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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78화 (278/510)

00278 대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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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 회의실에는 긴장감이 조여오고 있었다. 장군들이 한 마디도 입에 담지 않고 침묵했다. 모두가 침울해하는 가운데, 앙리에타 여왕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군. 당했어.”

엘리자베트 통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본녀도 상대의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이니…….”

회의실에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각탁이 절반으로 나뉘어져, 한쪽에는 브르타뉴의 중신들이 앉았다. 아무도 앉지 않은 반대편에는 마법수정구 스무 개가 동시에 영상을 투영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중신들이 마치 정말로 자리에 앉은 것처럼 보였다.

앙리에타가 속에서 북받쳐오는 무언가를 씹으며 뇌까렸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인가. 엘리자베트, 그 남자가 정말로 살아있는 것일까?”

“……솔직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옛부터 흑마법에 정통했다고 알려져 있다. 시체를 조종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겠지.”

앙리에타가 비웃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은 시체에게 한방 먹은 셈이네. 필요하다면 시체까지 계략에 이용한다라. 정말 그 마왕다운 수법이야.”

회의실에 침묵이 더 무거워졌다.

모두 더하여 열일곱 명의 인간이 앉아 있었다. 두 국가는 철저하게 실력주의를 추구했으며, 고로 여기 모인 열일곱 명은 인류에서 가장 유능한 축에 속했다. 그런 인간들이 하나같이 침울한 표정에 얼룩졌다.

“흥.”

앙리에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가 양손에 깍지를 끼고 의자에 등을 깊이 파묻었다.

“바타비아 공화국과 자유도시가 마왕군에 붙었어. 녀석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일부 공화주의자들은 마왕군과 싸우는 것 자체를 귀족의 기만책이라고 여긴다.”

엘리자베트가 신중하게 얘기했다.

“귀족이 자신의 신분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대중을 선동하며, 그것이 대(對)마왕군 전쟁의 본질이다. 그리 생각하는 것이야. 신분과 종족을 뛰어넘어 하나의 목적 아래 협력하는 일이야말로 공화주의적이라고 믿고 있겠지.”

“브루노의 악몽이네.”

“아아.”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노 평원에서 단탈리안은 성전이 그저 지배계급의 논리에 불과하다고 울부짖었다. 그 영향력이 아직도 살아숨쉬고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냉소했다.

“흥, 신분과 종족을 뛰어넘는다니. 그게 오히려 정치적인 선동 문구라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차별이 없어지면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종족을 구분지어서라도 싸우는 게 인간이야. 어리석은 것들.”

“하지만, 그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우리가 위기에 놓인 것도 사실이다.”

엘리자베트는 친구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넘어갔다.

“자국에서 현재 귀족들을 중심으로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 비록 루돌프 황제이지만 마왕을 토벌한다는 명분 자체는 옳은 것 아니냐고. 속뜻은 공화국이 아니라 다시 제국의 질서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싸그리 숙청해버리지 뭐하고 있어?”

“본녀도 그러하고 싶다만…….”

엘리자베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보면 최근 들어서 한숨을 쉬는 날이 잦아졌다. 예전에는 한숨 따위를 모르고 살았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고 얼굴은 확신과 희망으로 빛났다.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어째서인지 까마득한 과거, 거의 기억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머나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어째서일까.

그때 자신은 봄이었다. 제국이 개혁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제국은 멸망했으며, 기나긴 가뭄이 이어졌다. 비 한 방울 내리는 일 없이 음울한 태양이 대지를 메마르게 하고 있었다. 단탈리안이 지배하는 가뭄과 먼지의 여름이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귀족들이 보여준 태도에 대다수의 시민이 우호적이다. 아직 실질적인 힘은 없지만 여론을 움직일 정도의 영향력은 있어. 자칫하다 여론이 더욱 악화될 위험이 너무나 크다.”

그렇다. 이것마저 단탈리안 때문이다.

도시를 구하기 위해 죽음으로 뛰어든 이야기는 '하이델베르크의 여섯 시민'이라 회자되며 한창 인기를 몰고 있다. 전국의 음유시인들이 애창한다고 봐도 좋았다. 약간씩 변형이 있지만, 대체로 하이델베르크 시장은 비열하고 이기적인 군인으로 등장하며, 여섯 명의 귀족은 고귀한 위인으로 등장한다.

지난 몇 년 내내 귀족은 숨을 죽이고 살았다. 페르디난트 제2황자조차 피도 눈물도 없이 처형되었다. 일반 귀족은 말할 것도 없겠지.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낌새가 보이면 무조건 숙청당했다.

달리 말해, 지금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귀족들이 광범위한 호의를 얻는 시기였다. 이 희귀하고 드문 시기에 하필이면 단탈리안이 대군을 조직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단탈리안의 움직임에 동조하고 있었다…….

단지 우연에 불과할까.

‘우연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잘 맞아떨어지고…… 겨우 한 사람이 의도했다기에는 지나치게 장대하다. 어느 쪽이라도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만약 단탈리안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의도했는가. 하이델베르크의 요새에서 귀족들을 띄어주었을 때부터? 바타비아 공화국과는 언제 접선한 것인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아니면 한참 전, 프랑크 내전에서 쟝 볼레라는 가명으로 뛰어들었을 때부터?

자유도시들은 어째서 단탈리안의 계획에 동조하는가.

지난 삼사 년에 걸쳐서 대륙에는 자유도시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엘리자베트를 비롯하여 합스부르크의 간부층은, 자신들이 혁명에 성공하자 그 영향을 받고 자유도시들이 생겨난 거라고 기뻐했다. 공화주의가 점차 강대해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만에 하나의 얘기이지만, 우리가 혁명에 성공한 게 원인이 아니라면? 도시들이 독립했던 배후에 단탈리안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면?

애당초 우리가 공화국을 수립하게 된 이유도 따지고보면 단탈리안 때문이지 않은가. 그때 이미 단탈리안은 장대한 기만책을 수립하고 있었을까? 바타비아 공화국과 자유도시들을 끌어들이고, 프랑크 제국을 무너트린다는 계획을.

‘말도 안 된다.’

그렇다. 설령 단탈리안일지라도 개인이 그만한 역사를 움직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자신이 지나치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가 단탈리안의 의도인지 고민해보면 그때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엘리자베트가 피곤한 나머지 눈가를 꾹꾹 눌렀다.

“……더욱이, 바타비아 공화국과 자유도시들이 저쪽에 합류한 이상, 우리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참전할 명분이 대폭 줄어든다. 우리가 그대들과 공공연히 동맹하면 공화주의 국가들을 적으로 삼아버리는 것이다.”

“과연. 공화주의자들은 자기네를 같은 편이라 믿으니 말이지. 그런 면도 있겠구나.”

앙리에타는 이제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엘리자베트. 이건 꼭 내가 아니라 주로 너를 겨냥한 계책처럼 느껴지는데?”

“…….”

“아무래도 브루노의 악몽 씨께서는 나보다 통령이 더 무서운 모양이네. 뭐, 좋아.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명분에 얽매이는 건 어차피 내 방식이 아니야.”

앙리에타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쿵, 하고 탁자에 내리쳤다. 화려한 반지였다. 그것은 오로지 프랑크의 황제만이 낄 수 있는 반지로서 제국의 통수권과 정통성을 상징했다.

그런 물건이 황제가 아니라 앙리에타 여왕에게 쥐어져 있다는 사실은, 현 프랑크 제국을 실제로 지배하는 장본인이 누구인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엘리자베트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앙리에타. 어째서 그대에게……?”

“어젯밤. 프랑크의 황제 앙리는 갑작스럽게 병이 들어 별궁에 드러누웠어.”

앙리에타가 미소를 지었다.

“원인을 알지 못할 중병인지라 황제 폐하가 다시 국정에 참여하려면 시일이 걸리겠지.”

“…….”

왜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프랑크의 통수권자가 병에 걸렸는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앙리에타가 내보이는 미소에 합스부르크의 제장은 모골이 섬찟해졌다.

“만약 명분에 사로잡혀 발걸음을 지체했다면 이것이 내 손에 들어올 날도 없었어. 위대한 브르타뉴가 반도에서 벗어나 내륙까지 발을 뻗을 기회조차 없었을 거다. 엘리자베트. 명분은 힘으로 이기지 못하는 자가 내세우는 임시방편이야.”

앙리에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브르타뉴의 제장이 동시에 기립했다. 한 장군이 다가와서 앙리에타에게 붉은 망토를 걸쳐주었고, 다른 신하는 담뱃대를 꺼내어 앙리에타에게 공손히 바쳤다.

앙리에타는 담뱃대를 한번 빨고 후우, 하고 숨을 뱉었다.

“힘. 그것이 절대적이다. 브루노의 악몽이 제아무리 두개골을 굴려서 명분이니 뭐니 대신전을 쌓아올린들, 이쪽이 승리하기만 하면 곧바로 모래성이 되어 허물어질 뿐이야. 전쟁을 원한다고? 기꺼이 그 춤에 어울려주겠어.”

그 말만 남겨두고 앙리에타는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브르타뉴의 장군들이 줄줄이 여왕의 뒤를 따라나섰다. 한동안 묵직한 발걸음이 회의실의 공기를 불안하게 울렸다.

마법수정구가 꺼졌다.

합스부르크의 신하들 중에 쿠르츠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통령 각하. 비록 우리가 참전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브르타뉴군은 대륙 제일의 강군입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저쪽에는 아가레스라는 마왕도 있다지 않습니까?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군들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기사란 괴물과 같은 병종이나 브르타뉴의 기사단은 한층 더 괴물 같았다. 일단 군에서 기마병이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국가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은 모르고 있다. 앙리에타도 모르고 있어. 방금 전, 앙리에타는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야. 전쟁은 이미 예전부터, 한참 오래 전부터 시작한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한숨을 쉬었다.

“원래 이번 전쟁은 브르타뉴와 우리가 연합해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이것이 아군의 전력이었다. 적군의 전력은 어떠했는가? 마왕군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이제 와서 봐보거라. 아군에서는 우리가 빠지게 되었는가 하면 적군에는 공화국과 자유도시가 합류했다. 눈치 채고 보니 이 지경이다.”

적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쪽의 전력을 이탈시켰으며 동시에 자신의 전력을 보강했다. 병법에 상중하가 있다면 틀림없이 극상(極上)이라 불릴 만한 책략이었다.

“앙리에타에게 전쟁이란 전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외교전과 명분전은 전투를 위한 초석에 불과하지. 하지만 적군은 시각이 아예 다르다. 전투는 어디까지나 전쟁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단순히 전쟁의 결론에 지나지 않아. ……이것이 단탈리안, 그 남자의 방식이다.”

엘리자베트는 입맛이 썼다. 자신의 친우이자 아름다운 여왕은 착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원해서 전쟁에 뛰어든다고 생각하겠지만, 절대로 아니었다. 시각 자체가 다르다는 점을 그녀는 깨닫고 있을까…….

“그런 자가 자신의 승패를 운에 맡겨둘 리 없다. 처음부터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머릿속에 그리고 나왔을 게다.”

“…….”

“나의 친애하는 신하들이여, 본녀는 두렵구나.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으나, 두 번 일어난 일은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 단탈리안은 이미 합스부르크 제국을 꺼꾸러트렸다. 만일 그가 다시금 프랑크 제국을 멸망시킨다면, 이제 단탈리안에게 멸망시키지 못할 인류의 국가란 게 과연 있겠는가?”

정답은 분명했다.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결말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엘리자베트는 움직여야만 했다. 굳이 본대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별동대들을 수없이 조직하여 마왕군의 후방을 괴롭혀줄 수는 있었다. 의용병으로 위장하면 국민들에게 들킬 일도 없으리라.

“별동대를 조직하겠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변경을 경유하여 마왕군의 배후에 침입한다.”

“예!”

제장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보급을 끊고 작전을 방해한다. 여차하면 브르타뉴군을 측면에서 옹호한다. 그것만으로도 마왕군은 꽤나 곤란해지겠지. 사냥개처럼 끈질기게 적군을 물고 늘어질 자신이 엘리자베트에겐 있었다.

나머지는 앙리에타에게 달렸다. 그녀가 승리해주기를 엘리자베트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 작품 후기 ============================

엘리자베트: 귀족들이 단체로 여론을 이끌고 있다. 누가 흑막인가?

단탈리안: 그건 나다.

엘리자베트: 바타비아 공화국이 루돌프에게 동조하고 있다. 누가 흑막인가?

단탈리안: 아, 그건 나다.

엘리자베트: 자유도시들이 루돌프의 군대에 찬동했다. 누가 흑막인가?

단탈리안: 그것도 나다.

엘리자베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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