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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85화 (285/510)
  • 00285 꼭두각시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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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력 1511년 6월 초순.

    여름의 바람을 가로지르며 아군은 프랑크 동북부에 성공적으로 집결했다.

    이 시기는 농작물을 수확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전쟁에 미친 영주도 요 무렵만큼은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자칫 여름철 농사를 단번에 망쳐버릴지도 모르니까. 영지민이 소집령에 격렬하게 반항하는 것도 이때였다.

    달리 말해――마왕군이 인간계를 침략하기에 더없이 적절했다.

    인간과 다르게 마물은 농삿일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전쟁의 시기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강력하게 제약을 받는 반면, 마왕군은 거의 완벽하게 자유로웠다.

    이 세계에 기사단이 고도로 발달된 까닭이 여기에도 있겠지. 농사와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든 마물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상비군을 많이 육성하면 농삿일에 쓰여야 할 인력이 줄어버린다. 즉, 정답은 소수정예의 상비군밖에 없다…….

    신기한 일이다.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세계는 여기까지 달라진다.

    전국 곳곳에 기사 아카데미가 설립된 것은 필연적이다. 마왕군이 어느 방향에서 침략해도 재빠르게 출동시킬 수 있도록 반드시 기병 전력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뭐, 거점마다 강력한 요새들을 두어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까.

    기사단에 주력할 것인가. 아니면 요새에 주력할 것인가…….

    각각 장단점이 있으리라. 인간의 국가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을 적절하게 뒤섞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반면, 브르타뉴 왕국은 극단적으로 기사단을 육성해왔다.

    심지어 브르타뉴의 왕도(王都)에는 성벽이 없다. 오백 년 전쯤에 파괴되었는데, 마물에 의해 부서진 것이 아니라 희한하게도 브르타뉴인들 스스로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유가 가관이다.

    “성벽 따위는 겁쟁이나 써먹는 물건이다.”

    “시민들은 성벽에 기대어 농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단련하기를 게을리 할 것이고, 야전(野戰)에서도 필사적으로 싸우지 아니하고 여차하면 도망쳐버릴 것이다.”

    “고로 성벽은 인민 전체를 유약해빠진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지름길이다.”

    경악스러울 만치 단순하고 무식한 논변이 아닐 수 없다.

    더 놀라운 사실은 브르타뉴인들이 이러한 주장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시민들이 직접 곡괭이를 들고 성벽을 두들겨 부숴버렸으며, 그렇게 대량으로 나온 석재는 아카데미를 하나 더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정도면 일종의 정신병이라 보아도 좋지 않을까? 뇌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진 전투종족 같으니라고.

    “이처럼 브르타뉴는 광적으로 야전을 선호합니다.”

    라우라가 말했다. 그녀는 선봉대와 본대가 합류하자마자 작전회의를 열었다.

    넓은 막사에는 호화롭게 군장을 차려입은 마왕들이 앉아 있었다. 라우라는 차분하게 마왕 한명한명과 시선을 마주치며 작전을 설명했다.

    “브르타뉴군은 정신적으로나 체질적으로나 오직 야전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거쳐온 프랑크 동북부에는 거대한 요새가 세 개 있었지만, 브르타뉴군은 그곳들을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아예 방기했지요.”

    아마 프랑크인으로 이루어진 선봉대에도 야전을 명령했겠지. 보통 인간군이 몬스터와 들판에서 싸우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확실히 비정상적이었다.

    “얼핏 보면 무식하고 소모적으로 보입니다만……그 내실까지 따져보면 브르타뉴군은 기동전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굳이 명명하자면 기동방어라고 할까요.”

    “……기동방어? 처음 듣는 용어인데.”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바르바토스는 참고로 여름에 무진장 약했다. 여름이라고 해도 아직 그리 덥지 않건만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가슴골이 젖어 있는 게 묘하게 에로해서 곤란했다. 음, 결정했다. 오늘밤은 바르바토스랑 하자.

    “…….”

    꼭두각시 황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가 큼직한 부채를 들고 있었다. 바르바토스한테 공손히 바람을 부치는 것이었다. 총사령관이 일개 지휘관한테 부채를 흔들다니, 하여간 죽어서도 꼴불견인 녀석이었다.

    “기동전이면 기동전이고 방어전이면 방어전이지 기동방어가 뭐야?”

    “보통 방어전의 목적은 '적군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요새를 중심으로 농성전을 펼치는 것이 이러한 방어전에 해당합니다. 이 경우, 공성측과 농성측은 서로가 서로의 전력을 서서히 소모해가며 결판이 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라우라가 담담하지만 어딘가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병사들의 사기, 비축해둔 식량. 적군과 아군 중에 어느 쪽이 먼저 소모되느냐에 따라 승자가 결정되지요. 극단적으로 말해 방어전에선 전력이 소모될지언정, 병력적인 피해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새 공략전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요새에는 일만이 넘는 병력이 있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죽어나간 병사는 겨우 수백 명. 그걸로 전투가 결정되었다. 나머지는 그저 적군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일에 불과했다.

    “반면에 기동전은 적군의 섬멸을 의도합니다. 정예병을 한곳에 집중시켜 대회전을 벌이고, 단번에 전쟁의 결판을 지으려 하지요. 브르타뉴군은 단 한번의 결전에 집착합니다.”

    이건 생드니 평원 전투가 대표적인 사례이겠지. 내가 패배를 장식한 전투였다.

    “그렇기에 브르타뉴군은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회전을 벌이는 것에 극도로 신경을 쏟아부을 것입니다.”

    “흐응.”

    “여기에 맞서 우리군의 전략이 수립됩니다.”

    라우라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시다시피 파리시오룸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났습니다. 파리시오룸의 민심은 더없이 흉흉해졌겠지요. 앙리에타 여왕 입장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앙리에타 여왕은 군사를 멀리까지 끌고 나가지 않겠지요. 즉.”

    파리시오룸 근교.

    기사단이 충분히 활약할 수 있도록 적당하게 넓고 평평한 지대.

    “반드시 이와 같은 조건을 만족하는 전장을 고를 것입니다. 브르타뉴군이 보기에 요새는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전장입니다. 요새는 주로 언덕에, 좁은 길목에 건설되니 말입니다.”

    라우라가 지휘봉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우리군은 철저히 브르타뉴의 전략을 이용해줍니다.”

    *  *  *

    “우리군은 마르네 강을 배후에 두고 진영을 차린다.”

    앙리에타 여왕이 말했다.

    마르네는 파리시오룸 바로 동쪽에 흐르는 강이었다. 장수들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여왕에게 반문했다.

    “전하. 마르네 강은 지나치게 파리시오룸에 가깝나이다. 적들이 내륙을 휘저을 터인데, 조금이라도 멀리 진출하여 응전하는 것이 옳지 않을련지요?”

    “안 돼. 우리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숙청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작자들이 꽤나 있을 거야.”

    앙리에타 여왕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처형한 탓에 파리시오룸의 인심이 좋지 않아. 이럴 때 쥐새끼들이 선동하면 십중팔구 반란이 일어나겠지. 우리가 파리시오룸에서 멀어질수록 반란의 가능성도 덩달아 높아지고.”

    “과연. 옳으신 말씀입니다.”

    장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허나 강을 배후에 두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병법의 도리에 어긋나옵니다만…….”

    “적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야.”

    앙리에타 여왕이 미소를 지었다.

    “적군이 보기에 우리는 퇴로가 막혀 있겠지. 별다른 공을 들이지 않고도 우리를 구석에 몰아세웠다고 생각할 터. 공성전을 피하고 야전을 선호하는 마왕군의 특성을 생각할 때, 놈들은 틀림없이 전투를 개시할 거야.”

    마왕군의 침략에 맞서 인류는 전통적으로 농성전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상식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그 지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우리가 파리시오룸에 틀어박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제군들. 우리는 단 한 번의 결전으로 마왕군을 끝장낸다.”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브르타뉴군에는 마왕 아가레스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그 마왕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으며, 바르바토스를 죽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자신과 협력하겠노라고 수차례 언급했다.

    어려운 전투가 되리라. 하지만 결과가 보장되지 않았다고 해서 앙리에타는 전투를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이 브르타뉴군의 자신감이었다.

    *  *  *

    라우라가 자신만만하게 예상한 대로 브르타뉴군은 우리를 맞이하러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꽤나 자유롭게 프랑크의 내륙을 횡단했다.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마르네 강줄기까지 진출했는데,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편안했다. 하지만 이것이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평원 저 너머를 노려보았다.

    “야아, 새끼들 봐라? 배수진을 차리고 있네.”

    강줄기를 배후에 두고 브르타뉴군은 기세등등하게 진영을 세워두고 있었다.

    바르바토스를 비롯하여 우리군 간부들은 군마에 올라탄 채로 적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병력은 대략 삼만에서 사만 명에 이를까. 우리군에 비해 병력은 한참 뒤떨어졌지만, 문제는 역시나 기사단이었다.

    스무 개에 가까운 기사단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아마 나라에 있는 기사단이란 기사단은 몽땅 끌고온 것 같았다. 마왕군 입장에서 이보다 더 혐오스러운 광경이 없겠지. 1차 세계 대전에서 끝없이 참호가 펼쳐진 적진을 바라보는 보병과 같은 심정이라고 할까.

    바르바토스가 낄낄 웃었다.

    “저거 저거, 여기서 죽자 살자 싸우겠다는 거 아니야. 앙리에타인지 뭔지 취향이 나랑 맞는데. 야, 제파르. 봐라. 녹색 장미 기사단이다. 반가울 텐데 손이라도 흔들어줘.”

    “……너무하십니다, 바르바토스 각하.”

    제파르 대장이 보기 드물게도 앓는 소리를 냈다.

    기사단 돌격에 맞서서 오우거 일제 돌격으로 응수한 희대의 전술가가 바로 제파르 대장이었고, 그때 오우거를 무참하게 발라버린 장본인이 녹색 장미 기사단이었다. 트라우마의 원흉과 마주친 탓인지 아까 전부터 제파르 대장은 안색이 싹 굳었다.

    라우라가 차분하게 말했다.

    “후퇴할 곳을 없애두었으니 병사 전원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입니다. 저곳에 쳐들어가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우선 시기를 가늠해보지요.”

    우리는 적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군영을 차렸다.

    이때 라우라는 우리가 마치 결전을 치룰 것처럼 보이게 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했다. 당장이라도 저곳으로 돌격할 것처럼 오우거 부대를 전면에 내세웠다. 마왕들의 깃발도 보란 듯이 화려하게 펄럭였다.

    그러나 사흘, 일주일, 보름이 흘러도 전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저쪽에서 안달이 났는지 편지를 보내왔다. 앙리에타 여왕이 직접 쓴 편지였는데,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에 대한 조롱과 마왕들에 대한 비웃음이 적혀 있었다. 요는 이대로 전쟁을 끌어봤자 쌍방에 좋을 것이 없으니 한판에 승부를 보자는 것이었다.

    라우라는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

    “아군은 전쟁하는 방법을 귀하한테 가르침 받을 생각이 없다. 댁의 군사나 잘 챙겨라.”

    지독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양군은 자기 진영에 목책을 정교하게 깔아두고 서로가 먼저 공격해오기를 기다렸다. 브르타뉴군은 때때로 궁기병을 이끌고 우리군에 쳐들어왔는데, 내가 똑같은 수법에 당할 리가 없었다. 이걸 위해서 투창용 창을 어마어마하게 가져왔다. 우리는 간단하게 오크의 투창으로 대응했다.

    이쪽이 철저히 방비했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브르타뉴군도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쳐오지 않았다. 정찰과 다름없는 소규모 접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아니, 언제까지 꼼짝없이 대치만 할 거요, 부사령관 아가씨?”

    “라우라아. 딱 한 번만, 응? 딱 한 번만 돌격하게 허락해주라.”

    답답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벨레드 형님이나 시트리는 계속해서 제발 좀 돌격하자고 응석을 부렸다. 호전적인 마왕들도 서서히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라우라는 알듯 모를듯 미소를 지으며 즉답했다.

    “안 됩니다.”

    벨레드 형님과 시트리는 울상을 지으며 제각기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을 쳐다보았지만…….

    “우리 라우라 말대로 해.”

    “미안하지만 부사령관의 지시에 따라주세요, 시트리.”

    지휘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군단장들이 동조해줄 리가 만무했다. 결국 호전적인 마왕들은 불안을 마음속에 파묻고 속절없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보름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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