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71화 (271/510)
  • 00271 반역하는 자  =========================================================================

    “……그러했는고.”

    바알이 쓰게 웃었다.

    소환수 계열의 마물에게는 숙주가 필요했다. 숙주가 마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이상 소환수는 움직이지 못했다. 소환수들과 싸울 때는 숙주를 먼저 제거하는 편이 현명했다.

    '지금 무도회장에 죽음의 기사 오백 기가 있다'라고 아몬이 말했다. 죽음의 기사는 모든 소환수를 통틀어서도 극히 강력한 마물. 그렇기에 바알은 초반부터 바르바토스를 도발하여 유인했다. 마력의 근원인 심장을 파괴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나…….

    “일부러 패배하는 척 연기했군.”

    정황상 바르바토스가 격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제2차 월맹군에 대해서 가장 후회와 증오를 안고 있는 마왕이 다름 아니라 바르바토스였으므로. 그렇지만, 단순히 분노를 위장한 것이었는가…….

    바알은 속속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제파르가 바알을 공격하지 않고 무조건 바르바토스를 구출하려고 한 까닭은, 그 자가 냉정해서가 아니라 작전상 구출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구출한 이후에 제파르는 망토로 바르바토스를 가렸다.

    바르바토스가 회복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바알이 입가에 피를 흘리며 말했다.

    “상기해보니 이상했도다. 바르바토스가 공격해오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네놈, 본인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았더냐.”

    감정이 북받쳐서 일어난 공격이 아니었다. 우발적인 기습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만을 위하여 초장에 깔아둔 복선이었다.

    “결국 본인을 죽이는 자는 바르바토스인고……호사로다.”

    “음, 아닙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단탈리안이 손가락을 뺨을 긁적거렸다.

    “의도적으로 패배를 연출한 것은 맞습니다. 심장이 노려질 것이 분명하니 미리미리 회복약을 빨아두기도 했지요. 하지만 바르바토스가 전하를 죽인 것은 아닙니다.”

    “회복약?”

    “포도주에 섞어두었지요.”

    회합이 열리기 전부터 무도회장에서 바르바토스는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것이 회복약이었는가. 거의 집착에 가까운 철두철미함에 바알은 쓴웃음이 짙어졌다.

    “더더욱 아리송하구나. 헌데 어찌하여 바르바토스가 본인을 꿰뚫은 장본인이 아닌가?”

    “바알 전하께서는 어떨지 모릅니다만, 심장이란 게 그리 간단하게 재생되는 부위가 아닙니다. 고위 마왕이라도 심장이 파괴되면 꽤나 많이 아픕니다.”

    단탈리안이 우습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림자에서 대검들이 추가로 솟아났다. 살점이 잘리는 소리와 함께 바알의 몸에 대검들이 꽂혔다. 반면에 아까 전에 공격했던 대검들은 도로 그림자에 가라앉았다. 번갈아가면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으음, 하고 바알이 신음했다. 잡담을 떠들며 최대한 체력을 회복해볼까 싶었는데 빈틈이 전혀 없었다.

    “데이지. 자르세요.”

    “예, 아버님.”

    인간 소녀가 칼을 내리쳤다. 싹둑, 하고 바알의 오른손 팔목이 잘렸다. 마왕이 쥐고 있던 파마의 대검이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혹시나 모를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무기까지 빼놓은 것이었다.

    바알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버님이라고?”

    “양녀입니다. 전하와는 전생에 인연이 적지 않은 아이니까 귀여워해주시길. 물론, 귀여워하신다고 해봤자 얼마 시간이 남지도 않았지만요.”

    단탈리안이 파마의 대검을 걷어찼다.

    “이야기로 되돌아갈까요. 바르바토스가 제법 멀쩡한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소환수를 자유자재로 부릴 정도로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죽음의 기사들이 기습할 수 있었느냐…….”

    단탈리안은 재차 손뼉을 쳤고, 대검들이 다시금 바알의 육체를 난도질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애초부터 저에게 지배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

    “무도회장에 잠복한 죽음의 기사 사백예순일곱 기 중, 바르바토스에게 기생한 마물은 겨우 예순일곱 기.”

    그가 빙그레 웃었다.

    “나머지 사백 기는 전원 저한테 복속되어 있었지요.”

    바알이 아아, 하고 야트막하게 탄성을 흘려보냈다.

    “본인을 속였군.”

    “예에. 무얼, 자책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죽음의 기사라면 모두 바르바토스의 친위대라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혓바닥 놀리는 것만큼은 일품이로다.”

    바알이 웃었다.

    “무투파 마왕들이 본인을 공격할 때, 인형들이 급습할 때, 마법이 퍼부어질 때……만일 그때 죽음의 기사들이 협공함으로써 본인을 계속해서 괴롭혔더라면 본인이 패배했을지 모른다. 적어도 손쉽게 승리하지 못했을지언저.”

    그 가능성을 전부 무시했다. 끝까지 죽음의 기사가 무력화된 것처럼 가장했다. 오로지 하나의 완벽한 순간만을 노렸다.

    단탈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어쩌면 패배했을지 모른다는 건 어쩌면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얘기 아닙니까. 전하께선 서열 제1위이십니다. 만전에 대비해야 마땅하지요.”

    와이번들이 위에서 강습해옴으로써 시선을 위쪽으로 고정시켰다. 인간의 소녀가 공격하여, 바알의 대검을 한 순간이나마 붙들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바로 그틈에 죽음의 기사들은 침묵을 깨트리고 기습했다.

    단탈리안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서 귓가에 속삭였다.

    “이건 비밀입니다만, 사실 마왕들이 좀 죽어나갈 필요도 있었습니다. 저보다 강한 마왕은 되도록 적으면 적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크흐흐.”

    결국 바알 본인조차 이용되었다는 얘기였다.

    서열 제72위인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인 자도 단탈리안이고, 서열 제1위인 자신을 바알을 죽일 자도 단탈리안이다. 앞으로 마왕군은 틀림없이 눈앞의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가겠지. 그가 지배하는 난세에는 인의도 전사의 신념도 없을 것이다…….

    “그대 같은 자에게 죽는 것이 나 바알의 운명이었던가. 허나, 단탈리안이여. 이것은 네놈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위업이 아니도다. 본인을 죽이기 위해서는 모든 마왕들을 동원해야만 했음이라.”

    바알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나 바알의 오천 년 생애는 그처럼 무거웠다. 필멸자로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일찍이 이만한 최후를 맞이한 자가 있었는가. 없다. 없을 것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회색의 하늘이.

    배고픔에 굶주려 하염없이 올려다본 하늘이 펼쳐졌다.

    마계는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대지였다. 단지 생존하려고 발버둥쳤다. 강한 자가 한끼 식사를 더 먹는 것이 당연했으므로, 모든 마인은 강자가 되고자 했으며, 바알 역시 그러한 마인이었다.

    죽여나가고 또 죽여나가는 가운데 바알에게는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만일 내가 의미없이 죽어버리면, 지금까지 나에게 수없이 죽어나간 생명들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게 되는가?

    빵 한조각을 먹기 위해서 어미와 어린 딸아이를 죽인 적도 있었다.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가족을 냉혹하게 학살했다. 더 이상 아비규환과 같은 싸움을 멈추고 화해의 길로 나아가자던 설교자를 죽인 적도 있었다. 자신의 검에 죽은 전사들은 하나같이 위대했으며 또한 고귀했다.

    그런 자들을 먹어치우고 자신은 살아 있었다.

    ――의미없는 죽음은, 결코 용서되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바알은 자신의 죽음을 찾아 해맸다.

    바르바토스는 모든 마인이 행복하게 사는 세계를 부르짖었다. 그 정도 무게의 이상을 짊어진 자라면 자신을 죽일 가치가 있었다. 파이몬은 종족을 뛰어넘어 모든 이성적 존재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를 꿈꾸었다. 역시 자신을 죽일 가치가 있었다.

    비록 단탈리안의 계략이 주된 역할을 맡았다 해도, 결국 자신을 죽인 것은 모든 마왕들인 셈이었다.

    바알은 이 죽음을 기껍게 받아들이고자 했다.

    “만족하신 듯하군요.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바알?”

    그러나 기다려도 상대방은 자신의 목을 베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여기서 제가 전하를 죽이면 곤란합니다. 졸지에 바알을 죽여버린 마왕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주목을 받게 되면 아무래도 피곤하지요.”

    “……무슨 소리이냐?”

    “그만한 위험부담을 무릅쓸 만큼 당신의 목이 매력적이지는 않습니다.”

    바알이 눈을 뜨자, 그곳에는 비릿하게 미소를 짓는 단탈리안이 서 있었다.

    “저는 '새로운 황제'를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조차 이렇게 죽은 것입니다. 제가 무소불위의 위치에 올라서더라도 어찌 그 권좌가 천 년을 가겠습니까? 저는 그저 가늘고 길게 살면 족합니다.”

    “…….”

    바알은 처음으로 분노를 느꼈다.

    녀석은 바알의 죽음에 별다른 가치가 없노라고 단언한 것이었다.

    “네놈…….”

    “한 가지 사실을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당신이라는 절대적인 강자가 없어진 이상, 마왕군은 본격적으로 내부다툼에 돌입할 것입니다. 아가레스도 반쯤 불구가 되었습니다. 당신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훗날을 경계할 필요가 격감해버렸지요.”

    단탈리안이 소리를 죽여 웃었다.

    “무척 안타깝게 되었군요, 바알. 당신이 그리도 열망하던 투쟁과 전쟁은 역설적으로 당신이 죽은 다음에나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당신은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

    “그렇다고 절 원망해도 곤란합니다. 어차피 그대로 있어봤자 인간 따위한테나 죽었을 텐데, 오히려 저한테 죽어서 천만다행이지요. 음. 감사를 받아도 모자랍니다.”

    단탈리안이 귓속말을 건넸다.

    “개새끼한테는 개 같은 죽음이 어울리는 겁니다.”

    그리고 단탈리안은 마왕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동지 여러분! 제2차 월맹군을 파탄내고 그 이후의 월맹군까지 실패하도록 유도한 장본인, 마왕 바알은 패배했습니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모든 마계인의 염원을 깔아뭉개던 반역자 중의 반역자가 이제 처단될 순간입니다.”

    그러나, 하고 단탈리안이 말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바알을 처단한다면 그 사람 홀로 바알을 처치한 영웅으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비극적인 결말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알은 어느 한 사람의 반역자가 아니라 말했다시피 모든 마족의 반역자이기 때문입니다.”

    단탈리안은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러므로 바알은 반드시 우리 모두의 손에 처단당해야 마땅합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우리는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하나 된 마계 그 자체를 원합니다. 여러분께서 만약 마인들을 대표한다고 자부하신다면, 여러분께서 진정한 의미로 만마의 왕이라 여기신다면――부디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단탈리안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새로운 시대를!”

    그는 주저없이 단검을 바알의 어깨에 쑤셔넣었다.

    “투쟁과 경쟁, 피, 학살로 점철된 구시대가 아니라, 단지 화합과 평화, 공존, 무엇보다 모두를 위한 새로운 시대를.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들의 두 손으로 열어재끼는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마왕들이 서서히 다가왔다.

    처음에는 바르바토스였다. 그녀는 여전히 힘겨운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으나, 전투대낫을 소환하여 바알의 허벅지를 찍었다. 파이몬은 반쯤 슬픔으로, 반쯤 회한에 잠겨 바알의 오른쪽 귀를 베었다. 가미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싱글거리며 바알의 가슴을 도려냈다.

    사냥개들한테 살점이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뜯어먹히듯이.

    ‘아아…….’

    푸욱, 푹, 하고 육체를 찢어대는 감촉을 느끼며 바알이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나선 이는 서열 제3위의 마왕 바싸고였다. 바싸고는 평소부터 바알을 추종하던 자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렇기에 바알의 측근이라는 누명을 벗어던지기 위해서라도 이 살인극에 참여해야만 했다. 더 정확하게는 단탈리안이 바싸고를 그리 부추겼다.

    바싸고는 얼굴이 공포와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귀공자라 불리는 그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바싸고가 장검을 치켜들어 자신의 목을 향해 휘두르는 광경이, 바알의 두 눈에 느릿느릿하게 비추었다.

    ‘이것이 나의 죽음인가.’

    그리고 모든 것은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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