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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81화 (281/510)
  • 00281 대연정  =========================================================================

    그러나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정말로 바빴다.

    우리군은 포로를 꽤나 많이 붙잡았다. 여기에 철저한 심문이 이루어져야 했다.

    때로는 한번의 승리보다 하나의 정보가 더 중요하다. 앙리에타가 언제쯤 본대를 이끌고 출진하느냐만 알아도 우리는 전략의 폭이 훨씬 넓어진다. 포로에 대한 고문은 필수적이겠지. 인권? 인간에게 권리가 있다면 오로지 죽을 권리뿐이다.

    “크아아아악!”

    일반병을 고문해봤자 아무런 정보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지휘관급 포로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대다수가 귀족이었다.

    “저는 당신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들고 방긋거렸다.

    “단지 프랑크의 황궁에서 정세가 어찌 돌아가는지만 알고 싶습니다. 황태후 폐하는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 황제 폐하는 병세가 얼마나 위독하신지. 간단한 질문이지 않습니까?”

    “끄으윽……아……악마 자식.”

    귀족 포로는 개거품을 물면서도 끝끝내 정보를 토해내지 않았다.

    대단했다. 가히 초인적인 인내심이었다. 만약 내가 쇠꼬챙이에 고문을 당하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정보를 지껄여댈 자신이 있었다.

    “좋습니다. 당신의 인내심에 경의를 보냅니다. 제 경의를 표현하자는 의미에서 색다른 선물을 선사하겠습니다. 부디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날 밤. 풀코스 고문이 호화롭게 이루어졌다.

    포로에게 미약을 한도치까지 먹인 후, 오크들을 불러다가 강간시켰다. 정보를 불지 않을 때마다 눈앞에 무고한 일반병을 데려와서 즉결처형했다. 지나친 고통에 정신을 잃으면 서큐버스를 동원하여 꿈속에서도 고문했다.

    결과는 간단명료했다.

    “……황태후 폐하는 삼 년 동안……별궁에 유폐되어 한 발자국도…….”

    “황제 폐하께서는 며칠 전부터 위독하시어…….”

    “제, 제발. 뭐든지 말할 테니 용서해주시오!”

    여섯 명의 귀족 포로가 전원 정보를 토해낼 때까지 두 시간밖에 안 걸렸다.

    나는 각자의 정보를 교차로 검증했다. 여섯 명에게 똑같이 질문하고 그들이 내놓은 대답을 비교해보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반드시 밟아야 할 절차였다. 그리고 모두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야아, 만족스러웠다. 덕분에 상당히 많은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어차피 정보를 뱉을 거면 왜 반항했을까? 처음부터 협조적으로 나왔으면 편했을 것을. 저쪽은 고문을 받지 않아서 좋고, 이쪽은 고문을 하느라 괜히 시간낭비하지 않아서 좋다. 어딜 봐도 윈-윈이다. 인간이란 참 이상해.

    “단탈리안 전하.”

    한참 고문에 몰두하고 있자니 전령이 들어왔다. 엘프였다. 후각이 뛰어난 엘프는 고문실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피 냄새와 약물 냄새, 오크의 분비물 냄새로 가득했으니까.

    내가 꼬챙이를 내려두었다.

    “무슨 일인가?”

    “실례했습니다. 보초병이 수상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오늘 결투를 벌인 인간 소녀를 꼭 만나고 싶다며 제 발로 항복해왔습니다. 정중하게 포로로 대접해주길 바라더군요.”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데이지를 아는 사람이라니? 그런 인간이 있을 리 없다. 데이지는 평생 산골 화전촌에서 살았다.

    헛소리라고 일축하려는 그때였다. 전령이 투항자의 이름을 밝히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인간은 자기 자신을 베르시 준남작이라 소개했습니다.”

    *  *  *

    “준남작 님! 이게 대체 얼마만입니까!”

    베르시 준남작은 사지가 결박된 채 막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자세는 비굴했지만 얼굴에는 당당함이 말없이 흘렀다. 온갖 풍파를 겪어내고 단단하게 땅에 자리박은 거목과 같은 인상이었다.

    내가 막사에 들어오자 베르시 준남작이 놀랐다.

    “쟝 볼레? 혹시 쟝 볼레 사제인가?”

    “세상에 쟝 볼레가 두 명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예. 물론입니다.”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랬다. 나는 쟝 볼레 전용의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베르시 준남작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만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만, 정말로 사제가 있을 줄은…….”

    “저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곳에서 재회하다니요. 자아,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나는 단칼을 꺼내어 준남작의 신체를 묶은 밧줄을 조심스레 잘랐다. 곧이어 준남작은 사지가 자유로워졌다.

    “……고맙다. 허나 아무리 우리가 구면이라 해도 이리 쉽게 풀어주어도 되겠는가?”

    “저는 베르시 준남작을 믿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사 년 전에 뵌 준남작께선 틀림없이 어질고 현명하신 영주였습니다. 만약 준남작께서 사 년의 세월을 미처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시다면 제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 되겠지요. 어떻습니까? 베르시 준남작께서는 약자이신지요?”

    “쟝 볼레 사제에게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군.”

    베르시 준남작이 쓰게 웃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우리는 두 팔을 벌려 서로를 포옹했다. 두텁고 우악스러운 손길이 등에서 느껴졌다. 더불어서 띠링, 하고 효과음이 들려왔다.

    「베르시 남작의 호감도가 7 올랐습니다.」

    준남작이 포옹을 풀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지 씁쓸해보였다.

    “쟝 볼레 사제. 궁금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쩌다 마왕군……아니.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의 군대에 종사하고 있는가?”

    “저 역시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베르시의 친절한 주민 여러분들은 평안하게 잘 지내고 계신지. 한두 시간으로는 회포가 풀리지 않겠지요.”

    우리는 탁자에 마주보고 앉았다. 나는 포도주를 꺼내와서 대접했다. 몇 번의 안부인사와 건배가 오간 다음, 우리는 본격적으로 대화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비밀을 감추어봤자 쇼용없겠지요. 준남작 각하. 사실 저는 바타비아 공화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과연. 역시 그랬는가.”

    베르시 준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알고 계셨습니까?”

    “전혀 몰랐다. 하지만 사제가 떠난 이후에도 나는 사제의 행보를 간간이 소문으로 들었다. 프랑크 북부의 귀족을 규합하고 브르타뉴에 대항하여 바타비아를 이끌어들인 것, 평범한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베르시 준남작이 와인잔을 매만졌다.

    “쟝 볼레 사제, 자네가 주역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네에게는 능히 북부 일대를 요동시킬 실력이 있다. 자네가 베르시를 떠나면서 나에게 한 말을 혹시 기억하는가?”

    “물론입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각하께서 신을 믿지 아니하신다면 계급 역시 믿지 않아야 하니,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신이 계급을 정해놓았노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다. 자네는 아는지 모르겠군. 자네의 일행이 떠난 이후 프랑크의 정세를 살펴보면서 본인이 얼마나 고민에 빠졌는지…….”

    빙고.

    나는 마음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베르시 준남작은, 말하자면 내가 사 년 전 내전에서 씨앗을 뿌려둔 사람 중 하나였다. 씨앗의 이름은 공화주의. 세상이 혼탁해지면 혼탁해질수록 그 검푸른 안개를 비료로 삼아 자라났다.

    베르시 준남작은 유능한 영주였다. 영지민을 수호하는 것을 일생의 긍지로 여겼겠지. 그런 인물이 프랑크의 황제를 보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거리낌없이 외세를 끌어들이고, 심지어 어머니를 유폐시키는 패륜까지 저질렀다. 그런 인간에게 충성을 맹세해도 괜찮겠는가. 황제라는 존재에게 이 나라의 운명을, 국민의 안위를 맡겨놓아도 좋겠는가…….

    내가 심어둔 싹은 성공적으로 꽃을 피운 모양이다.

    당장 기쁨에 겨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기서 곧바로 치고 들어가면 너무 속이 드러났다. 잠깐만 주제를 바꿔볼까.

    “실례되지 않는다면,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황제가 소집령을 걸었다네. 프랑크 동부의 영주들은 모두 군대를 차출해야 했지. 참고로 본인은 삼 년 전에 남작으로 승작했네. 덕분에 꽤 많은 영지민을 전쟁터로 끌고올 수 있었지…….”

    베르시 준남작이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아마도 그에게 승작은 별로 명예스러운 일이 아니었겠지. 황제가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황태후는 유폐된 상태에서 승작이 이루어졌다. 즉, 브르타뉴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얘기였다.

    “중립의 대가입니까……각하께서 상심하실 만하군요.”

    지난 내전에서 북부 일대의 귀족들 대부분이 반란에 동참했다. 베르시 준남작은 동북부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전이 끝날 때까지 굳건하게 중립을 지켰다.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그게 도리어 평가를 받은 것이었다.

    베르시 준남작이 자조했다.

    “동포들이 국가를 위해 쓰러져가는 와중에, 나는 영지민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꼼짝하지 않았다.”

    “영주로서 당연한 선택입니다.”

    “아니, 어리석었다. 설마 브르타뉴의 여왕이 이 지경까지 커질 줄 몰랐지. 내가 보지 못한 미래를 동포들은 보았던 것이야……나는 어리석게도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뿐일세.”

    우리는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유리잔이 찌르르 울렸다.

    “데이지라고 했던가. 그 아이가 결투에 나서는 걸 보고 놀랐지. 어쩌면 자네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네. 자네는 결코 양녀를 내버려둘 위인이 아니니까. 패잔병 행렬에서 적당히 빠져나왔네.”

    “…….”

    내가 포도주를 머금고 베르시 준남작의 두 눈동자를 찬찬히 살폈다.

    “각하. 연기는 여기까지 하지요.”

    “……연기라니?”

    “각하께선 제가 양녀를 내버려둘 리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저는 똑같은 말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각하께선 영지민을 이끌고 참전하셨을 터. 만약 각하께서 탈영하신 게 알려지면 영지민들은 절대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대장이 탈영한 것이다. 영지민들은 말도 안 되는 대우를 받게 된다.

    “저로서는 베르시 각하께서 영지민을 버리고 단지 저를 만나기 위해 탈영하셨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귀족의 의무를 무엇보다도 신성하게 받들어 모시는, 영지귀족의 귀감입니다.”

    “…….”

    “아마도 각하께선 다른 지휘관들을 설득하셨겠지요. 어쩌면 제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며, 자신이라면 나와 교섭할 자신이 있다고 강변하셨을 겁니다. 그 강변에 지휘관들은 일시적인 탈영을 용납했겠지요.”

    저들은 브르타뉴군이 아니라 프랑크군이다.

    브르타뉴의 여왕을 위해서 싸우는 현재 상황이 납득하기 어려우리라. 만약 우리가 단순히 마왕군이라면, 비록 브르타뉴의 여왕을 위한 셈이 되긴 해도 '인류 전체를 위하여'라는 명목 아래 싸우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어제 전투로 인하여 우리가 인류군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무게가 실렸다. 프랑크의 장수들은 고민했을 거다. 이대로 계속해서 싸우면 브르타뉴의 여왕을 위해서 동족과 싸우는 게 되어버린다.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 상황에서 베르시 준남작이 특사를 자처했다. 베르시 준남작의 평소 행실로 미루어보건대 동료들한테도 신뢰가 두터웠겠지. 동료들은 그를 믿고 이곳에 보냈다…….

    “요컨대, 각하께서는 투항병이 아니라 프랑크군의 특별사절입니다. 틀립니까?”

    “……정말로 쟝 볼레 사제에게는 당하지 못하겠군.”

    베르시 준남작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가 와인잔을 내려놓고 불쑥 내 두 손을 잡았다. 베르시 준남작의 눈동자는 차갑지만 강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프랑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네. 이대로 가다가는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겠지. 단지 그것뿐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프랑크의 등을 배웅해주겠네. 허나, 역사는 항상 백성의 피를 요구해.”

    “…….”

    “쟝 볼레 사제. 우리와 협력해주게. 브르타뉴의 미치광이 여왕을 몰아내고, 프랑크를 프랑크의 백성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그것은 내가 실로 간절히 바라던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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