 아가레스가 손쉽게 해답까지 건네주었다.

    “마법사들한테 행여나 와이번이 강습하면 마법으로 빛을 내서 그놈들 눈부터 멀게 만들라고 명령하고.”

    “과연.”

    대응책은 즉시 마법사 전대에 하달되었다. 앙리에타가 질문했다.

    “아가레스, 저들이 복병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해?”

    “나는 전투에 나설 때 단 한번도 적의 의도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

    오만방자한 대답. 하지만 앙리에타는 수긍했다.

    아가레스가 합스부르크에서 쫓겨와 망명을 요청했을 때, 앙리에타 여왕은 시험삼아 아가레스의 실력을 견학한 적이 있었다. 몬스터 부락을 어린애 팔 비틀 듯 가볍게 전멸시키는 모습에서 앙리에타는 상대방의 무력을 인정했다. 이후 아가레스는 줄곧 객장(客將)으로 앙리에타 곁에 남았다.

    앙리에타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레스는 능히 단신으로 군을 상대할 수 있다.’

    적군이 매복을 준비해놨더라도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지간한 복병쯤은 아가레스에게 맡겨도 괜찮았다.

    아니, 생각해보니 아가레스가 이곳에 있는데 적군이 매복책 따위를 썼을 가능성이 적다. 복병을 따로 숨겨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군을 두 쪽으로 나눈다는 걸 뜻한다. 아가레스의 눈앞에서 병력을 나눈다니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역시 도하가 목적일까…….

    “전하! 보고를 올리나이다!”

    앞서 정찰을 나갔던 기병대가 돌아왔다.

    “적군, 마르네 강을 도하 중입니다!”

    앙리에타 여왕이 혀를 찼다. 그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재차 정찰조를 파견한 까닭은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적군의 병력을 정확히 보고해!”

    “예. 사만 이상입니다, 전하!”

    저 앞에 사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집결했다는 소리를 듣자 공기가 어딘지 적막해졌다. 브르타뉴군은 정예병 중 정예병이었지만 대군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정도로 감각이 마비되지는 않았다.

    “부교가 완성되었고, 이미 뗏목들로 병력을 옮기고 있습니다. 약 오천은 저편의 강변에 옮겨져 있습니다.”

    “흐응. 그럼 이쪽 편에 남은 병력은 삼만오천 정도라는 거군.”

    “그렇습니다, 전하!”

    이걸로 확실해졌다. 적군의 목적은 도하였다.

    벌써 오천 가량의 병력이 강을 건넜다. 복병을 따로 마련해둘 여유 따위는 없겠지. 설령 복병이 있을지라도 그 숫자는 일만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그럼 전혀 대단한 위협이 못 되었다.

    “전군, 속도를 높여라!”

    아가레스라는 대비책이 있는 이상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도 좋겠지. 여왕은 그리 판단하고 명령했다. 병사들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군의 모습이 보였다. 횃불이 무수하게 진영을 밝히고 있었다. 정찰병의 보고대로 부교가 완성되었다. 다른 부교도 두 개나 건설되고 있었다. 키가 언덕처럼 큼직한 트롤들이 강에 들어가서 다리를 놓았다.

    “적은 강을 사이에 두고 양분되어 있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물어 뜯어라!”

    “예, 전하!”

    지휘관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앙리에타 여왕은 아직 프랑크에 들어오지 못했을 친구를 떠올렸다. 통령이라는 직무마저 잠시 내려놓으며 자신을 도와주러 왔지만, 아무래도 친우는 헛고생을 하게 생겼다. 승패와 상관없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겠지.

    ─ 부우우우우.

    재차 브르타뉴의 뿔나팔이 울렸다.

    친우에게 단탈리안의 목을 선물하자, 하고 앙리에타가 생각했다. 포도주를 밤새도록 주고받는 것이다. 최고로 감미로운 술자리가 되리라. 그 순간을 위해서 오늘밤은 피와 땀을 흘려야만 한다…….

    *  *  *

    마왕군이 도하를 시작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소식을 전해들은 건 거기까지였다. 직후에 마법수정구에서 빛무리가 꺼졌다.

    “어라. 반(反)마법이네요.”

    옆에서 함께 소식을 듣던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사는 통령 제1비서이자 6서클 마법사인 유리아였다. 하프 엘프인 유리아는 마법에 정통했다.

    “여기까지 오는 마법까지 차단하려면 상당히 광범위하게 반마법을 걸어두었다는 건데……이상하네요. 마법사를 수백 명 동원하지 않는 이상에야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마왕군이 마법사를 수백 명이나 끌고 왔다는 얘기인가?”

    엘리자베트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급보를 듣고 막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악몽의 여파인지 머리가 사방에서 죄여오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유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설마 그런 무식한 방법을 썼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통신마법을 끊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아마도 공중에서 반마법을 펼쳤을 거예요. 그리폰이나 와이번에 올라탔을 것입니다.”

    “마법사들을 태워 공중에 보낸다라. 마족들이나 쓸 법한 수작이군…….”

    엘리자베트가 쓰게 웃었다.

    국가 차원에서 그리폰과 와이번을 기르는 데 성공한 사례가 적지 않았지만, 군부대로 활용하기에는 아직 연구가 부족했으며, 결정적으로 마왕군과 싸우는 데는 써먹지 못했다. 마물들은 마왕에 복종하니까.

    “설마 정말로 당장 전투가 일어날 줄이야. 조금 더 빨리 출발할 것을 그랬어.”

    “귀족들의 눈을 속이고, 시민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수천의 군대를 모은 것이에요.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이 최고의 결과를 보장해주진 않는다……그것이 안타깝군.”

    엘리자베트가 이끄는 별동대는 현재 합스부르크-프랑크 국경 지대에 도착해 있었다. 밤이 깊어 막사를 세워두고 취침에 들어갔다. 엘리자베트 통령과 유리아 비서는 한밤중에 전해져온 소식에 눈을 뜬 것이었다.

    “각하. 마왕군은 왜 마르네 강을 도하했을까요?”

    “지도를 봐라.”

    엘리자베트가 탁자에 놓인 군사지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파리시오룸 근방의 지리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르네 강을 도하해서 그대로 행군하면 바로 파리시오룸에 도착한다. 중간에 세쿠아나 강을 한 번 더 건너야 하지만, 이미 부교와 뗏목을 준비해두었다면 역시 쉽게 도하할 터이다. 반면에 앙리에타에겐 도하할 뗏목조차 없지…….”

    엘리자베트가 강줄기를 짚어나갔다. 손가락 끄트머리는 이윽고 프랑크 제국의 황도, 파리시오룸에서 멈추었다.

    “앙리에타에겐 마왕군을 영격할 수단이 없다. 마왕군이 느긋하게 파리시오룸에 입성하는 것을 강 건너편에서 지켜보는 수밖에. 그렇다면 둘 중 한 가지이다. 파리시오룸에서 시가전을 벌이든가, 이대로 파리시오룸을 포기하든가.”

    “아아……그렇군요. 도시 안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것은 기사단에게 무척 불쾌하겠네요, 각하.”

    기사단의 위력은 말에 올라탔을 때 발휘된다. 시가전은 기사단의 장점이 모조리 사장되어버리는 전쟁터이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리시오룸의 남쪽은 북쪽에 비해 성벽이 튼튼하지도 않다. 공성전을 벌이기에도 적이 부담스럽지. 하지만 앙리에타 입장에서는 딱히 큰 문제가 없다. 황제와 황태후를 빼낼 여유 정도는 충분할 테고, 재차 회전을 강요하면…….”

    그 순간, 엘리자베트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엘리자베트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그와 함께 시선이 지도 위를 빠르게 훑었다.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달라지자 유리아가 불안한 얼굴로 통령을 쳐다보았다. 엘리자베트의 입술 사이로 침음과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아니……하지만 어떻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엘리자베트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유리아. 브르타뉴군은 조운선으로 식량을 배급받고 있다. 안 그런가?”

    “예, 맞습니다.”

    “조운선은 어디에서 식량을 운반하고 있을까.”

    유리아가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것까지는 자신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정보를 공유한 적이 없습니다.”

    “앙리에타가 과연 잠재적인 반란분자들이 숨어 있는 파리시오룸에 식량을 비축했을까.”

    “……아니요.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요. 여차하면 반란분자들이 불을 질러버릴 수가 있습니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유리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렇다면 식량창고는 파리시오룸이 아닌 어딘가, 틀림없이 강변에 건설되어 있을 것이다. 도하를 예상하지 못했으니 아마도 북쪽 강변이 아니라 남쪽 강변에 따라 설치했겠지.”

    엘리자베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마왕군은 강을 건넜다. 만에 하나, 그 식량창고가 있는 요새가 남쪽 강변 어딘가에 위치한다면…….”

    유리아는 입을 벌렸다.

    “군량이군요! 군량을 불태우는 것이 적의 목적입니다, 각하!”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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