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86화 (286/510)
  • 00286 꼭두각시 전쟁  =========================================================================

    *  *  *

    “대치한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엘리자베트가 눈쌀을 찌푸렸다.

    널찍한 평원을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한 지 보름째. 인류군과 마왕군――세간에서는 왕국군과 제국군이라 불렀지만, 엘리자베트는 한사코 그 용법을 거부했다――어느 쪽도 지극히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앙리에타가 마법 수정구 너머에서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응. 정말이지,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네.”

    적군이 움직이지 않는 게 자기 탓은 아니다. 그런 느낌이었다.

    “박수도 손이 맞아야 울릴 거 아냐. 나오라고 편지도 보내보고 결투도 신청해보고 해볼 건 다해봤는데도 안 나와요. 거 참, 거하게 회전을 벌이려고 왔는데 꼭 공성전이라도 하는 기분이라니까.”

    “흐음. 이상한 일이로군. 시간을 끌어본들 마왕군에 득이 될 일은 없다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대체로 공격측이었다. 타국을 침범하여 내륙 깊숙하게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보급선이 길어졌다. 길고 얇게 이어진 보급선을 지키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물론 간단한 해결방식이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미간을 좁히며 혹시나, 하고 물었다.

    “저들이 약탈을 시행하고 있는가?”

    질문하면서도 내심 엘리자베트는 설마 그럴까 생각했다. 단탈리안은 누구보다 명분에 집착하는 인물이었다. 이 시기, 밀을 수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무렵에 무분별하게 약탈을 자행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민심이 앙리에타 쪽으로 기울겠지. 앙리에타는 귀족과 공화파에는 잔혹했지만 대부분의 백성, 즉 여신들께서 황제를 점찍어주셨다고 소박하게 믿는 백성들에겐 인자했다. 과하게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앙리에타가 고개를 저었다.

    “으응, 그건 아니야. 대신에 안전세라고 할까. 약탈하지 않을 테니 그 대가로 올 여름 수확량의 일할을 거두고 있다는데.”

    “그렇군. 수확량의 일할인가.”

    적당하다. 통상 민가에 비축된 식량의 삼할 가량이 약탈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단 일할만으로 마을과 도시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은 상당히 너그럽다. 말뿐인 약속이 아니겠지.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있을 거다. 역시나 단탈리안은 민심의 지지를 노리고 있었다.

    “……더더욱 이상해지는군. 앙리에타, 설마 저들이 얌전히 밀을 징수하도록 내버려두고 있지는 않겠지.”

    “당연하지.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앙리에타 여왕이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기사로 분견대를 만들어서 보급로가 보이는 족족 뺏어주고 있어. 자기네 딴에는 뺏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경로를 복잡하게 만든 것 같지만, 그래봤자 외지인이지. 지리에 어두워.”

    그렇다. 보급이 문제였다.

    앙리에타 여왕은 단순히 병졸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려고 배수진을 차린 게 아니었다. 그녀는 마왕군에서 부사령관을 맡은 인간 소녀가 하이델베르크 요새를 어떻게 함락했는지 알게 되었다. 강줄기를 점령하여 요새의 보급로를 괴사시킨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강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강을 배후에 두어주겠다. 이것이 앙리에타의 대응이었다.

    배수진 때문에 전술적인 부담감은 늘어났다. 하지만 브르타뉴군은 보급이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조운선이 강줄기로 와서 식량을 날라주면 그만이었다.

    반면에 마왕군은 식량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약탈을 금했을뿐더러, 설상가상 지리에 어두운 바람에 그나마 안전세로 거둔 식량조차 브르타뉴군의 별동대한테 뺏겼다.

    “그래서 너한테 상담하는 거야, 엘리제. 네가 말했잖아. 저기 부사령관이 보통 아이가 아니라면서. 도대체 왜 안 움직이는 거야?”

    “…….”

    시간이 흐를수록 브르타뉴군이 조금씩 유리해진다. 마왕군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엘리자베트가 중얼거렸다.

    “……우리를 의심암귀에 빠트려서 조급하게 공격하게끔 유도하고 있을 가능성은?”

    “아. 나도 그건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앙리에타가 불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기엔 단탈리안이 있잖아? 바르바토스도 있고. 으으음, 뭐라고 해야 되나.”

    “그들이 짜내기에는 지나치게 볼품없는 수작인가…….”

    “응. 아무래도 좀 아니다 싶지.”

    두 군주가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상대방의 의도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엘리자베트가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군. 상담에 어울려주지 못해 미안하다.”

    “아니야. 사실 내가 모르는 걸 네가 알아차렸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이틀은 잠자리에 들지 못했을걸.”

    앙리에타가 씨익 웃었다. 자신을 배려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면모에서 엘리자베트는 앙리에타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어쩌면 단탈리안은 프랑크의 귀족들이랑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을지 몰라. 마왕군이 침략해온 틈을 타서 귀족들은 파리시오룸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조한 것이라고.”

    “흐음…….”

    “바깥과 안쪽이 한꺼번에 협공해서 우리를 쓰러트릴 계획이었겠지. 하지만 내가 귀족들을 싸그리 숙청해버리니까 계획이 완전히 헝클어진 거야. 닭 쫓던 개가 된 거지. 지금 마왕군은 이도저도 못하고 새로운 계획이 세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거 아닐까.”

    충분히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아니, 현재 마왕군의 비합리적인 자세를 설명하려면 이외에 다른 해답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른다.”

    엘리자베트는 머리가 개운해지지 않았다. 추측이 옳을 경우, 단탈리안은 순전히 프랑크 귀족들에게 작전의 성공 여부를 맡겼다는 얘기가 되어버린다. 단탈리안이 정말로 그랬을까.

    의심을 가슴에 묻어두고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아무튼 어서 그쪽에 합류하겠다.”

    대외적으로 엘리자베트 통령은 민심을 살피러 시찰에 나섰다고 알려졌다. 실상은 전국에서 교묘하게 기사단을 조금씩 차출하여, 국민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군부대를 꾸렸다. 순전히 기병으로 이루어진 천오백 명의 별동대였다.

    물경 수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맞붙는 전쟁에서 천오백의 기병대는 그다지 가치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당연히 있는 편이 나았으며, 엘리자베트는 조금이라도 앙리에타를 도와주기 위해 직접 별동대를 이끌기로 했다.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틈을 타서 엘리자베트는 적군의 배후를 급습할 생각이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적군은 크게 당황하겠지. 전투 도중 배후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것만큼 끔찍한 사태는 없었다.

    장갑과 깃발을 브르타뉴군의 물건으로 위장하느라 여태 시간이 걸렸다. 오늘에서야 준비를 완료했다. 이번 전쟁에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절대로 알려져선 안 되었다.

    “응, 그래. 당장 내일이라도 전투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부탁해.”

    “아아. 지각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통신을 끊고 곧바로 기병대의 선두에 올랐다.

    *  *  *

    “오늘도 목책을 만들고만 있어?”

    “예. 적군은 근처 숲에서 목재를 보급해오고 있습니다.”

    앙리에타가 전령의 보고에 한숨을 쉬었다.

    친구에겐 당장 전투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정작 앙리에타 본인은 부정적이었다. 마왕군은 아무래도 야전을 공성전으로 만들어버릴 속셈 같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망루들이 세워졌고 목책이 배치되었다.

    “심지어 토산까지 쌓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일년을 바라보고 장기전을 펼치겠다는 걸까요. 어느 순간부터 대군을 유지할 수 없게 될 텐데, 이상하네요.”

    롱그위 성녀가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성녀의 말에 동조하며 장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급이 여의치 않은 현 상황에서 적군이 계속해서 오만 대군 수준의 병력을 유지하기란 한계가 있었다. 약탈이든 뭐든 어떻게든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서 대군을 잘게 쪼개야만 하겠지.

    그때가 바로 브르타뉴군이 승전을 거둘 날이었다. 시간을 끌어서 좋은 점이 없건만, 적군은 마치 장기전을 바라보듯이 진영을 요새화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어찌된 일인가…….

    결과적으로, 앙리에타는 친우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은 셈이 되었다. 바로 그날 밤에 앙리에타는 장군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이 깬 것이었다.

    “전하! 적군이 도하를 시작했습니다!”

    머릿속에서 잠기운이 덜 발생한 상태로 앙리에타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눈가를 비비며 되물었다.

    “……도하라니? 무슨 소리야.”

    “정찰병의 급보입니다. 전하, 적군은 부교와 뗏목을 동원하여 마르네 강을 넘고 있습니다.”

    앙리에타의 머리가 순식간에 환해졌다.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던 의문이 찰나에 해결되었다. 앙리에타가 잠옷 차림으로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빌어먹을,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구나!”

    그녀는 나삼에 망토만 걸치고 재빨리 뛰쳐나갔다. 시종들이 황망하여 제발 갑옷을 걸치라며 간청했지만, 앙리에타 여왕은 귀찮은 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낮이라면 속이 훤하게 비추었겠지만 지금은 밤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하늘을 힐끗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에 검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달빛도 없군. 노렸어.”

    앙리에타가 작전막사에 들어갔다. 한두 명을 제외하고 장수들이 전원 모여 있었다. 장수들이 일어서서 경례를 하기 전에 앙리에타가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절차는 생략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앙리에타 여왕이 상석에 앉았다.

    “보고해.”

    “예. 야간 정찰을 맡은 정찰조 중 하나가 적군이 마르네 강을 도하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시야가 어두워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아무리 적어도 삼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눈속임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현재 정찰조를 다시 보냈습니다.”

    막사 안에는 마광석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여왕의 나신이 망토 틈새로 슬그머니 비추었다. 하지만 주군의 살결에 신경을 쓰는 장군은 전무했다. 전투가 코앞에 들이닥쳤음을 브르타뉴의 장수들은 직감하고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대들의 왕이 명령하나니, 이제 회의는 필요없다. 당장 부대를 출진시켜. 적군이 도하를 완료하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

    “예!”

    장군들이 일어서서 막사를 나섰다. 롱그위 성녀만이 여왕 곁에 남아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전하. 저들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망루를 세우거나 목책을 만든 건 전부 눈속임이었어. 부교와 뗏목을 만드는 걸 위장한 거지. 쯧, 설마 결전을 피할 줄이야.”

    시종들이 허겁지겁 갑옷을 가져와서 앙리에타에게 입혔다. 앙리에타는 시종일관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녀석들의 목적은 우리와 싸우는 게 아니야. 파리시오룸을 점령하는 거다. 회전을 벌일 것처럼 화려하게 치장해둔 것은 기만책이었고.”

    “파리시오룸을…….”

    롱그위 성녀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거기에 어떤 의미가?”

    “황태후를 풀어줘서 협력자로 만들 속셈이겠지. 파리시오룸에는 아직도 프랑크 애국전선의 잔당이 남아 있을 터. 그들이 협조해서 성문을 열어주기로 사전에 계획되었을 거야.”

    그제야 롱그위 성녀는 깨달았다.

    “전쟁이 아니라 정략으로 우리군을 위협하겠다는 것이군요!”

    “아아. 전쟁은 수단에 불과했어. 애당초 전투를 벌일 마음이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앙리에타가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역시 부사령관보다 단탈리안이 군대를 이끄는 모양이네. 딱 그 녀석이 떠올릴 법한 발상이야. 하지만, 우리의 정찰조를 너무 우습게 봤군.”

    여왕은 시종한테서 검을 건네받았다. 그녀가 칼자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도하가 완료되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놈들이 가장 허약한 순간이지.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적군부터 깨부숴주겠어. 롱그위, 출진이다.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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