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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80화 (280/510)

00280 대연정  =========================================================================

“무엇들 하느냐! 사악한 마물은 당장 뛰쳐나와 본인의 검을 받으라!”

기사가 군마에 올라탄 채로 고레고레 소리 질렀다. 나이도 아주 젊어보였다. 겨우 열일곱 살은 되었을까.

일기토에 나서는 사람은 십중팔구 죽을뿐더러, 자그마치 사천의 적병을 눈앞에 두고 고함치는 것 자체가 무지막지한 담력을 요구했다. 틀림없이 용감무쌍한 청년이겠지.

“어리석군.”

바싸고가 비웃었다.

“가문의 이름을 대지 않는 걸 보아하니 기껏해야 제2급 무사. 그런 실력으로 우리 마왕군에 맞서려는 것인가. 당장 정령왕을 소환하여 격의 차이를 보여주지.”

“잠시만요. 바싸고 전하. 기다려주십시오.”

바싸고가 눈썹을 찡그렸다. 성격 급하게도 바싸고는 벌써 푸른 마력을 온몸에서 피어내고 있었다.

“군은 내가 지휘한다고 미리 말했을 텐데.”

“아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규모가 저만한 군대입니다. 검주(劍主)가 한 명쯤은 있겠지요. 그런데도 필승의 한수를 꺼내들지 않았다.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다고 봐야지 않겠습니까?”

“…….”

푸른 마력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의도라니. 인간들이 일부러 패배하기라도 바란다는 말이냐.”

“바로 그겁니다! 인간은 의도적으로 패배하려는 것입니다.”

“하?”

바싸고가 고상하게 미간을 좁히고 쉰소리를 냈다. 표정이 하나하나 귀족적이었다.

“결투에서 패배해본들 병졸의 사기가 떨어질 뿐. 패배를 자초할 이유가 없다, 라고 전하께선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

“하지만 정반대로 생각하십시오. 그런 손해를 감수할 만한 이익이 적군에 있습니다.”

바싸고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어릿광대 놈, 설명해봐라.”

“간단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지금 인류의 군대를 표방하고 있지요.”

민중은 소문에 민감했다. 바타비아와 자유도시들까지 대거 이쪽에 합류했다. 이러한 명분이 적군에게 설마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을까?

저들 입장에선 어쩌면 정말로 우리가 인류의 군대일지 모른다. 불안감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겠지.

“이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결투에서 냉큼 마족을 내보낸다고 해보십시오. 적들이 어찌 받아들이겠습니까? 아, 역시 인류군이 아니라 마왕군이었다. 쓰잘데기 없는 의심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일 게 분명합니다.”

내가 싱긋 웃었다.

“바싸고 전하. 저 기사는 희생양입니다.”

“…….”

“우리가 강한 마족을 보내어 기사를 죽인다면, 적들의 지휘관은 곧바로 소리치겠지요. 보아라! 저들은 마왕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여 분열했다. 우리가 동료를 희생시킨 것이다. 자아, 일어서라. 동료의 복수를 거행하자…….”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꽤나 흔했다. 화랑 관창이 대표적이었다. 지금 평야에 나온 기사 또한 어렸다. 희생양으로 써먹기에는 젊은이만한 게 없지.

“빤히 보이는 수단에 우리가 굳이 놀아줄 필요는 없겠지요.”

“……그래서. 마족을 내보내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이냐.”

바싸고가 침음을 삼키며 뇌까렸다.

“이대로 결투를 피할까? 아군의 사기가 엉망진창으로 떨어지겠군.”

“음. 우연찮게도 저에게 이럴 때를 대비한 패가 하나 있습니다.”

나는 손뼉을 가볍게 두들겼다.

“데이지.”

데이지가 우리 앞으로 걸어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새까만 머리칼의 소녀는 여느 때처럼 하녀복을 입었다. 시녀로서 나를 호종하고 있었다. 허리춤에 장검과 단검이 들린 것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멋들어진 하녀였다.

내가 이죽거렸다.

“네년은 뇌수가 구정물로 된 쓰레기이다. 도저히 구제할 도리가 없는 머저리에 병신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정도는 알고 있을 터.”

“예, 아버님.”

데이지가 고개를 숙인 채 담담하게 대꾸했다.

“돼지들이 우리에서 쫓겨났으나 제 처지를 망각하고 평원에서 한껏 꿀꿀거리고 있습니다. 본디 따뜻한 우리를 되찾으면 만족하는 동물들. 명분만 던져주면 얌전해지겠지요.”

“하하.”

웃음이 흘러나왔다. 데이지는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맞혔다, 암퇘지 년아. 저기서 꿀꿀거리는 동족들에게는 네년이 적당하다. 어디 한번 해보겠느냐?”

“성량을 확대해주는 마법 아티펙트가 필요합니다.”

나는 품속에서 목걸이 모양의 아티팩트를 꺼내어 던졌다. 풀썩, 하고 목걸이가 풀밭에 떨어졌다. 데이지가 공손하게 목걸이를 집어들려는 순간에 내가 말했다.

“입으로 주워라.”

“…….”

데이지는 멈칫했지만 곧 내 명령을 따라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녀가 이빨로 목걸이를 깨물었다. 바싸고와 마족 지휘관들이 보는 앞에서 개처럼 땅에 얼굴을 처박은 것이었다. 내가 만족스럽게 방긋 웃었다.

“건방진 노예년. 네년한테 어울리는 위치는 그곳이다.”

방금 데이지는 구태여 돼지라는 비유를 써먹었다. 약간이지만 잘난 척을 한 것이었다. 어디서 노예년이 함부로 나대는가. 나는 그 점을 지적했고, 내 의도를 알아들었는지 데이지는 잠자코 명령에 복종했다.

“출진해라.”

“예. 아버님.”

데이지가 목걸이를 들고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녀가 평야로 향하자 옆쪽에서 바싸고가 말했다.

“……의외로군. 네놈이 감정적이게 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양녀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러모로 사정이 있습니다. 유능하지만 자칫 주인의 손을 잡아뜯을 아이지요.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제 마음속으로 쳐들어와서 곤란합니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이란 간악해서 조금이라도 잘 대해주면 원한을 잊어버리지요. 관계를 투명하게 유지하려면 냉혹해져야 합니다.”

“흥. 쓰레기다운 의견이다.”

대화가 끊겼다. 우리는 말없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하녀복을 입은 소녀가 평야에 출현하자,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병사들이 크게 수군거렸다. 신성한 결투에 웬 어린애인가? 게다가 시녀복을 입고 있다니?

“……!”

프랑크인 기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데이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뭐라뭐라 소리쳤다. 아마 너와 같은 인간 꼬마와 대결할 생각이 없다, 그런 식이겠지. 반면에 데이지는 귀머거리라도 된 것처럼 묵묵하게 걸어갔다. 마침내 기사에게 다가섰다.

일격이었다.

장검을 빼들어서 올려치더니, 어느새 군마의 묵직한 목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사가 균형을 잃고 낙마했다. 데이지는 날렵하게 공중에 뛰어오르더니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떨어지는 기사의 겨드랑이에 정확히 칼끝을 쑤셔넣었다.

“…….”

“…….”

양군이 대치한 평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기사가 절명하기까지 삼 초가 걸렸다. 모가지가 잘린 말의 시체에서 피분수가 쏟아져 내렸다. 소녀는 빗물이라도 맞는 것마냥 태연하게 핏물을 뒤집어썼다. 관능마저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녀가 목걸이를 입가에 가져다대고 말했다.

“저는 라엘리아 출신의 프랑크인입니다.”

소녀의 목소리가 평야에 깔렸다. 북부 프랑크어 사투리가 흘러나왔다. 서북부 출신으로 이루어진 저들 적군에게는 친숙하기 그지없는 발음이었다.

“제 어미와 아비는 화전민이었습니다. 산속이 저희 마을의 집이었지요. 그러나 화전민에게 내려진 운명이 늘 그러하듯 고블린 무리의 습격을 받아 모두 죽었습니다.”

“…….”

“어머니가 내장을 흘리며 괴롭게 신음했을 때, 아무도 저희를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품안에 안고 머리가 잘렸을 때도……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데이지가 인간군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무언의 압력이 소녀한테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저는 어리석어서 무엇이 정의인지 감히 모릅니다. 하지만, 대륙 한가운데에 마왕이 또아리를 틀도록 허용한다면 저와 같은 일이 다시 한번, 아니 계속하여 끊임없이 반복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마물은 번성하고 인간은 신음 속에서 죽어나가겠지요. 그런 걸 용납하는 것이 정의일 리 없습니다. 예. 결코.”

“…….”

“동향인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여러분께서 대륙에 비극이 경작되는 것을 손놓고 바라보실 생각이라면. 그것이 소위 정의라고 불리운다면. 저는 거리낌없이 검을 휘두르겠습니다.”

데이지가 등을 돌려 장검을 내리찍었다. 핏물이 튀면서 기사의 목이 잘렸다. 데이지는 그 목을 집어들고 터벅터벅 이쪽으로 되돌아왔다.

평원에 선 전원, 적아를 가리지 않고 소녀에게 기세가 제압당하여 말문이 막혔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흐하하하! 저것 좀 보십시오, 바싸고 전하! 꼬맹이가 제법이지 않습니까! 최소한 저 정도는 되어야지 저의 양녀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그렇고말고요!”

당연하지만 그건 나였다.

내가 손뼉을 마구 치며 신나서 떠들었다.

“제국의 자랑스러운 기사가 일개 시녀한테 목이 잘리다니 치욕도 저만한 치욕이 없습니다. 당장 음유시인한테 의뢰해서 희극을 만들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니, 뭐하고 있습니까? 멋진 무대를 연출해준 우리의 인간 소녀한테 박수를 쳐주지 않고!”

“아, 예!”

마족 지휘관들이 퍼득 정신을 차렸다. 그들이 하나둘씩 갈채를 보냈다. 박수는 일반 병사들한테 급속도로 감염되어 이윽고 우리군의 사천 병력이 일제히 환호성까지 내질렀다.

이로써 적군은 사기가 말도 안 되게 떨어졌겠지.

한참 어린 소녀한테 결투에서 완패했다. 더군다나 그 소녀는 마족이 아니라 동족인 인간종이었다. 우리가 마왕군이 아니라 인류군임을 보증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존심과 명분, 프랑크군은 죄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안 됐군, 프랑크의 장군이여. 그대들은 희생양을 바침으로써 전군을 단합시키려고 했겠지만 이쪽엔 용사 후보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인간병기가 갖추어져 있다. 그런 잔꾀가 통하는 괴물이 아니다.

“아버님.”

데이지가 내 앞에 걸어와 부복했다. 그녀는 기사의 수급을 양손에 들어서 올려바쳤다.

“훌륭하다. 제법 멋지게 해내지 않았더냐.”

군마에서 내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데이지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내가 히죽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과연 쓰레기 새끼로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 아비와 어미의 이름까지 팔아먹다니 대단하다. 내가 네년을 지금까지 너무 얕보았어.”

“…….”

“예전에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면서 이제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가족을 팔아먹는 것인가. 멋지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 멋진 쓰레기이다, 데이지. 영지에 있는 네년의 애인도 틀림없이 기뻐할 거다.”

데이지가 고개를 들었다.

흑요석처럼 검은 눈동자에 증오와 치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영지에 있는 애인이란 다름 아니라 오라비인 루크를 가리켰다. 그녀의 감정에 만족하면서 내가 작게 웃었다.

“가족을 배신했고 인류까지 배신했다. 너에게 이제 돌아갈 곳이 있을까.”

“…….”

“수고했다. 막사에 가서 휴식하도록.”

데이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여린 입술에서 피가 터져서 흘렀다.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가 이빨 틈새로 새어나왔다.

“……예. 아버님.”

소녀는 뒤편의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마족 병사들이 그녀를 환호성으로 받아주었지만, 소녀는 무표정하게 제 길을 갈 따름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고개를 돌렸다.

“자아, 바싸고 님. 지금이 기회입니다! 적군은 사기가 대폭 떨어졌으며 전투 그 자체에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저런 군대를 농락하지 못한다면 이쪽의 체면이 농담거리로 전락하겠지요. 공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어째서인지 바싸고는 째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싸고가 한숨을 쉬듯이 중얼거렸다. 마음에 매듭을 지었다는 분위기였다.

“……그 애비에 그 딸이군. 하긴. 똥이 무서워서 피하겠는가. 더러우니 알아서 피해야 할 따름이다.”

“예?”

“아무것도 아니다.”

바싸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군. 공격하라.”

우리 선봉군은 그날 프랑크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적군은 삼천 병력에서 육백 가량이 전사했다. 전사자가 의외로 많지 않았는데, 저들이 잘 싸운 게 아니라 거의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패주해버린 탓이었다. 덕분에 아군은 전사자가 겨우 일백쯤에 불과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 완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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