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70화 (270/510)
  • 00270 반역하는 자  =========================================================================

    *  *  *

    어디까지가 전투인가. 어디서부터 전쟁인가.

    그 경계선은 생각보다 뚜렷하다. 하지만 만약 전투에 뛰어든 병사 하나하나가 일개 전력에 지나지 않고, 국가 하나에 버금가는 제왕으로만 이루어진다면――얘기는 전혀 달라지겠지. 칼날의 부딪힘 한번은 하나의 쟁쟁한 전투로 승화되며, 결투는 전쟁의 영역으로 펼쳐진다.

    “좋다. 왕들이여.”

    그리하여, 지금 이 자리에 선 마왕들은 한낱 사람이되 또한 왕국 그 자체였다.

    “본인은 선전포고를 기쁘게 받아들이나니.”

    이에 대응하여 두 발로 굳게 선 자 역시 한 명의 마왕. 오천 년이라는 유구한 세월 동안 단 한번도 무너진 적 없는 제국이었다. 마왕 바알은 오른손에 낀 장갑을 벗어 던졌다. 풀썩, 하고 검은색 장갑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무려 마흔일곱 명의 마왕들.

    그리고 한 명의 마왕.

    “친애하는 동지들이여――전쟁을 시작하자.”

    첫 번째 라운드가 시작했다.

    먼저 다섯 명의 무투파 마왕이 달려들었다.

    마왕들은 미리 정해둔 포지션에 따라 다섯 갈래의 방향에서 다섯 갈래의 돌풍이 되어 질주했다. 대장은 서열 제12위의 시트리. 오직 단신의 무력만으로 서열 10위권에 올라선 괴물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투입되면 공조가 번잡해지며, 지나치게 적은 인원이 투입되어도 바알을 상대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엄선된 다섯 명의 마왕이었다. 그 하나하나가 검의 주인을 아득히 상회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알은 명경지수처럼 고요한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울부짖어라, 월천(月天).”

    대검에 새겨진 열하나의 고유마법 중 하나가 발동되었다.

    단순하고 우직하며, 오로지 동물적인 감각으로 하늘과 땅을 요동시킨 붉은 용족의 고유마법. 효과는 극히 간결했다. '무기'라는 개념을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일도양단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절대적인 효과였다.

    시트리가 채찍처럼 휘두른 사복검(蛇腹劍)은 마치 종잇장처럼 잘려나갔다. 장검과 장창, 언월도가 간단하게 파괴되었다. 마왕들은 얼굴에 경악이 번져올랐다. 아다만티움으로 제작된 최상급의 무구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시트리는 씨익 웃으면서 맨주먹으로 달려들었다.

    시트리가 괴성을 지르며 정권을 날리자, 바알이 아슬아슬하게 한손으로 상대방의 주먹을 쳐냈다. 찰나의 빈틈이 생겨났다. 나머지 네 명의 무투파 마왕도 예정대로 공격했다. 사방에서 맨주먹이 파상공세를 쏟아부었다.

    “훌륭하다. 격투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싸움일지어니.”

    바알이 대검을 휘두르며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대들의 몸뚱어리 역시 일개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

    마왕들의 허리가 일격에 절단되었다.

    핏물이 대량으로 튀었다. 허리가 절단된 마왕들은 비명을 지르며 속절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오로지 시트리만이 짐승과 같은 후각으로 반발자국 앞서 위험을 감지했으며, 덕택에 겨우 왼팔 하나만을 희생하여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다릴 틈도 없이, 두 번째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 콰르르릉!

    무도회장의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미리 천장에서 매복하고 있던 인형들이 뛰어내린 것이었다. 인형의 숫자는 첫 번째 라운드보다 열 배가 많은 오십 체에 이르렀다.

    단지 전투를 목적으로 제작된 인형들. 흡혈귀인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삼천 년에 걸쳐서 손수 만들어낸 살육기계였다. 마왕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만으로 만들어진 병기들은, 자아가 전무하기에 마왕의 지배력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마왕에게 배신당한 소녀가 필사적으로 고안해낸 대(對)마왕전용 살인병기.

    인형들은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로 저마다 날카로운 무기를 꼬나쥔 채 낙하하였다.

    “과연. 인형술사가 개입했는고.”

    무너져내리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바알이 감탄했다.

    자그마치 오십 체의 인형을 제작했다는 것도 대단했으나, 그것들을 한꺼번에 조종한다는 것은 가히 기예라 칭송할 만했다. 인형술은 마법보다 익히기 어려웠다. 지극히 비효율적인 분야였다. 이 정도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피가 서린 노력이 필요했으리라.

    무엇보다 공격 순서가 재미있지 아니한가.

    첫 번째는 순수히 무투파 마왕들이 공격했다. 여기에 바알은 적룡의 고유마법을 발동했다. 그 다음, 상대편은 인형들을 투입하였다.

    설령 바알이 인형들을 일도양단할지라도, 생명이 없는 인형들은 팔다리가 잘리든 몸이 부서지든 상관없이 거머리처럼 달라붙겠지. 모처럼 강력한 고유마법이 쓸모없게 된다. 철저하게 공격 순서가 계산되어 있었다.

    마치 이쪽이 가진 무기의 효과를 간파하고 있는 것처럼.

    ――단탈리안.

    그 이외에 이런 전술을 짤 인물이 없다.

    바알은 깊숙한 내장에서 흥분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했다. 이것은 단순히 마흔일곱 명의 마왕과 한 명의 마왕이 벌이는 전쟁에 불과하지 않았다. 화려하고 과격한 결투 너머에서 바알과 단탈리안, 두 총사령관이 체스를 두듯이 서로의 수를 가늠하고 있었다.

    장기말로 올라선 것은 다름 아니라 지고지순한 마왕들.

    도대체 얼마나 호화로운 체스판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 거룩하고 호사스러운 체스판에 어울려주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

    “――반(反)마법 해제.”

    바알은 자신의 망토에 걸린 반마법을 해제했다. 거의 모든 마법을 무효화시켜줄 정도로 강력한 장비였지만, 그 대가로 바알이 마법을 쓰는 것 또한 봉쇄하고 있었다. 이제 봉인구가 풀린 바알은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며 영창했다.

    “사람이란 본디 하나의 목숨만을 짊어질 따름이라.”

    폭발적인 마력이 바알을 중심으로 터져나갔다.

    그것은 순수한 마력이었다. 바알은 비록 마법사로서 경지가 낮았으나, 그저 마력을 폭발시키는 것만으로 대마법의 위력을 낼 수 있었다. 오십 체의 인형이 풍압에 휘말렸다. 살인병기들은 천장과 함께 송두리째 산산조각나며 날아갔다.

    세 번째 라운드.

    “정령이여. 시원적이며 무법적인 자연이여.”

    천장이 소멸되는 것과 동시에, 서열 제4위, 가미긴이 영창을 읊었다.

    아름다운 금빛 아우라가 가미긴의 몸을 환하게 밝혔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사 계열의 마왕 스물한 명이 합창대처럼 한 목소리로 마법 발동구를 노래했다. 이들은 전투가 벌어진 직후부터 대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둠을 어둠으로――.”

    “고유한 의지를 고유한 의지로. 질료를 질료로.”

    “재를 재로 돌려보내소서.”

    수백의 마법이 바알을 향해 쇄도했다.

    “크하하하하!”

    자신에게 태풍처럼 몰아닥치는 갖가지 마법을 쳐다보며 바알이 파안대소했다. 뇌우와 같은 괴음이 울리고, 니블헤임의 궁전이 무너져내리는 가운데, 바알은 참을 수 없어 어린애처럼 웃었다.

    역시나 훌륭했다. 반마법을 풀어재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이 쏟아지지 않는가.

    단탈리안은 실로 완벽하게 시나리오를 짜놓고 있었다. 당신에게 진상하는 선물이라고 단탈리안은 말했다. 이런 선물이라면 몇 번을 받아도 질리지 않았다.

    바알이 대검을 치켜들었다.

    “찢어발겨라, 화락천(化樂天).”

    또 하나의 고유마법이 발동되었다.

    사악하고 교활하여, 어느 부족보다 간교한 마법사에 어울리는 푸른 용족의 고유마법이었다. 붉은 용족의 고유마법이 '무기'를 일도양단한다면, 푸른 용족의 고유마법은 모든 '마력'을 베어버리는 것.

    바알은 사방에서 빠르게 조여오는 마법들을 향해 한 번, 두 번, 총 세 번의 칼질을 휘둘렀다. 첫 일격이 칼바람을 날리며 절반의 마법을 무효화했다. 다음 일격에서 나머지 절반의 마법이 증발했으며, 마지막 일격은 마법사 계열의 마왕들에게 쏟아졌다.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직격탄을 맞은 일곱 명의 마왕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고유마법에 일시적으로 마력이 모조리 절단난 것이었다. 마력이 폭주를 일으키며 마왕들의 내장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압도적이었다.

    단탈리안과 바알은 벌써 세 번의 격전을 주고받았으나, 저쪽의 전력은 빠르게 소모되어가는 반면에 바알은 끄떡없었다.

    만약 바알이 약간이라도 당황했거나 흥분했으면 단탈리안이 준비한 수에 휘말렸겠지. 하지만 바알은 단지 기쁘고 평온한 마음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이제 바르바토스가 매복해놓은 소환수도, 무투파의 일제공격도, 인형의 인해전술도, 마법 계열의 집중사격도 좌절되었다.

    더 이상 어떤 수가 남았다는 말인가.

    그리고, 네 번째 라운드.

    “음……!”

    바알이 위쪽을 쳐다보았다.

    천장이 사라져 저녁하늘이 펼쳐진 그곳에서 거대한 물체 수백 개가 유성우가 되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오백 마리로 이루어진 와이번 부대였다. 거대한 용족이 오직 중력에 몸을 실고 바알을 향하여 활공했다.

    “육탄공격인가!”

    이른바 자살부대였다.

    바알이 고유마법을 담아 칼날바람을 쏘아 올려보았으나, 와이번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강했다. 미리 반마법을 걸어둔 것이었다. 바알은 상대의 용의주도함에 경탄했다.

    여기서는 견디자.

    바알이 최대한 피해를 막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물경 오백에 이르는 와이번들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노예각인을 맺어둔 와이번들인지 자신의 지배력에 통제되지도 않았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치명적이지 않다.

    와이번에게 직격당하더라도 바알은 너끈히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울부짖어라, 월천.”

    고유마법을 붉은 용족의 것으로 변경해두었다.

    와이번들이 자신에게 떨어지기 직전, 녀석들의 몸뚱어리를 양단할 속셈이었다. 충격이 아예 사라지진 않겠지만 격감해버릴 게 확실했다.

    아마도 단탈리안은 자신이 이전의 공격들에서 어느 정도 피해를 입으리라 예상했으리라.

    무투파 마왕에게 약간이나마 상처를 입고, 인형들에게 피해를 입으며, 마법에 어느 정도 기력이 소모될 것이다. 바로 그때 마무리 공격으로 와이번 자살부대를 동원한다…… 그 정도 계산이었을까.

    더없이 훌륭하게 계산된 전술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빴다.

    ‘허나 본인의 대적자가 되기에는 적이 충분하노라.’

    와이번이 쇄도해오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바알이 미소를 지었다.

    태생이 불쾌하고 천박한 인물이라 여겼다. 그 생각은 지금에 와서도 변함이 없지만, 불쾌하고 천박한 인물일지라도 얼마든지 자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이었다. 새롭게 깨달은 사실에 바알은 기뻐했다. 따라서 바알은 지금 이곳에서 자신이 승리를 거두어도 단탈리안을 처단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만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가미긴 정도는 처단해두어야 좋겠지.

    단탈리안의 애인들이라 들었다. 사랑하는 애인들이 죽었을 때 단탈리안은 끝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오직 복수만을 위한 삶을 결심할 게 틀림없었다. 녀석의 가열찬 복수와 한바탕 놀아나는 것은 필히 즐거우리라.

    계획이 완성되었다. 아울러 와이번이 코앞까지 몰아닥쳤다.

    바알이 대검을 휘둘렀고, 와이번들은 속절없이 양갈래로 나뉘어 속내장을 빗물마냥 쏟아내렸다. 바알이 미소를 지으며 승리를 확신한 그때, 와이번이 흘린 핏물과 함께, 무언가 작은 것이 자신을 향하여 내리꽂혔다.

    그것은 흑발을 휘날리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인간의 아이?’

    바알이 허를 찔려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강대한 마왕이라도 인간의 심리는 읽어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바알은 미처 인간이 와이번에 타고 있는 것을 사전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것이 단탈리안이 마지막으로 숨겨둔 비수였을까.

    “흐음!”

    바알이 서둘러 소녀의 일격을 대검으로 막았다. 어린 인간, 게다가 소녀임에도 놀랍게도 공격이 묵직했다. 과연 단탈리안이 최후에 숨길 만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바알은 허를 찔렸다고 해서 순순히 당해줄 만큼 약한 자가 아니었으며, 소녀가 내리친 장검은 간발의 차로 막혔다.

    바알이 인자하게 물었다.

    “인간의 아이야, 무모하구나. 어찌 가장 강대한 이들의 전장에 소녀가 나섰느냐.”

    “…….”

    소녀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바알이 소녀를 몸째로 날려보내려는 순간이었다.

    어떠한 예고도 없이――장갑이 깨지고, 살이 찢어지며, 뼈가 아스라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

    바알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수십 자루의 흑색 대검이 자신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칼날에 시커먼 핏물이 묻어 흘러내렸다. 바알은 마치 다른 이의 몸을 살펴보듯이 검들을 따라 아래로, 더욱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대검들은 바알의 그림자에서 솟아나 있었다.

    바로 가장 처음에 무력화시켰다고 생각한 죽음의 기사들이었다.

    “……으음. 어째서.”

    의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결코 질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림자에서 또 다시 수십 개의 칼날이 솟구쳤다. 오른팔과 왼팔이, 허벅지가, 복부가, 심장에,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부위에 대검이 파고들었다.

    와이번이 추락하여 피어낸 먼지구름으로 발걸음이 들려왔다.

    뚜벅, 하고 발걸음은 바알의 바로 앞에 멈추어섰다. 이윽고 손뼉을 치는 소리까지 울렸다.

    “가공할 만한 무위였습니다, 바알 전하. 감탄스럽군요.”

    단탈리안이 마치 전투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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