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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83화 (283/510)
  • 00283 대연정  =========================================================================

    *  *  *

    “초전에서 패배했다고 하는군요.”

    “프랑크 놈들, 조금이나마 기개를 보여줄까 싶었거늘…….”

    전령의 보고를 받아들고 브르타뉴군 간부들이 혀를 찼다. 보통 패배가 아니라 대패였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그나마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일까. 병력 자체는 6할 가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사령관 가스파르 드 타바느 원수가 패사(敗死)해버렸다. 말도 되지 않는다, 라는 불평불만이 공공연하게 터져나왔다.

    “이래서야 전군의 사기만 떨어질 판국입니다.”

    “드 타바느 원수께선 조금 더 분발해주리라 믿었습니다만, 그만 연세를 잊어버리신 것 같군요. 기병대를 이끌고 선두에서 돌격이라니요?”

    브르타뉴의 장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원수가 근위기사단에서 활약한 지 십 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프랑크의 호랑이는 옛날에 이빨이 빠졌어요. 그런데도 나이를 잊고 무책임하게 전군을 돌격시키다니…….”

    “글쎄. 뒤를 받쳐주지 못한 프랑크 기사단의 과오겠지요.”

    다른 장수가 비웃었다.

    “아마도 원수께선 프랑크 기병대가 우리 브르타뉴군의 수준이라고 내심 착각하신 것 아닐련지. 기병이라고 다 같은 기병이 아닙니다. 요컨대 아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착각해서야 될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막사에 모인 제장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그들은 프랑크인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프랑크인, 특히 귀족은 고루한 명예와 관습에 얽매여 있었다. 고상한 척 턱끝을 올리는 일에는 능숙했으나 전쟁터에서는 도통 힘을 쓰지 못했다.

    귀족적인 돌격, 명예, 충성. 전부 좋았다. 정작 힘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러나 무슨 소용이겠는가.

    “소신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실력이 없는 인간들이 부르짖는 명예만큼 위선적인 것도 없소. 그리고 위선에 희생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백성이지.”

    “백성이 미천하면 자기네가 희생되는 줄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는지도 모르는 게 백성입니다.”

    장수들이 반쯤은 비웃음을, 반쯤은 착잡함을 담아 두런두런 얘기했다. 브르타뉴의 귀족 가문에서는 장자계승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들딸들이 후계직을 차지하기 위하여 처절하리 만치 싸우는 것이 브르타뉴의 전통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전원, 어릴 적에 형제자매를 짓밟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다른 국가들은 이러한 전통을 가리켜서 야만적이라고 깔보았다.

    하지만 그 야만적인 나라가 고상한 프랑크를 점령했다. 덕분에 프랑크는 내전에 휩싸였고, 백성들이 고스란히 전화를 뒤집어썼다.

    브르타뉴의 귀족들은 비웃었다. 어디에 명예가 있는가? 어느 쪽이 더 명예로운가. 명예란 어디 허공에 떠다니는 가치가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승리하는 이에게만 주어졌다…….

    “다들 그만하라.”

    앙리에타 여왕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가스파르 드 타바느 경은 진정한 전사였어. 그는 충성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황제에게 충성할 것인가, 국가에 충성할 것인가, 백성에 충성할 것인가.”

    여왕은 어딘지 머나먼 곳을 바라보는 듯, 약간은 졸음에 겨운 듯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전사란 무엇인가? 고뇌하는 자이다. 그가 어떤 해답에 이르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고뇌를 모욕할 권리 또한 우리에게는 없겠지. 전원, 경의를 표하자.”

    “…….”

    앙리에타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귀족들이 여왕을 뒤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막사가 조용해졌다.

    그때 여왕 옆에 서 있던 사제가 입술을 열었다. 주홍빛 단발이 아름다운 롱그위 성녀였다. 아테네 여신의 성녀인 롱그위는 천천히 묵념의 노래를 불렀다.

    “많은 것을 죽였고, 많은 것을 살렸으며, 많은 것을 후회했고, 많은 것을 행했도다. 아아――가스파르 드 타바느. 이제 그곳에서 잠들라.”

    “아테네 여신이시여. 전사에게 위안을.”

    귀족들이 일제히 아테네 여신을 부르며 묵념했다.

    앙리에타 여왕이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는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 선봉전은 프랑크 귀족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어. 그들이 승리하고자 했다면 큰 피해를 입었겠지. 반대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후퇴했다면 내가 몸소 그들을 숙청할 계획이었다. 드 타바느 원수는 이것을 알아차렸겠지.”

    “……과연, 의도된 패배였습니까.”

    “아아. 패배하되 변명하지 않는다. 그런 절묘한 결과를 위해서 원수는 희생한 것이야.”

    앙리에타의 목소리에 서릿발이 섰다.

    “친애하는 제장들! 아직 프랑크는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에게 굴복했지만 여전히 그네들 나름대로 명예를 지키고 있어. 방심은 절대로 금물이다.”

    장수들은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들이 서로 눈빛을 마주치며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저희는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브르타뉴의 귀족들은 '방심은 금물'이라는 전형적인 격언에 만족하지 않았다. 천성이 실리를 추구하도록 타고났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도 마찬가지였다. 여왕이 방심하지 말라고 명령한다면――그건 단지 마음을 다잡으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어서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기약이 없는데도 희망을 바라보는 인간은 없다. 프랑크의 귀족들이 아직까지 긍지를 버리지 않은 까닭은 어딘가에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야. 무엇이 그들의 희망일까?”

    “으음. 설마 황제는 아니겠지요. 그놈이 전무후무한 병신새끼라는 사실은 돼지들도 알고 있습니다.”

    장수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여보게,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 그 무슨 망발인가? 그래 봬도 우리 여왕 전하와 장래를 약속하신 사이일세.”

    “어이쿠. 이거 실례했습니다. 소신이 감히 여왕 전하의 기둥서방을 몰라 보고!”

    장군들의 너스레에 앙리에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 숙청을 당해야 할 게 한두 놈이 아니야. 물론 황제는 프랑크의 희망과 거리가 멀지. 그런데도 프랑크 귀족들이 여전히 희망을 품는다면 그 이유는 뭐겠어?”

    “……새로운 황제를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전하.”

    계엄령이라도 내려진 것처럼 막사의 공기가 싸늘했다.

    브르타뉴가 지난 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온 비밀스러운 정책이 하나 있었다. <백합 뜯기>라고 명명된 정책은 바로 프랑크 황가의 핏줄을 뿌리부터 뽑아내는 데 전력했다.

    황태후는 네 명의 왕자와 세 명의 공주를 낳았다. 다산이 덕목인 시대였다. 일찍이 한 나라의 황비였던 여인으로서 카트린은 훌륭하게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황태후는 불행했다. 네 명의 왕자 중에 한 명은 어려서 병으로 죽었다. 세 명의 왕자는 차례대로 황제에 즉위했으나, 두 명이 요절했고, 남은 한 명이 현재 황제로서 남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자식이 없었다.

    두 명의 딸은 각각 카스티야 왕국의 왕세자와 합스부르크의 제2황자에게 시집을 갔다. 합스부르크의 제2황자는 엘리자베트 통령에 의해 몰살당했다. 즉, 현재 황가의 핏줄을 이은 자식은 아들 한 명과 딸 한 명뿐이었으며…… 이는 '차기 황제'를 이을 직속 후계자가 전무하다는 것을 뜻했다.

    “이미 사생아 다섯 명을 주살했습니다. 아직도 혈족이 남았다는 말씀입니까?”

    직속 혈족도, 방계 혈족도 싸그리 사라졌다면 남은 것은 사생아뿐.

    브르타뉴는 사고를 위장하여서 다섯 명의 사생아를 죽였다. 프랑크 귀족들이 사생아를 황제로 옹립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네들에게 알리지 않았지만 아직 사생아가 딱 한 명 남아 있어. 전대 황제인 샤를 9세가 남긴 핏덩어리이지.”

    제장들이 놀랐다.

    “허허. 어찌하여 지금까지 살려두셨습니까?”

    “혹시 프랑크 귀족들이 꽁꽁 숨겨둔 것입니까?”

    질문을 받고 앙리에타 여왕이 씨익 웃었다.

    “일부러 살려두었어.”

    “예?”

    “생각해봐. 만일 프랑크 귀족들이 아직까지 저항의 의지를 몰래 불태우고 있다면 언제 그걸 폭발시킬까. 보나마나 우리 브르타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야. 그런 기회가 다가올 때까지 참고 또 참을 속셈이겠지.”

    앙리에타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유쾌하게 말했다.

    “자아, 인류군으로 둔갑한 마왕군이 절찬리에 침략해오고 있다. 사방에 원군을 보내고 싶어도 합스부르크 동쪽은 멀고 또 머니 애시당초 기대를 접어야 할 판이라. 그렇다면 바다 건너 버니시아 놈이나, 윗동네 바타비아 년이나, 아랫동네 카스티야 놈이나 저기 먼 이웃인 사르네냐 년한테 손을 빌려야 쓰겠는데…….”

    앙리에타 여왕이 손가락을 네 개 들어올렸다.

    “바타비아 년은 태생부터 공화주의에 썩어빠진지라 안 되겠고. 버니시아 섬놈들은 우리가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도 싫고, 공화주의도 딱히 싫지 않은지라, 역시나 안 되겠고. 사르데냐 촌년들은 우리가 황태후 감금한 것 때문에 외교부터 싹 끊어버렸고. 이제 어떡하나?”

    순식간에 여왕은 손가락 세 개를 접었다.

    “남은 건 카스티야 그 머저리 놈들뿐이라. 그런데 얘네 왕비가 황태후의 둘째 딸이잖아. 여차하면 프랑크의 황위가 자기네 물건이라고 소리 높여 주장할 거란 말이지. 이놈들한테 원병을 청했다가는 보나마나 황위 내놓으라고 교섭해올 텐데……그럼 우리가 피똥 싸면서 프랑크 먹으려고 한 게 전부 헛짓거리가 되어버리네? 결국.”

    마지막 검지가 굽혀졌다.

    “우리한테 원군을 보내줄 나라가 하나도 없어. 프랑크 귀족들도 이걸 빤히 알거라고. 이런 기회가 다시 찾아올까? 아마도 아니야. 이런 기회는 절대로 되풀이되지 않아. 제군들, 프랑크 귀족들은 반드시 봉기하려 들 거다.”

    “…….”

    “아마 우리군이 출진한 틈을 노려서 반란을 일으키겠지.”

    그렇기에 앙리에타 여왕은 프랑크군을 따로 묶어서 선봉대로 보내버렸다.

    반란분자를 사전에 쫓아내는 의미가 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지휘관들의 처자식을 수도에 감금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봐라.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얘네는 원수가 패사하긴 했어도 전력이 그리 많이 깎이지는 않았어. 수상한 냄새가 나지.”

    “……전하.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당장이라도 토벌하겠습니다.”

    앙리에타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 제군들, 프랑크 귀족들은 현재 왕당파와 공화파로 나뉘어 있어. 이들이 서로에게 양보해서 타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어. 바로 희망이 있기 때문이야.”

    왕정을 유지하는 대신, 명분이 약한 사생아 출신의 왕을 내세운다. 왕당파는 명분을 유지하고 공화파는 실리를 차지한다. 여기에 타협의 여지가 있음을 앙리에타 여왕은 간파하고 있었다.

    앙리에타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우리가 출진하기 직전……예컨대 하루 전에 마지막 남은 사생아가 돌연 죽어버리면 어떨까? 그래도 녀석들이 계속해서 협력할 수 있을까.”

    “……!”

    장군들이 깨달았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프랑크 귀족들은 혼란에 빠지겠군요, 전하!”

    “아아. 우리를 무찌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찌른 다음 어떤 형태의 정부를 꾸리느냐도 만만치 않게 중요해. 황위 후보가 사라져버린 이상 기존의 타협안은 완전히 공중분해 되어버리지.”

    장군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그들은 파악했다. 장군들이 앞다퉈서 말했다. 다들 목소리가 흥분에 달아올라 있었다.

    “십중팔구 프랑크 귀족들이 긴급하게 회의를 소집할 것입니다, 전하!”

    “회의에 참여하는 귀족들이 곧 우리 브르타뉴에 반항하는 세력이라 보아도 무방하군요.”

    “병력을 매복시켜두었다가 회의를 급습하면……프랑크에 마지막으로 남은 저항세력을 단 한방에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앙리에타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군들, 절체절명의 시기가 바로 절호의 기회이다. 겁쟁이 같은 프랑크인들은 그걸 모르지.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어. 놈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앙리에타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어 손가락으로 묘기를 부리더니, 단박에 내리쳤다. 타악, 하고 단검이 탁자에 허리까지 박혔다.

    “이제부터 프랑크의 긍지를 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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