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75화 (275/510)

00275 대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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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는 선잠에서 눈이 깼다.

하얀 침대. 일국의 군주가 사용하기에는 적이 검소했다. 엘리자베트가 부스스한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지독한 피로감이 썩은 치즈처럼 두개골에 들러붙어 있었다. 단 일 분이라도 더 자고 싶었다.

“끄응…….”

방 저편에 놓인 마법수정구들 중 하나가 시끄럽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것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안 그래도 수면이 극단적으로 적은데, 저절로 볼멘소리가 나왔다.

“……이런 시각에 누가. 아니, 이런 시간이기에 더욱 시급하겠군.”

엘리자베트가 유령처럼 걸어갔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새하얀 나신을 어렴풋하게 비추었다. 옛날부터 속옷을 입지 않고 알몸으로 자는 것이 습관이었다.

“음. 앙리에타인가.”

엘리자베트의 눈동자에서 잠기운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다름 아니라 앙리에타 전용으로 만들어둔 마법수정구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녀라면 자신의 소중한 잠을 얼마든지 방해해도 좋았다. 엘리자베트는 당장 마법수정구를 가동했다. 마법수정구에서 빛무리가 흘러나오며 인물의 형상을 투영했다.

“안녕, 엘리제.”

화염처렁 정열적인 머리칼을 지닌 여왕,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이 대범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갑작스럽지만 하나 물어볼게. 혹시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 하나 있어?”

“……정말이지 갑작스러운 질문이군.”

엘리자베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조금 전까지 술을 마신 친구와 같은 태도이지 않는가. 아무도 그녀가 제국과 왕국을 호령하는 군주라고 믿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 거리낌 없는 어조에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으음, 하고 엘리자베트가 턱을 괴었다.

“비밀인가. 곤란하군. 소녀의 비밀을 알아내서 어디 나쁜 곳에 써먹을 생각인가?”

“소녀는 무슨. 애인 하나 없이 이십 년 넘게 처녀로 산 여자 보고 누가 소녀라고 부르겠나.”

“……마음만큼은 소녀다. 마음만큼은.”

엘리자베트가 항변했지만 자신이 느끼기에도 애처로웠다.

“설마, 그 반응을 보건대 정말로 처녀야?”

“본녀는 국가와 결혼했다. 좋다, 앙리에타. 이걸 그대에게 알려주는 비밀로 하지.”

“쯧쯧.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서 왜 그러나.”

앙리에타가 정말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트는 약간이지만 울컥했다.

“마음만 먹으면 본녀도 누구든지 잡아서 즐길 수 있다. 단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거 얼굴은 예쁘장한데 남자 못 사귀는 애들이 항상 변명으로 써먹는 말인걸.”

“됐다, 됐어. 이 얘기는 그만하지.”

엘리자베트가 한숨을 쉬었다. 브르타뉴의 여왕은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기로 유명했다. 아마도 브르타뉴인과 합스부르크인이 가진 민족적인 차이겠지, 하고 엘리자베트는 넘어갔다.

“나 원. 중신들이 이 대화를 엿들었으면 반란이 일어나도 벌써 두 번은 일어났을 거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사사로운 비밀을 들려달라 한 것인가.”

앙리에타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단탈리안이 움직였다, 엘리제.”

“…….”

공기가 달라졌다.

엘리자베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곳에는 한 명밖에 없는 친구를 대하는 엘리자베트가 아니라 다만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냉혹하게 통치하는 독재자가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긴장감을 억누르며 간신히 물었다.

“……움직였다고 함은?”

“당연히 군대를 일으켰다는 뜻이지. 월맹군이야, 엘리제.”

앙리에타는 마치 타인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긋했다.

“차이점이라면 지난 번엔 합스부르크로 향했지만 이번에는 프랑크로 오고 있다는 걸까. 네 입장에선 꽤나 다행이겠네.”

“으음.”

물론 다행이었다. 다시 한번 월맹군을 자국에서 맞이하라니 끔찍한 악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목적지가 프랑크라는 것은 눈앞의 친구, 앙리에타가 월맹군에 맞서야 한다는 소리였다.

“정보의 출처는 어디인가? 의심하는 어투가 되어 미안하다만, 그 마왕은 정보전과 심리전의 귀재이다.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

섣부르게 판단한 순간 이미 상대방의 함정에 빠지게 되겠지.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정보부에서도 마왕군은 감시대상 제1순위였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아직 특별한 동향을 보고받지 못했다.

“이게 비밀을 알려달라고 한 이유인데, 나한테도 비밀이 하나 있거든. 사실 나는 지금 마왕 중 한 사람과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있어. 그 사람이 출처야.”

“마왕이라니.”

엘리자베트가 눈썹을 째푸렸다.

앙리에타가 마왕과 협력한다는 사실은 제법 놀라웠지만 지금은 그 지점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앙리에타 스스로 비밀을 알려온 것이었다. 엘리자베트는 현안에 집중했다.

“정보가 역조작 되었을 가능성이 너무 크지 않은가. 위험하다, 앙리에타.”

“그 마왕이 아가레스거든. 삼 년 전에 섭정국에서 일어난 내전, 기억하지?”

“……서열 제2위. 내전에서 패배한 마왕이로군.”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앙리에타가 말했다.

“현재 마왕군에서는 대대적으로 숙청이 이루어지고 있어. 제법 규모가 거대한 모양이야. 서열 제1위인 바알이 죽었을 정도라네. 그런 과정에서 단탈리안이 한 연설의 영상을 입수했어. 나중에 궁정마법사 시켜서 전송시켜줄게.”

“부탁하지. 그렇다면 숙청은 단탈리안이 주도한 것인가?”

앙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

“흐음.”

“엘리제. 마왕과 협력하면서 지난 월맹군의 내막을 들을 수 있었어. 브루노 평원은 전적으로 단탈리안이 연출해낸 무대였지.”

“……그게 무슨 뜻인가.”

단탈리안은 연설전에서 인류에 독을 뿌린 장본인이었다. 그것 이상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말인가?

앙리에타는 자신이 알아낸 진실을 들려주었다. 단탈리안은 산악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 당시 마왕군의 군단장들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썼다. 당연히 아가레스 역시 편지를 받았다.

아가레스는 단탈리안이 산악파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꿰뚫어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받음으로써 앙리에타는 제8차 월맹군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깨달은 것이었다.

“……그렇게 된 거야. 각본과 연출 모두 녀석이 꾸몄어.”

“…….”

엘리자베트는 묵묵부답으로 술잔을 쥐고 있었다. 도중에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듣지 못하겠어서 술을 꺼내왔다. 최고급 미주일 텐데 입맛은 쓰기만 했다.

“브루노 평원에 집결한 시점에 우리는 이미 함정에 걸린 거야, 엘리제.”

“그게 무슨……고작 단 한 사람에게 인류는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는 말인가.”

엘리자베트가 몸서리를 쳤다.

“말도 안 된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어.”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지. 미안하지만 너와 나는 군주야. 우리에겐 현실을 외면할 권리가 없어.”

이런 것이 현실이라면 지나치게 끔찍했다.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의 악몽이 대륙을 뒤덮고 있었다.

“십만이 죽었다. 앙리에타, 합스부르크에서만 십만이 죽었다.”

엘리자베트가 괴롭게 중얼거렸다.

“그것이 단 한 사람의 짓이라고? 어떻게 시민들에게 이런 진실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아무리 마왕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자랑스러운 병사들을 자멸시켜야 했지.”

시종일관 느긋하게 얘기해온 앙리에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단 한 순간이라도 나의 병사들이 내지른 비명을 잊어본 적 없어. 너도 그렇겠지.”

“…….”

“복수의 때가 다가온 거야, 엘리제.”

두 사람 사이에는 명백히 온도의 차이가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극도로 단탈리안을 경계했고 심지어 두려움까지 가졌다. 반면에 앙리에타에게 단탈리안이란 상대하기 까다롭지만 공포스러운 인물은 아니었다.

이러한 차이는 몇 년 전, 엘리자베트가 미치광이 사제 쟝 볼레의 정체가 단탈리안임을 알아본 데서 비롯했다. 엘리자베트는 이 정보를 곧장 앙리에타에게 통보했다. 그리하여 앙리에타는 자신이 꺠부순 적이 다름 아니라 단탈리안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앙리에타는 이미 한번 단탈리안을 철저하게 물리친 경험이 있었다. 그것이 앙리에타에게 근거 있는 자신감을 주고 있었다.

“만에 하나 정보가 역조작된 것일지라도 우리가 주의를 가하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어. 설마 그 정도 자신감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믿어, 엘리제.”

“……옳은 말이다. 본녀가 약간 조급했군. 미안하다.”

“뭐, 이해해. 단탈리안이 관련되면 너는 신경질적이게 되니까.”

앙리에타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상대는 정보전과 심리전의 귀재야. 하지만 전쟁터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지. 그 점을 이용해서 한방 싸움을 노리면 돼.”

“…….”

엘리자베트가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어떻게 얘기를 전달할까 잠시 머뭇거리고 눈앞의 친우에게 말했다.

“전술에 관련해서다만. 앙리에타, 아마도 단탈리안은 강력한 부하를 얻은 것 같다.”

“어?”

“하이델베르크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앙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군에도 꽤나 하는 녀석이 있다며 떠들었잖아.”

“그 전술가의 정체 말이다만……십중팔구 단탈리안의 참모이다.”

앙리에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친구의 표정에 왠지 모를 아픔을 느끼면서 엘리자베트가 마저 얘기했다.

“항복사절단으로 참여했던 이들이 증언하건대, 단탈리안을 주군으로 모시는 소녀라고 하더군. 분명히 단탈리안은 전투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약점을 그대로 내버려둘 만큼 우둔한 인물이 아닌 게야.”

하이델베르크에서 귀족들이 고귀한 태도를 보여주는 바람에 시민들은 귀족층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공화국 정부 내에서도 귀족의 목소리가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여태까지 억눌러온 만큼 일단 계기가 생기자 강하게 터져나왔다. 단탈리안은 한 번의 승리를 단지 전투에 국한시키지 않고, 이쪽의 정치까지 뒤흔들었다…….

승리를 활용할 줄 아는 적수만큼 무서운 것이 없었다. 단탈리안은 지극히 두려운 존재였다.

앙리에타가 한탄했다.

“모략과 정략. 거기에다 군략까지 갖춘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적수가 되어버렸네.”

두 명의 군주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중압감을 이겨내려는 듯 엘리자베트가 말을 꺼냈다.

“월맹군 내부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어떨까. 숙청을 획책한 것은 단탈리안이지만 그 정보에 비추어보건대 병력은 얼마 없다. 병력을 가진 마왕들을 분열시키고, 단탈리안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트리면…….”

“아마도 어려울 거야.”

앙리에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가레스의 말에 따르면 그 녀석, 아예 군단장들과 연인 사이라고 해. 거기에다 단탈리안은 월맹군을 성공시키고 내전을 무마한 장본인이야. 군단장들은 단탈리안을 한없이 신뢰하고 있겠지.”

“신뢰는 굳건하다, 라고…….”

“아아.”

서열 제1위 마왕에 대해서 숙청 작업을 벌였다는 것 자체가 이 기획을 입안한 단탈리안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신뢰도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내분의 여지는 한없이 적었다.

엘리자베트가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그 자는 무엇이 목적인가? 이해하기 어렵군. 단순히 인류를 멸종시키는 것이라면 숙청 따위를 할 필요가 없었을 터이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몇 가지 사실은 분명하지.”

앙리에타가 싸늘하게 말했다.

“녀석은 가장 위험한 부류의 인물이고, 인류의 적이며, 우리의 원수야.”

“…….”

“반대로 생각해서 녀석만 사라지면 마왕군은 중심축을 잃겠지. 엘리제, 계엄령을 준비해. 이번이야말로 인류의 존망을 걸고 전쟁에 나서야 할 때야.”

엘리자베트는 술을 들이마시고 주의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악몽은 스스로 끝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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