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9 대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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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네놈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바싸고 전하를 꽤나 좋아한다고요.”
바싸고가 음식물 쓰레기라도 집어먹은 것처럼 질색했다. 이런, 아무리 내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다고 해도 저렇게 반응해서야 상처를 입는다. 조금 더 취급에 주의해주길 바랐다.
대륙력 1511년 여름. 황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는 대군을 일으켰다.
총병력이 물경 오만에 이르렀다. 그것도 인간과 마족이 어우러진 다종족 연합군이었다. 절대다수가 마족이긴 하나,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이 전부 인간종이라는 사실은 제법 파란을 일으켰다.
라우라는 부사령관에 오르자마자 선포했다.
“군법을 위반하는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엄벌에 처하겠노라.”
콧대 높기로 유명한 상급 마족들은 새로운 사령관을 우습게 여겼다. 인간의 명령, 게다가 어린 여자의 명령 따위 들을까보냐. 그런 분위기가 공공연하게 퍼졌다.
하지만 불과 열흘 만에 일곱 명의 사관이 처형당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 세계에서는 나밖에 모르지만 라우라는 철혈재상이라 불리는 여걸이다. 농담 삼아 말하자면, 게임에서는 적군과 싸우다가 죽은 병사보다 라우라의 손에 처형당한 병사가 더 많다.
“전쟁터에서 병사가 종족과 나이를 신경 쓰다니 훌륭한 배짱이다. 목이 잘리면 마족이든 인간이든, 어린애든 노인이든 떠들어재낄 수 없게 된다. 어디 모쪼록 그대들의 배짱만큼이나 목살이 튼튼하기를 기대하지.”
라우라가 손수 마족들의 목을 배면서 한 말이었다. 더불어서 라우라는 목이 베인 시체에서 살점을 발라내 두개골을 막사에 보관했다. 평소 습관대로 행동한 것이었는데, 몬스터 병사들은 퍽 다르게 받아들였다.
‘우리보다 더한 인간년이 있었다.’
‘바르바토스 전하가 지지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한다.’
‘그 잔인함에 나도 모르게 발기해버렸다. 헤헤.’
심각하게 정신이 나간 반응도 있었지만 무시했다. 오크들에게 윤간당하는 라우라라니, 결코 나도 발기되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결코.
군단장들이 묵묵하게 지지를 보내는 와중에 사관과 병사가 저항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뭐가 어떻든 간에 마왕군은 마왕을 정점으로 하여 철두철미하게 상명하복이 이루어졌다. 자상하기로 유명한 파이몬조차 군기에 관련해서는 용서와 자비가 없었다.
“전쟁이 벌어질 때 군인은 평등과 자유를 수호하는 자들이지, 만끽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언젠가 파이몬이 펼친 지론이다. 대충 이쪽 군대 분위기가 어떤지 알 만하겠지. 몬스터에게는 인권 그딴 게 없다…….
덕분에 라우라의 군권은 확립되었다.
오만 대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는 가운데, 그중 사천의 병력이 선봉군으로 뽑혔다. 선봉에는 전(前) 서열 제3위인 마왕 바싸고와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진군하며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었다.
바싸고가 끔찍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는 내 앞에서 좋아한다느니 뭐니 지껄이지 마라. 어릿광대 놈. 네 녀석만 보면 구역질이 치밀어오른다.”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흥, 네놈이 전투에 임하는 방법을 알기나 하느냐. 바르바토스의 등 뒤에 숨어서 비겁하게 계략이나 짜내며 소일거리하는 주제에.”
“하하.”
내가 볼을 긁적였다.
사실 이쪽 입장에서 바싸고는 대하기 편했다. 뱃속에 능구렁이를 오십 마리즘 키우는 보통 마왕들에 비해 바싸고는 솔직하다 못해 단순했다. 시트리가 순수하다는 의미에서 단순하다면, 바싸고는 소인배라는 의미에서 단순했다.
“이래 봬도 검은 산맥을 돌파하고 브란덴부르크를 점유하는 데 제법 공헌했습니다.”
“역시 착각하고 있군. 검은 산맥에선 제파르가 군을 지휘했고, 브란덴부르크에선 바르바토스가 군을 지휘하지 않았더냐.”
바싸고가 비웃었다.
“어느 쪽이든 네놈은 등 뒤에서 모략을 짰을 뿐이다. 전쟁에 사령관으로서 임하는 것과 참모로서 임하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어릿광대.”
“으음…….”
“네놈 같은 부류가 겨우 참모로 활약하면 군대도 잘 통솔할 거라고 착각하지. 그렇게 덜컥 대군을 맡았다가 패망하기 일쑤이다. 네놈이 패망할 날이 기다려지는군.”
죄송합니다. 이미 거하게 말아먹은 전적이 있습니다.
내가 싱글벙글 웃었다.
“이번에는 바싸고 전하께서 군을 지휘하시니 필히 승리하겠지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선봉장은 나다. 내 지휘에 참견하지 말도록.”
바싸고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병력을 이끌었다.
대체로 선봉군에게 주어지는 임무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본대보다 앞서 나아가서 지형과 수질을 확인한다.
말이 오만 병력이지 이들이 한꺼번에 잠자리를 펼쳐본다고 생각해봐라. 반드시 드넓은 평야가 필요하다. 적군이 기습해오더라도 사전에 일찍 파악할 수 있도록 시야가 넓어야 한다. 근처에 수질이 괜찮은 냇가나 호수도 필수적이다.
이렇게 여러 조건을 만족시키는 지형은 생각보다 드물다. 선봉대가 미리미리 정찰해서 본대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닦아두지 않으면 곤란하다.
두 번째, 적군의 준비태세를 시험한다.
이쪽이 선봉군을 보내면 당연히 저쪽에서도 선봉군을 출동시켜 대응한다. 이때 적군의 선봉대가 어느 정도 수준이느냐에 따라 대체로 국력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선봉대가 형편없으면 전쟁에 대한 준비가 거의 안 되어 있다는 소리다. 아마도 본국에서 서둘러 군사를 조직하는 동안, 시간벌기용으로 선봉대를 급조해서 보낸 것이겠지. 이럴 때는 본대에 소식을 알려서 최대한 속전속결을 꾀해야 마땅하다.
반면에 선봉대가 훌륭하다면……적국이 전쟁에 항시 대비하고 있다는 뜻.
선봉대끼리 어느 지점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그 준비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국경을 돌파하고 한참이 지난 뒤 마주친다면, 비록 전쟁에 대비하고 있긴 하되 지금 전쟁이 일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프랑크의 선봉대가 보이는군.”
국경을 넘은 지 고작 이틀째에 선봉대와 조우한다면, 아예 이쪽 움직임을 훤하게 읽고 있다는 얘기이다. 적국에 처들어가는 입장에서 이보다 최악의 경우는 없다.
바싸고가 휴대용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펴보았다.
“수효는 어림잡아 삼천인가. 호각이로군…….”
“기사단을 상징하는 깃발이 두 개나 있습니다. 중앙군이 아니라 지방군으로 보입니다만, 꽤나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호각이라는 것이다. 무능한 놈.”
바싸고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때마침 대군이 머무르기에 적합한 평야에서 양군이 조우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어렵겠지. 적군은 우리가 이곳으로 올 것을 예상하여 전쟁터까지 골라버렸다. 솔직히 언제부터 우리의 움직임이 읽혔는지 가늠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인간놈들은 너무 빨리 죽어버려서 귀찮다. 귀족 가문이란 것들이 수백 년만 흘러도 휙휙 바뀌어버리니 알아볼 도리가 없지 않은가.”
바싸고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적군의 깃발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백 년 전에는 방패문양이 유행하는가 싶더니 요즘에는 꽃인가. 백합에 장미, 국화까지……. 누가 보면 전쟁터가 아니라 정원에 놀러온 줄 착각하겠군.”
“그야 우리랑 비교하면 인간종은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죠.”
내가 쓰게 웃었다.
마왕은 누가 살해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살았다. 당장 바알이 얼마 전 마왕으로서 기네스북을 찍고 죽었다. 인간종이 아니라 요정족을 갖다 세워놔도 손색이 있을 거다.
“검은색 장미에 들개 문양은 가스파르 드 타바느 원수군요. 프랑크인 장성 중에서 그나마 정신이 똑바로 박힌 맹장입니다. 황제의 대리장군을 맡은 적도 있습니다. 뭐, 프랑크의 대리장군이래봤자 실권은 얼마 없겠지요.”
참고로 생드니 전투에서 싸운 적장 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위치했던 좌익이랑은 별 연관이 없었지만.
바싸고가 새삼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았다.
“……귀족들의 문양을 외우는 것이냐?”
“미숙합니다만 약간은.”
프랑크에서 내전을 치를 때 주요 가문은 대체로 다 외웠다. 며칠 전 복습까지 해왔다. 지금 평원에 나온 가문들은 하나만 빼고 전부 알아볼 수 있었다.
“두 개의 창이 교차된 문양은 베테르낭 남작. 장미를 문 암사자는 헤브르 백작. 이쪽이 기사단을 하나 이끌고 있겠군요. 하얀 국화는 샤스테 남작입니까. 죄다 맹장들로 이루어졌군요. 실속이 있습니다.”
“…….”
“아무래도 다소 두뇌파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음, 그래도 선동대로서는 괜찮습니다. 특히 드 타바느 원수가 나왔다는 게 불쾌한 지점일까요. 드 타바느 원수는 전직 대리장군입니다. 그만한 인물이 빠르게 대응했다……. 인간들은 진즉부터 전쟁을 준비한 것입니다.”
타바느 가문은 영지가 프랑크 남부에 위치했다. 우리군은 프랑크 동북부에 침입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이틀 만에 요격해올 거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전부 프랑크의 가문이에요. 브르타뉴군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일부러 프랑크인만 추려서 선봉대에 집어넣은 것이지요. 훌륭합니다.”
과연 앙리에타 여왕이었다. 전쟁에 대해서는 거의 짐승과 같은 후각을 지녔다. 여기서는 솔직하게 감탄해도 좋으리라.
“설령 우리가 전투에서 승리할지라도 여왕 입장에선 그럭저럭 나쁠 게 없습니다. 어차피 브르타뉴 입장에서 프랑크의 대귀족은 잠재적인 반란분자. 이번 기회에 처리하거나 적어도 전쟁터로 쫓아내려는 심산입니다.”
“…….”
“그 사이에 자신은 프랑크 황제의 권한까지 차지해버린다. 멋진 솜씨입니다.”
바싸고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프랑크 황제의 권한을 차지한다는 것은 무슨 소리냐.”
“음? 물론 전쟁이 일어난 틈을 타서 브르타뉴 여왕이 본격적으로 황제직을 찬탈한다는 의미입니다.”
기사단의 수효를 헤아려보았다. 육백쯤 되어보였다. 적군은 삼천 병력 중에 오분지일이 기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식하리 만치 공격력이 높은 부대 편성이었다.
“여왕은 프랑크 황제직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프랑크가 약세에 처해 있더라도 대놓고 황제직을 찬탈하면 순식간에 전국이 반란에 휩싸이겠지요. 마왕군이 침략한 지금이 기회입니다. 우리를 막아내면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겁니다.”
“…….”
“뭐, 아마 지금쯤 프랑크 황제는 어디 궁전 한 구석에 유폐되어 있지 않을까요. 병에 시달리는 중이라고 변명하면 그만입니다.”
그 사이에 앙리에타는 프랑크의 군권을 꿀꺽 잡아삼켰다. 정말이지 전쟁을 잘 활용하는 여걸이었다. 세상에 유능한 인간이 넘쳐나서 괴롭구만.
“……선봉대의 깃발만 보아도 그런 것이 짐작되는가?”
“예? 아, 뭐. 약간입니다만.”
흥미롭다. 아마 앙리에타 여왕은 승전을 거두는 즉시 프랑크 황제와 결혼식을 올리겠지. 여왕과 황제 모두 과년한 처녀총각이다. 일종의 연합정부가 꾸려지는 거다.
물론 겉으로만 연합정부일 테고 실권은 앙리에타가 모조리 쥐고 있다. 그리고 '병'에 걸린 황제는 얼마 가지 못해 골골거리며 죽을 터이다. 그렇게 되면 제국와 왕국의 주인은 명실공히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프랑크가 차지한다.
어디까지나 앙리에타가 승리했을 경우이지만 말이야.
정세가 어찌 돌아갈지 즐겁게 상상하고 있자니 옆에서 바싸고가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 약간이 아니지 않은가…….”
“네? 죄송합니다, 생각에 잠겨서 듣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천치.”
바싸고가 또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아마 얘는 항상 위장이 아픈 모양이었다.
그때 적군에서 단기필마가 평원 한 가운데로 뛰어나왔다. 전투를 벌이기 전에 사신이라도 보낸 것일까. 하지만 사신이라 치기에는 무장이 지나치게 화려했다.
“사악한 마물의 무리는 들으라!”
단기필마가 창대를 꼬나쥐고 소리쳤다. 목청에 마력을 담았는지 쩌렁쩌렁했다.
“프랑크의 기사 에르간이 네놈들을 승부할 테니, 그곳에 겁쟁이들만 있는 게 아니라면 당장 나와서 이몸과 일검을 나누도록!”
쉽게 말해 일기토를 나누자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