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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77화 (277/510)
  • 00277 대연정  =========================================================================

    *  *  *

    우리는 곧바로 외교문서를 전달했다.

    「우리는 프랑크 서부에 웅거한 마왕 아가레스를 치러갈 따름이다.」

    「프랑크를 침범할 의사는 없으니 다만 길을 빌려달라. ……합스부르크의 섭정 바르바토스.」

    정명가도(征明假道)라고 할까.

    말이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지 이 시대 군대가 지나가는 곳은 약탈과 파괴로 얼룩졌다. 자국의 영지와 백성이 침해받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둘 군주는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주군. 프랑크의 앙리 황제 같은 군주도 있지 않은가.”

    “어, 음……. 걔는 지 어머니 물리치겠다고 외세를 빌리는 미친 놈이잖아요. 논외입니다.”

    가끔씩 예외도 나오는 거다, 가끔씩.

    라우라와 나는 막사에서 홍차를 마셨다. 내 계책이 받아들여지고 마왕군에서는 한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간 병사와 마족 병사의 차이를 최대로 줄이기 위해서 새하얀 군복을 만든다는 등, 사소하지만 무척 중요한 업무가 산재했다.

    나는 외교업무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마구 땡땡이를 쳤다. 모두가 바쁜 가운데 나와 라우라는 지금처럼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겼다.

    “참고로 이건 마지막 타협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앙리에타는 정말로 간단하게 길만 내어줄 수도 있어요. 구태여 아가레스를 끌어안고 우리랑 싸우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 경우, 영지들이 약간 파괴되겠지만 전쟁이 확대되지는 않겠지. 앙리에타가 아무리 호전적인 성향의 군주일지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 문제였다.

    “다만 문제는 정치적인 부담감이겠지요.”

    “정치적인 부담감?”

    “현재 프랑크 제국은 앙리에타 여왕이 주무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프랑크의 귀족들이 이러한 만행을 참고 버티는 까닭은, 그저 앙리에타 여왕의 군대가 너무도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프랑크에서는 매년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귀족이 일으키기도 했고, 공화주의에 전염된 소수의 민중이 일으키기도 했다. 그때마다 앙리에타는 철저하게 반란군을 학살했다.

    “만일 앙리에타가 우리의 요청에 응하면 틀림없이 프랑크인들은 분노하겠지요. 같은 인간간을 때려잡는 데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는 주제에, 정작 마족이 몰려오니까 간단하게 싸움을 회피했다. 도대체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내가 홍차를 홀짝였다. 따뜻한 액체가 위장을 편안하게 어루만졌다. 무슨 맛으로 홍차를 마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따쓰한 구석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차가운 도시의 남자, 홍차 정도는 따뜻해도 좋겠지.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앙리에타로서는 아무래도 꺼림칙할 수밖에 없어요.”

    “주군도 참 뻔뻔하군.”

    라우라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아니겠지. 주군이 개입해서 억지로라도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오히려 이쪽이 주군의 취향에는 더 어울릴 터.”

    “어라, 들켰습니까.”

    내가 작게 웃었다.

    “맞습니다. 사실 앙리에타가 뭘 선택해도 저는 좋습니다. 시간이 적게 걸리느냐 조금 많이 걸리느냐의 차이일 뿐이지요.”

    앙리에타는 이 기회에 반드시 짓뭉개고 싶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앙리에타는 프랑크 제국을 완전히 손에 넣겠지. 브르타뉴 왕국-프랑크 제국이 하나의 강력한 군주 아래 통합되는 것이다. 초강대국이 출현해서 나한테 좋을 게 없다.

    라우라가 혀를 찼다.

    “성격 나쁘기는. 주군은 조금만 덜 뻔뻔하면 매력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앙리에타는 전쟁을 선택하겠지요.”

    무시하고 말했다. 내 신조는 나한테 불리한 얘기는 귓등으로 흘려보내자는 것이다.

    “그녀에겐 자신감이 있습니다. 동시에 절호의 기회로도 보일 겁니다. 만약 마왕군을 물리치면 앙리에타의 정치적 입지는 단숨에 극적으로 상승합니다.”

    프랑크를 집어삼킨 외적에서 프랑크를 수호한 영웅이 된다. 이처럼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앙리에타가 물러설 리 없다. 전쟁은 일어난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음?”

    “이걸 보십시오.”

    내가 탁자에서 문서를 하나 꺼내왔다. 길을 빌려달라고 적어놓은 그 외교문서의 필사본이었다. 라우라가 쓰윽 서류를 읽어보았다.

    “이것이 함정이라고? 소녀에겐 전형적인 명분 싸움의 외교문서로 보인다.”

    내가 쿡쿡 웃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읽어보십시오.”

    “…….”

    라우라가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문서를 읽었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모르겠다. 완전히 항복이다. 소녀가 모략에 약하다는 걸 주군도 알지 않는가.”

    “아래에 발신인을 살펴보십시오. '합스부르크의 섭정 바르바토스'라고 적혀 있지요.”

    외교문서는 모두 바르바토스의 이름을 빌려서 전달되었다. 바르바토스는 인간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왕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왕군의 의사를 대표하는 데 더없이 적절하겠지.

    “앙리에타는 마왕군의 요청을 거절한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섭정이 요청한 바를 거절한 것입니다.”

    “……! 꼭두각시 황제가 참전하는 명분을 제공하는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바 편견이다. 설마 마왕군이 인간을 총사령관으로 내세워서 진격할 줄은 상상하지 못하겠지. 바르바토스의 제안을 거절할 때도 단순히 마왕의 말을 거부했다고만 생각할 게 분명하다.

    “앙리에타가 외교적인 제안을 거부하는 즉시, 우리는 루돌프로 하여금 성명을 발표하게 합니다. 프랑크는 마왕을 정벌하자는 인류의 제안을 거부했다. 어찌하여 인류가 마왕을 지키려 드는가…….”

    여기까지가 제1라운드이다. 기만책을 활용해서 상대방에게 기습을 날린다.

    “프랑크의 태도에 깊은 유감을 느낀다. 아무튼 마왕은 토벌해야만 한다. 프랑크가 허락하든 말든, 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는 인류를 위해 친정에 나선다. 알겠습니까, 라우라?”

    “아니.”

    라우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숨이 나왔다. 왜 라우라는 저렇게 똑똑한데 이런 종류의 계략에 관련해서는 완전히 어린애가 되어버릴까? 사람이란 참 신기했다.

    “협상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앙리에타 측에서는 틀림없이 당황하여서 사절단을 파견하겠지요. 그것이 합스부르크 황제의 뜻인 줄은 몰랐다, 인간으로 이루어진 군대에 한해서는 통과를 허락할 수 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 할 겁니다.”

    그런 꼼수에 어울려줄 의리는 전혀 없다.

    앙리에타는 억울하겠지만 아무튼 실수를 저질렀다. 그 실수를 무마시킬 틈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무조건 막무가내로 나아가야 한다. 사절단이 뭐라고 말하든 이쪽에선 '그래서 아가레스를 함께 토벌하겠다는 것인가 아닌가!' 하고 윽박을 질러주자.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선동전입니다. 우리가 막무가내로 나오면 앙리에타도 맞수로 대응하겠지요.”

    제2라운드의 시작이다.

    “좋다. 올 테면 와봐라. 어차피 너는 마왕군의 하수꾼에 불과하지 않느냐. 너희 쪽에서 주장하는 명분은 전부 거짓에 불과하다. 뭐, 그렇게 나올 겁니다. 진흙탕 싸움이지요.”

    이럴 때는 목소리가 큰 놈이 이기게 된다.

    앙리에타가 아가레스의 망명을 반쯤 눈 감아준 것도 사실이고, 루돌프가 마왕군의 하수인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다. 어느 쪽이 더 잘못했는가? 더 크고 더 그럴듯하게 떠들어대는 쪽이 이기게 되어 있다.

    양쪽 모두에게 과실이 있고 명분이 있는 경우, 진실은 중요해지지 않는다. 누가 더 사람들을 잘 선동하는가. 오직 그것만이 남는다.

    그리고 '이쪽'은 나의 전문분야였다.

    내가 홍차를 마시면서 얘기했다.

    “앙리에타가 맞대응을 해오는 순간, 바타비아 공화국에서 우리한테 협력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합니다.”

    “…….”

    “표면상으로는 마왕을 토벌하겠다는 것이 명분이지요.”

    브르타뉴는 왕권신수설을 떠받든다. 반면에 바타비아는 공화주의의 우두머리. 두 국가는 지난 프랑크 내전에서도 맞붙었으며, 명실공히 서로가 서로한테 적성국이었다.

    앙리에타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후려맞은 기분이겠지.

    마왕군을 상대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루돌프 황제가 친정을 발표하고, 바타비아 공화국까지 가세해버린다. 전쟁의 양상 자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바타비아 공화국 하나만으로는 불안하지 않은가?”

    “여기에 최근 독립한 자유도시들까지 부추깁니다.”

    내가 즉답했다.

    “전력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도시들이 차례차례 우리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면 정치적인 파급력이 생기겠지요.”

    “그렇군. 자유도시들이 있었는가…….”

    라우라가 고심에 빠진 얼굴로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기만책이다, 속임수다, 라고 앙리에타는 줄기차게 항의하겠지. 어떻게든 자유도시들을 이탈시키려고 뛰어다닐 것이다. 앙리에타는 자유도시들 배후에 파이몬의 해방동맹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이로써 선동전에서 '목소리가 큰 쪽'을 우리가 점유한다.

    “아버님. 심부름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막사에 데이지가 들어왔다. 하녀옷을 입은 데이지는 품에 기다란 상자를 안고 있었다. 내가 반색하며 일어섰다.

    “드디어 왔군. 라우라, 당신에게 주는 제 선물입니다.”

    “선물?”

    “진즉에 드리려고 했는데 이제야 준비되었어요. 자아. 어서 열어보십시오.”

    라우라가 눈쌀을 째푸리며 데이지한테 다가갔다.

    “주군. 혹시 또 팬티 부분이 뚫린 야한 옷은 아니겠지?”

    “어허. 어디 속고만 살았습니까. 제 양심에 걸고 그런 종류의 선물이 아니라고 장담합니다.”

    “주군의 양심만큼 믿지 못할 것도 세상에 몇 개 없다만.”

    라우라가 반신반의하며 나무상자를 넘겨받았다. 그녀가 상자를 땅에 내려놓은 다음에 열었다. 상자 안에는 막대가 있었는데 기다랗고 두터운 천이 둘둘 말려져 있었다. 라우라가 그 물건을 들어서 펼쳐보았다.

    “이건……?”

    라우라의 녹색 눈동자가 커졌다.

    선물은 깃발이었다. 푸른 산수국이 그려진 깃발.

    “라우라. 당신의 깃발입니다.”

    파르네세 공작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이번 원정군에서 총사령관은 루돌프 황제가 맡습니다. 부사령관은 누가 맡으리라 생각합니까?”

    “그거야, 바르바토스 군단장 각하나 마르바스 군단장 각하가.”

    “아닙니다.”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라우라가 부사령관을 맡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소녀가……부사령관을?”

    “말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번에 월맹군이 아니라 루돌프 황제의 군대로 움직입니다. 부사령관을 마왕이 맡아서야 정말로 인류의 군대냐고 의심받을 여지가 생깁니다. 인간인 당신이 맡아주어야 여러모로 이득입니다.”

    라우라가 얼떨떨하게 깃발을 쳐다보았다.

    “물론 이렇게 처치해도 사람들은 의심하겠지요. 어차피 명목상 내세운 허수아비 부사령관이 아니냐. 실력도 없고 실적도 없는 젊은 여자이다. 특히 브르타뉴군은 당신을 무시할 게 틀림없습니다.”

    나는 라우라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방심이야말로 제가 노리는 것입니다. 루돌프 총사령관은 이미 죽은 시체입니다. 실질적인 총사령관은 당신이죠.”

    금발의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라우라. 제가 준비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외교전도 선동전도 제가 모두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 부분, 전쟁에 있어서는 당신의 힘이 절실합니다.”

    “군단장 각하들이……소녀의 지휘를 따를 리가.”

    “바르바토스는 전혀 불만이 없을걸요.”

    내가 피식 웃었다.

    “파이몬도 지난 요새함락전에서 당신의 재능을 확인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실력주의자에요. 인간이라는 이유로 당신의 지휘를 듣지 않을 정도로 우둔하거나 꽉 막힌 위인이 아닙니다. 마르바스는 제가 설득하지요.”

    “…….”

    라우라의 뺨에 가느다란 눈물이 흘렀다.

    “소녀는……소녀는, 가문에서 쫓겨난 성노인데. 깃발을 사용할 자격 따위 어디에도 없는데…….”

    “제가 당신에게 그 자격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라우라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훔쳐주었다.

    나의 작은 군사.

    나의 소중한 첫 번째 애인.

    가문에서 없는 자식으로 취급받고 끝내 성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한 소녀에게 있어, 가문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이 그 가문을 대표한다. 그것은 자신을 무시한 가문에 대한 복수가 되는 동시에…… 더없는 성취가 되겠지.

    당신은 스스로 우뚝 설 자격이 충분하다.

    “파르네세 가문은 이미 멸망했습니다. 라우라, 이제 당신이 파르네세 그 자체입니다. 대륙에 보여주십시오. 그대들이 어떤 인물을 버렸는지. 당신을 버린 인간들에게 복수하는 것입니다.”

    “…….”

    그 순간 귓가에 효과음이 들렸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호감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 상대방은 당신을 완전한 연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호감도 락이 풀린 것일까. 딱 99에서 멈춰 있던 호감도가 드디어 100을 채웠다. 기념할 만한 첫 번째 완전공략이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시선은 라우라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라우라가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러나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닦아내고 또 닦아내도 눈물이 멈추지 않자, 라우라는 포기하고 그저 품안에 깃발을 꾸욱 안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응. 주군.”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라우라가 활짝 웃었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본 어떤 미소보다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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