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73화 (273/510)
  • 00273 대연정  =========================================================================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나는 바알의 시체에 올라섰다.

    시체는 엉망진창이었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온몸의 부위가 이리저리 뜯겨나가 도저히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만인지적의 서초(西楚) 패왕 항우를 떠올리게 하는 최후였다. 딱히 불쌍하지는 않았다.

    설마 고귀한 죽음을 원하지는 않았으리라. 분수에 넘치는 일 아닌가. 이 정도 최후가 바알에게는 딱 어울린다.

    후우, 후우욱…….

    마왕들은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전투의 열기, 목숨을 걸고 싸워서 살아남았다는 데서 오는 흥분이 뜨겁고 불쾌한 증기처럼 피어올랐다.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실제로 죽은 마왕도 대여섯 명쯤 되었다.

    “오늘 오후 5시 45분. 역사에서 처음으로 악은 처단되었습니다.”

    제왕이 압도적인 무위를 뽐내며 군림하던 시대. 신화의 시대가 이곳에서 저물고 있었다.

    “월맹군이 실패한 것은 결코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비겁하게 동족을 배신하고 남몰래 내분을 일으킨 반역자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태생부터 바퀴벌레와 같은 이 족속들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위장 능력에 힘입어 여태까지 마치 자기가 고귀한 인물인양 시늉해온 것입니다.”

    현재 내 모습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메모리아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바알이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는 모습도 물론 저장되었다. 영상은 약간의 편집을 걸쳐서 마계사회 전역에서 무료로 틀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거짓은 반드시 몰락합니다.”

    나는 확고부동한 시선을 담아 정면을 노려보았다.

    “마왕이 한 명의 마인을 속이기란 간단합니다. 열 명, 백 명을 선동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천 명이 되면. 천 명을 뛰어넘어 만 명이, 만 명을 뛰어넘어 십만 명이, 십만 명을 뛰어넘어 백 만명이 된다면 그곳에서 더 이상 거짓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거짓말이지만.

    한 명의 거짓이 열 명의 거짓으로, 백 명의 거짓으로, 천 명의 거짓으로 나아가면 그건 더 이상 거짓이 아니게 된다. <던전 어택>에서 바알의 죄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을까.

    사람들이 으레 착각하지만 진실의 힘은 절대로 진실이라는 것 자체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그 진실을 믿어주는 사람의 숫자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하여 진실이든 거짓이든 어디에서나 선동자가 필수불가결하다. 순전히 힘의 싸움이다. 바알이 패배한 것은 거짓이 몰락하기 때문이 아니요, 나라는 선동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역죄인 바알은 무려 이천 년 동안 우리 마왕군과 마계사회 전체를 우롱했습니다. 어쩌면 지난 이천 년의 시간 속에서 바알의 진짜 얼굴을 깨달은 자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아니, 틀림없이 있었겠지요. 그들은 필사적으로 진실을 퍼트리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바알의 칼 아래 싸늘하게 죽어나갔습니다…….”

    이천 년 동안.

    역사서에 이름 한 줄 남기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나는 묵념하는 사제처럼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과거의 역사에서 그들은 완벽하게 망각된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과연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 시절, 정의는 단지 미약했으며, 진실은 그저 공허했으며, 용기는 다만 무의미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역사는 시체의 역사. 일억의 원통한 영혼이 일억의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없는 무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고개를 들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과장하지 않고 뚜렷하게 말했다.

    “오늘 오후 5시 45분. 역사에서 처음으로 악은 처단되었습니다.”

    나의 목소리는 확성마법을 빌어 폐허가 되어버린 궁전 구석까지 스며들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역사는 더 이상 무덤이기를 그칠 것입니다. 오늘 오후 5시 45분, 시간은 틀림없이 일시적으로 정지했습니다. 후대 역사가들은 오늘을 '위대한 정지'라고 부를것입니다. 바로 이제부터 전혀 다른 의미에서 역사가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모략의 시대로.

    투쟁의 시대가 끝나고 대립의 시대로.

    “오늘부터 우리는 정의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대책없는 낙관론을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정의는 승리할 것이며, 그보다 더 자주, 또한 더욱 처참하게 패배할 것입니다.――그러나 결코 정의가 망각되는 일만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느 쪽이 정의인지 내가 정해주겠다.

    “오늘부터 어느 쪽이 정의이고 어느 쪽이 악인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누가 용감하고 누가 비겁한지, 모든 것이 적나라하고 명백하게 기록될 것입니다. 이제 폭군의 억압 아래에서 이름 모를 의인들이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죽은 영웅은 마땅히 선전에 써주어야 마땅하므로.

    “거짓은 반드시 몰락합니다. 그것은 거짓이 스스로 무력해져서 멸망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마왕군과 마계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선봉대가 되어 거짓과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명이 거짓을 속삭일 때 우리는 열 명의 힘과 열 명의 목소리로 진실을 울부짖을 것입니다. 열 명이 거짓을 퍼트릴 때 우리는 백 명이 되어 투쟁할 것입니다. 백 명, 천 명, 만 명이 거짓을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시기가 다가오더라도,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전대를 이루어 용맹정진하게 정의를, 오로지 굳건하게 정의를 노래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반항한다면 우리는 그대들보다 열 배는 많은 병력으로 철두철미하게 섬멸전에 돌입하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쳐야 말해야 합니다. 거짓은 반드시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마왕군과 마계사회 전체가, 반드시 거짓을 몰락시키는 것이라고!”

    내가 손을 치켜들었다.

    “마인들이여! 연합하십시오!”

    그대들이 연합할수록 우리는 강대해진다.

    “대역죄인 바알이 심어놓은 악은 아직도 뿌리가 깊습니다. 수만 명의 잔당이 마왕성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그들은 가장 강력한 군단입니다. 심지어 삼 년 전, 동족을 공격함으로써 마계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던진 일급범죄자 아가레스조차 건재합니다.”

    이들이 처리되어야 나는 안심하고 발을 펴고 잔다.

    다른 마왕들도 마찬가지이다. 단신으로 파벌의 힘을 능가하는 아가레스는 반드시 격멸해야만 한다. 평원파와 산악파는 파벌을 위협하는 위험요소가 없어기지를 바란다. 중립파는 파벌 간 질서를 망가트리는 트러블 메이커를 없애고자 한다.

    우리의 이해관계는 일치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항복, 혹은 완전무결한 연합이 그것입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의지에 따라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나 '노예가 되는 자유'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더 나아가 우리의 후손 전원을 노예문서에 기입함으로써, 다시금 어둡고 음침한 이천 년의 시간에 접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마인들이여. 연합하십시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하여.

    “마왕군의 지도부는 천명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정의가 우리에게 희생을, 필요하다면 모든 희생을 요구할 때, 우리는 마계사회의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보다 더 많이 희생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부터 감수하지 않을 고난이 마계사회의 시민 여러분에게 놓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지도부를 비방하거나 비판하지 마라.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송두리째 마인 여러분 전체의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마계를 위하여 행진하는 '첫 번째 부대'일 뿐입니다. 가장 신성하고 소중한 제복을 다시 입을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미리 준비해온 천을 품속에서 꺼내들었다.

    초승달이 그려진 깃발. 월맹군의 깃발이었다.

    “정의가 승리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이 제복을 벗지 않을 것이며, 승리하지 못한다면 살아서는 패배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간부로, 마왕이자 마계를 위한 군인인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투쟁에 돌입합니다. 그 투쟁에는 오직 하나의 구호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나는 월맹기를 꾹 쥐고 소리쳤다.

    “마인들이여! 연합하십시오!”

    월맹기에는 핏물이 묻어 있었으며, 그것은 마치 나의 피인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우리들 자랑스러운 마족에게 노예 따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자신에게 후손들마저 노예로 떠넘길 자유가 있다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반역자와 상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신들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원칙, '너 스스로 고귀한 자가 되어라' 하는 원칙에 충실합니다.”

    일종의 계엄령이 내려졌다.

    우리에게 협력하는 자에겐 정의의 꼬리표가 붙을 것이요, 우리에게 반항하는 자에겐 반역자라는 멍에가 씌워질 것이다.

    “우리는 인간과 달리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삶이 비겁해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이여, 전사임을 소명받은 마족이여! 우리 자신이 살고 죽는 문제는 대단히 사소한 문제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마족의 긍지가 살아 숨쉬는 것입니다.”

    저열한 인간종과는 다르다.

    마족에게 뿌리 깊게 박힌 인종차별적인 심리를 건드린다.

    “우리가 하나의 군단을 이루어, 어떠한 고난에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결코 항복하여 노예로 전락하지 않겠노라고 소리친다면, 그 소리가 열 개의 메아리가 되어 다시금 열 명의 소리가 되고, 그리하여 다시 백 개의 메아리, 천 개의 메아리, 십만의 메아리가 되어 온 세계를 요동시킨다면, 우리는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것입니다!”

    자아.

    “마족들이여! 일어서십시오! 하나의 정의를 위한 십만의 발걸음이 되어 일어서십시오! 오늘부터 새로이 열릴 시대를 위한 노래가 되어 일어서십시오! 오늘 5시 45분, 시간은 일시적으로 정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거짓과 기만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들이――여러분들의 두 손과 두 발로 직접 역사를 움직여야만 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

    시작하자.

    “여신들께 우러러 요청하나니. 전사들이여, 연합할지어다!”

    *  *  *

    우리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바알의 잔당을 섬멸하기 위하여 연합군이 조직되었다.

    바알의 대마왕성은 마왕의 성역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고, 덕택에 우리는 보급선을 신경 쓸 필요없이 곧바로 대군을 이끌고 나갔다. 병력은 총 오만 대군. 우리에 맞서는 바알 휘하의 군단은 이만이천이었다.

    겨우 한 마왕이 이끄는 군단이 이만이천. 바알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척이나 느긋했다.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왕성에서 마력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면 그만이야.”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렇다. 마왕성에 주둔하는 마인들은 마력을 먹고 산다. 하지만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어도, 마왕이 죽으면 마왕성에서 점차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버린다.

    자그마치 이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을지라도 마력이 사라지면 보급이 끊기는 셈이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이만이라는 병력이 오히려 장애물이 되겠지. 그들이 잡아먹는 마력이 장난이 아닌 수준일 테니까.

    우리는 마왕성을 포위한 채 스무 날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성문으로 뛰쳐나오는 적군이 속출했다. 우리는 포위망을 굳건하게 다져서 녀석들을 손쉽게 요리했다.

    “꼭 칠면조를 사냥하는 것 같은데.”

    시트리의 표현이었다. 말 그대로 사냥이었다.

    바알이 사라진 이상 적군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반면에 이쪽은 마왕이 마인들에게 직접 심리를 통하여 명령 내리고 있었다. 마왕이 통솔하는 마족 부대와 그러하지 못한 마족 부대의 차이는 확연하다 못해 어마어마하여, 바알이 자랑하던 대군단은 불과 두 달 만에 녹아내렸다.

    사회가 혼란에 빠졌을 때 제일 유효한 수단은 바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시시각각 폭로되는 바알의 죄목. 나의 연설. 여기에 군사적인 승리까지.

    마계사회는 새로운 월맹군 지도부에 점차 열렬한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266화에 참고한 서적을 알아낸 분이 나타나셨더군요. 맞습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쓴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입니다! 영구평화론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사실 군주를 대통령이라 바꿔 읽으면 대의민주주의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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