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74화 (274/510)

00274 대연정  =========================================================================

우리는 바알의 잔당을 무너트린 이후, 대대적으로 니블헤임에서 개선식을 올렸다.

이번 행사를 위해서 이미 두 달 전부터 개선문을 만들어두었다. 시간이 촉박하여 당초 계획보다 개선문의 크기가 약간 작아졌지만, 난쟁이 장인들이 들러붙어 만들어내자 모양새가 그럴듯했다.

“불멸의 바르바토스 전하 만세!”

“순결의 파이몬 전하 만세! 고귀의 마르바스 전하 만세!”

니블헤임의 시민들이 몰려나와 꽃송이를 무수하게 흩뿌렸다.

오만의 군대는 보무가 당당하게 걸었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대낮임에도 형형색깔의 연기를 뿜어내며 폭죽이 하늘로, 끊임없이 하늘로 솟구쳤다.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는 군마에 올라타서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대군을 맨 선두에서 이끄는 면면을 살펴보면 꽤나 의미심장했다.

먼저 이번 사건으로 명실상부 마왕군의 톱으로 올라선 세 사람. 평원파의 바르바토스와 산악파의 파이몬, 중립파의 마르바스가 제일 앞에서 행진했다.

당초부터 각 파벌은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그러나 바알과 아가레스, 두 사람에게는 파벌을 뛰어넘어 단신으로 전쟁터를 평정할 무위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파벌의 수장들은 언제나 마왕군에서 '두 번째'로 취급받았다.

바알이 사라진 이상 파벌들의 독주를 막을 세력은 전무했다.

정말 시대가 바뀐 것이었다.

그동안 무소속으로 남아 있던 마왕들도 불안에 잠겼다. 그들 중 몇몇은 중립파에 가입했고, 몇몇은 자신들을 비호해줄 유력자를 찾아 나섰다. 중립파에 가입한 자들은 아마 정치적으로 중립파가 제일 무난하리라 판단해서 그런 것 같았다.

세 명의 수장이 나란히 걷는다는 것. 이런 풍경 자체가 마인들에게는 감격적이겠지.

월맹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제2차 월맹군에서도 저 세 사람이 선두에 섰다. 점차 인간에게 밀려서 언젠가 멸망하지 않을까, 하고 비관론이 대두하던 오늘날 세 명의 수장이 다시금 단합했다.

저런 풍경을 만들어내려고 고생한 사람은 정작 나이지만…….

“바싸고 전하 만세!”

“꺄아악, 가미긴 전하! 여기 봐주세요!”

다음으로 행렬을 이끄는 마왕은 바싸고와 가미긴.

재미난 순서였다. 서열이 우선시되었다면 당연히 서열 제3위인 바싸고와 서열 제4위인 가미긴이 앞장서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두 번째 순서에 배치된 것이었다. 바싸고와 가미긴은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로 시민들에게 답례하고 있었지만, 글쎄. 속마음은 과연 어떨까…….

“이면의 단탈리안 전하 만세!”

그리고 나 단탈리안.

이상 여섯 명의 마왕을 상징하는 깃발이 도시 곳곳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참고로 나를 뜻하는 깃발은 일곱 개의 가면이 그려진 얼굴이었다. 때마침 영지도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럭저럭 적절했다.

“세상이 말세가 되어도 한참 말세가 되었군.”

내 왼쪽에서 바싸고가 중얼거렸다. 얼굴은 활짝 웃고 있는데 목소리에서는 불쾌함이 너울거렸다. 신기한 재주를 갖고 있구만.

“기껏해야 말단에 불과한 마왕이 우리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다니. 예전과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야.”

“더 이상 예전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이겠지요.”

바싸고가 콧방귀를 뀌었다.

“착각하지 마라, 무례한 놈. 바르바토스의 위세를 빌린 기생충 주제에 어디서 나대느냐. 발푸르기스의 밤에서는 기습을 당했을 뿐이지 나에게는 네 명의 정령왕이…….”

“불의 정령왕, 물의 정령왕, 대지의 정령왕, 바람의 정령왕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세간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사실은 어둠의 정령왕과도 계약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싸고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저런, 얼른 웃어라. 수많은 시민 여러분이 지켜보고 있다. 조금 더 활짝 웃지 않으면 정치적인 어필이 줄어들 거라고?

바싸고는 정령사이다. 본신의 무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으나 정령왕을 무려 다섯이나 거느리는 바람에 지극히 상대하기 까다롭다. 플레이어 캐릭터를 마법사나 마검사 계열로 키웠으면 거의 깨기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 정령사에게는 '마음이 깨끗하다'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 정령사의 톱을 차지하는 바싸고가 실은 속이 새까만 능구렁쟁이다. 세상이란 이 모양 이 꼬락서니이다.

“어떻게, 어디에서도 소환한 적이 없거늘…….”

“이런. 제가 연설에서 분명히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거짓은 반드시 몰락하기 마련이라고.”

내가 작게 웃었다. 멀리서 보면 서로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우스운 일이다.

“바싸고 전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 따위는 없다는 것을 슬슬 깨달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기에는 교훈이 조금 부족했을까요?”

“…….”

“오늘 승전 연설에서 바르바토스가 선언할 겁니다. 마왕군의 서열 제도는 전격적으로 폐지됩니다.”

바싸고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침내 웃는 얼굴조차 아니게 되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것인데, 서열 제1위에서 서열 제3위까지는 아무래도 정치적으로는 미숙하다. 그들이 아니라 바르바토스나 파이몬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된 것 자체가 증거이다. 자신이 지나치게 강력하면 정치적으로 덜 성숙하게 되는 것인가.

“폐지한다니. 그게 무슨…….”

“말 그대로 폐지입니다. 서열은 대역죄인 바알이 주관하던 것. 원래 서로 평등한 마왕들에 순위를 매겨서 마왕군 전체의 화합을 방해하는 제도이지요. 악습은 하루빨리 사라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바싸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열 제도에는 바알뿐만이 아니라 바싸고 본인이 깊숙하게 개입해 있었다. 그런 제도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바싸고까지 숙청의 대상에 들어간다는 걸 뜻했다.

내가 이제 알아차렸다는 듯 참, 하고 소리를 높였다.

“바싸고 전하께서 공정의 마왕이라 불리는 까닭이……그러고보니 서열을 공정하게 매긴다는 명성에서 비롯했군요. 곤란한 일입니다. 저희로서는 서열 자체를 부정할 계획이었습니다만…….”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바싸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알을 처치하는 일에 동참하면 모든 걸 불문에 부치겠다고 약속했을 터이다. 맨 마지막에 바알의 목을 벤 사람도 나였어. 어째서 연좌제가 적용되냐는 말이다.”

“예, 맞습니다. 물론 '저'는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내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른 동지들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더군요. 고작 바알에게 칼끝을 한번 쑤셔넣은 것으로 바싸고 전하의 진심을 믿을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그것이 중론입니다.”

“그, 그럴수가…….”

“동지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이렇습니다. 바싸고 전하가 바알을 찌른 것은, 솔직히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전하가 바알을 배신한 것이지 않습니까. 이미 한번 배신해본 자가 다시 한번 우리를 배신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 것이죠.”

내가 멋쩍게 웃었다.

“뭐, 아주 틀린 말도 아니라서 저도 변호에 실패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

“너무 질타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제가 끝까지 열렬하게 변호한 끝에 다른 동지 여러분도 바싸고 전하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기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제부터 역적 아가레스를 토벌하러 갑니다. 제 개인적인 정보망에 따르면 아가레스가 프랑크 제국과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지 않은 적이 되겠지요.”

말이 프랑크 제국이지 실상은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여왕이 조종하는 국가이다.

앙리에타 여왕과 아가레스가 보조를 맞출 가능성이 꽤 높겠지.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상정해두는 편이 좋다. 인간계 최강의 군주에 마계 최강의 군주가 비밀동맹을 맺은 것이다. 끔찍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아가레스는 반드시 처단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마왕군, 평화와 화합을 수호하는 마왕군에 있어서 아가레스는 분탕을 일으키는 종자에 불과하니까요. 이 역사적인 전쟁에서 바싸고 전하가 선두에 나서주셔야겠습니다.”

“…….”

바싸고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가레스를 상대하는 전쟁에서……내가 선두에 서라……?”

“예. 그렇게 해주신다면 다른 동지들도 바싸고 전하의 진심을 결코 의심하지 않겠지요. 제 이름을 걸고 보장해드릴 수 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로군……웃기지 마라! 아가레스이다. 그 아가레스야!”

바싸고가 이빨을 물고 소리질렀다.

“그 멧돼지 같은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바알조차 대군단을 동원해야만 한다! 네놈의 잘난 파벌도 중립파와 산악파한테 손을 벌려서 겨우 퇴치하지 않았더냐. 아니, 퇴치도 아니지. 아가레스는 멀쩡히 살아서 도망쳤으니까! 이건 논외이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언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바싸고 전하.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최종권고이지요.”

“뭐?”

“아가레스가 강력하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습니다. 삼 년 전에 그녀를 상대한 저희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렇기에 아가레스 다음으로 강하다 알려진 바싸고 전하를 앞장세우려는 것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화살받이로 쓰겠다는 말이다.

이쪽의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바싸고의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네놈들이 감히 나를 능멸하려 들어?”

“여전히 이해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이건 최종권고입니다. 바싸고 전하께서 거부하시면, 안타깝지만, 저로서는 더 이상 전하를 옹호해드릴 수 없습니다. 다른 동지들을 막을 수가 없어요.”

“능글맞은 구렁이 새끼가……!”

당장이라도 내 목덜미를 붙잡으려는 듯 바싸고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더 이상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나의 왼편에서 함께 행진하고 있는 가미긴이 슬쩍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바싸고를 쳐다본 것이었다. 바싸고는 수차례 인상을 구기더니 간신히 손을 아래로 내렸다.

“바싸고 전하. 물론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전하께는 그만한 자유가 허락되어 있을 테니까요. 지금이라도 전하의 마왕성에 돌아가서 농성하십시오.”

내가 한껏 상냥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전하께서 과연 얼마나 버티실지 모르겠군요. 바알도 저희 동지들에게 주살당했습니다. 마계의 여론은 이미 저희에게 기울었지요. 당장 오늘 예정되어 있는 연설에서 바르바토스가 바싸고 전하를 공적으로 선언할지도 모릅니다…….”

“…….”

뭣하면 아가레스한테 도망쳐서 합류해도 좋다. 하지만 바알의 대군단도 고작 두 달 만에 녹아내렸다. 그 광경을 바라본 네놈한테 우리에게 등질 자신이 있을까? 마왕군 전체와 마계사회를 적으로 돌릴 배짱이 있을까.

나는 바싸고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너무 불편하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무렴 우리가 멍청하게 바싸고 전하를 토사구팽하겠습니까? 아가레스는 강력한 적입니다. 바싸고 전하를 전력으로 지원할 것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잠시간의 침묵이 있고서 바싸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바로 바르바토스한테 전령을 보냈다. 딱히 의미는 없지만 바싸고가 안심할 수 있도록 제스처를 보낸 것이었다.

이런 제스처는 되도록 후딱후딱 보여줘야지 후환이 없었다. 제스처를 보면서 상대방이 '그래,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이게 최선이야.' 하고 생각하게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바르바토스한테 기생한다고 말씀했습니다만, 그러는 바싸고 전하께서도 바알한테 지금껏 기생하시지 않았습니까? 전하나 저나 훌륭한 기생충 동지입니다. 이제부터는 저희 둘 다 똑같은 세력에 기생하는 것이고요.”

“…….”

“모쪼록 친하게 지내보지요. 사실 말이지, 저는 바싸고 전하를 예전부터 좋아했습니다.”

바싸고는 행사가 끝나기까지 말없이 어깨를 떨었다.

그날, 마왕군에서 공식적으로 서열 제도가 폐지되었다.

<화합과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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