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69화 (269/510)
  • 00269 반역하는 자  =========================================================================

    웃음소리가 공기를 뒤흔들었다.

    “흐하, 크흐으, 흐하하하하――크하하하하!”

    기나긴 시간 동안 묵혀오고 또 묵혀온 것, 뱃속에 웅크리기만 했던 그것이 구렁이 같은 식도를 역류하여 단숨에 터져나오고 있었다.

    “본인에게 그리 말한 자가 대체 얼마만인가! 좋구나! 호사로다!”

    그것은 광기였다. 불길한 웃음소리가 두개골의 깊숙한 곳을 세차게, 몇 번씩이나 때렸다. 마왕들이 얼이 빠진 얼굴로 바알을 쳐다보았다. 웃음소리는 아무런 예고 없이 멈추었다.

    “오호라, 실로 오래된 기다림이었나니.”

    바알이 그리움이 가득 담긴 눈초리를 얼마간 허공에 걸어두었다. 근엄한 표정만 지을 줄 알던 얼굴에 봄바람과 같은 자애심이 스쳐 깃들었다.

    단탈리안 역시 목소리가 상냥했다.

    “당신의 예상보다 길게 이어진 모양이군요.”

    “그날로부터 이천 년을 기다려야 했음을 본인이라고 어찌 알았겠는가? 필멸자는 어리석음으로 시간을 수놓아야 하나니. 신들께서는 자만을 용서하지 않는다.”

    바알이 상대방을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의외의 인물이며, 의외의 결말이다. 희극적인 무대를 끝내고 새로이 막을 올리는 자가 네놈 같은 작자였을 줄이야. 이것 또한 신들께서 본인에게 되돌려주는 응보일진저.”

    “저 같은 소인배가 전하의 유희를 끝내어 송구스럽습니다.”

    단탈리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세상에 여전히 전하가 예상하지도 짐작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 아니겠습니까? 실례하오나, 오히려 축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옳다. 본인은 한없는 기쁨을 맛보고 있노라.”

    두 사람은 온화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다른 마왕들에게 거의 불가사의하게 비추는 풍경이었다. 마치 오랜 친우가 잡담하는 모습이지 않는가.

    “어느 마왕이 전하의 권태를 종결내리라 예상하셨습니까?”

    “파이몬이라면 능히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다 점쳤노라. 허나 실낱 같은 희망이었다.”

    바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는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사태에 대응하는 데 따를 자가 없으나, 사건의 원인을 감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글렀다. 마르바스는 문제를 해결하고 조정하는 데 제일이나, 문제의 원인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으므로 적절치 않았다. 나머지는 논외였지.”

    바알이 무도회장 저편에 서 있는 바싸고를 실눈으로 노려보았다.

    “본인은 마왕들을 분노시킬 목적으로 서열이라는 체계를 공식으로 만들었다. 어째서 내가 서열이 낮은가. 어째서 다른 이의 서열이 나보다 낮은가. 그렇게 투쟁심을 불러일으킬 셈이었다만…….”

    “오히려 마왕들의 순위를 고정시켜버리는 효과가 나타났군요.”

    “아아.”

    바알이 길게 탄식했다.

    “하위의 마왕이 상위의 마왕을 존중하는 관습이 당연하다는 듯 굳었도다. 저 바싸고처럼 아예 순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다지는 부류도 생겨났지. 쓰레기 같은 작자이다.”

    바싸고가 움찔거렸다.

    단탈리안이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아예 처음부터 전하가 저질렀음을 밝혔더라면…….”

    “우문이구나. 그래서야 본인이 저질러서 본인 스스로 끝내는 연극이 되어버리지 않는고.”

    바알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싱거운 결말을 바래서 자행한 것이 아니다. 본인은 본인보다 강하고, 현명하며, 고귀한 이와 싸우다 죽기를 열망한다. 스스로 알아내지도 못해서야 곤란할 따름이라!”

    “음. 전사는 자신을 죽인 자의 가치에 의해서 자신의 가치 또한 결정된다…….”

    “바로 그것이다.”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기지 마.”

    반쯤 어둠에 잠긴 회장의 구석에서, 바르바토스가 얼굴을 분노로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간신히 화를 참으며 또박또박 말을 뱉어냈다.

    “웃기지 마, 아저씨……댁이 그 빌어먹을 보급선을 끊었다고……?”

    “그렇다.”

    바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탈리안은 한숨을 쉬고 바알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그러자 바알이 웃으면서 계속하여 말했다.

    “책임자로 보급을 담당하던 세 명의 마왕을 격살한 것 역시 본인이었니라. 기사단이 습격한 것처럼 위장하느라 적이 고생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구나.”

    “팔만의 병사가 칼질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굶어 죽었어!”

    바르바토스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울부짖었다.

    “네 개자식 때문에 팔만의 병사가……!”

    “실로 슬프구나. 비극적인 일이다.”

    바알이 말했다.

    “헌데, 바르바토스여. 순수한 전사여. 자뭇 궁금하여 질문하는 것이다만……그렇게 슬프고 분하다면, 왜 지금 당장이라도 본인에게 복수하지 않는 것인고?”

    “……!”

    그 순간, 바르바토스가 화살처럼 질주했다.

    그림자에서 검은 액체가 용솟음치더니 바르바토스의 주변으로 넓게 폭발했다. 사방으로 펼쳐진 그림자에서 수십 개의 대검들이 튀어나왔다. 대검들은 거대한 양날개가 되어 오직 바알을 향하여 쏟아졌다.

    단 일 초의 공방이었다.

    바알이 망토를 펄럭이며 한 바퀴를 도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 양손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반원을 그리며 자신에게 쇄도하는 대검들을 베었다. 대검들은 마치 유리로 이루어진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서 흩날렸다.

    바알의 검날은 그대로 바르바토스의 오른팔을 절단했다.

    “크아아아악――!”

    바르바토스가 절규하며 그녀에게 남은 왼팔로 전투대낫을 휘둘렀다. 그러나 기세를 잃어버린 일격은, 바알이 가볍게 대낫의 옆구리를 쳐내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버렸다.

    “바르바토스여, 본인이 누누이 충고하지만.”

    균형을 잃어버린 바르바토스의 몸을 향하여 바알이 주먹을 깊숙히 찔러넣었다.

    주먹은 여린 소녀의 가슴을 정통으로 후려쳤으며, 신체를 꿰뚫고 반대편으로 튀어나왔다. 샛붉은 심장이 주먹에 쥐어져 있었다. 컥, 하고 바르바토스가 헛숨을 내뱉었다.

    “끄윽, 흐끄으윽……흐윽!”

    바르바토스가 형편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왼손으로 가슴에 뚫린 구멍을 막으며 신음했다.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고통에 바르바토스의 몸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녀 주변으로 피웅덩이가 점점 넓게 퍼졌다.

    “자네는 부하와 관련해서 너무 감정적이게 나오는 것이 문제이다. 진정으로 부하를 생각하면 도리어 상시 냉정해야 할지어다. 왜냐한고 묻는다면…….”

    바알이 손에 든 심장을 가볍게 짓뭉갰다.

    푸덕, 하고 김 빠진 소리가 나며 소녀의 심장은 검붉은 덩어리와 핏물이 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대장이 자칫 상처를 입을 경우 부하들마저 폭주하기 때문이요.”

    벨레드와 제파르가 동시에 자리를 박찼다.

    벨레드는 괴성을 지르며 도끼를 내리꽂았고, 제파르는 소리없이 창을 휘둘렀다. 바알이 바닥에 널브러진 바르바토스를 발로 걷어찼다. 바르바토스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공중에 떠오르자, 일순 벨레드와 제파르의 시선이 멈칫했다.

    “적잖게 유용한 인질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알이 벨레드에게 달려들었다.

    벨레드가 상대의 의도를 깨닫고 서둘러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바알은 정확히 양손대검을 상대방의 어깨에 찔러넣고 있었다. 벨레드는 오른팔이 어깨부터 잘려나갔다.

    그에 반해 제파르는 현명하게 대처했다. 바알이 벨레드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자마자 몸을 피한 것이었다. 제파르는 바르바토스가 떨어지려는 것을 받아들고 재빨리 후퇴했다.

    바알이 벨레드의 남은 왼팔을 베어내며 호오, 하고 감탄했다.

    “그쪽은 처음부터 바르바토스를 구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는가. 훌륭하구나. 본인이 등에 허점을 내보였음에도 당초의 목적을 변경하지 않다니.”

    “…….”

    제파르가 시린 눈으로 바알을 노려보았다. 제파르는 자신의 망토를 벗어 조심스럽게 바르바토스를 덮었다. 붉은 망토에 덮여 바르바토스는 괴롭게 숨을 헐떡였다.

    “흐음.”

    바알이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가 단탈리안한테 말했다.

    “실례했노라, 단탈리안이여. 왱왱거리는 소리가 아득하여 잠시 정리하고 왔다. 본인의 무례를 너그럽게 용서해주리라 믿는다.”

    “……물론입니다.”

    단탈리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력하시리라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상상 이상이군요. 그 검, 혹여 파마(破魔)의 대검이 아닌지.”

    “호오? 이 무구의 정체를 알고 있었는가.”

    단탈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붉은 용이 열한 개의 용족 부족에 전해지는 고유마법을 전부 때려박은 무구. 소환수를 강제로 역소환시키는 백용(白龍)의 고유마법이 포함되어 있지요. 바르바토스에게는 상극이라 할 만한 무기입니다.”

    “네놈은 실로 박학하구나. 고대에 망각된 무구는 또 어찌 알았을꼬.”

    단탈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회장을 포위한 병력 중에 제일 위협적인 것은 단연 바르바토스의 소환수…… 그렇기에 바르바토스를 먼저 도발하여 유인했고, 더불어 소환수들까지 무력화한 것입니까.”

    “본인은 아가레스처럼 난투를 벌일 자신이 없으니 말이다.”

    바알이 친근하게 웃었다.

    공방이 벌어지는 동안 나머지 마왕들은 바알을 중심으로 포위진을 이루고 있었다. 평원파, 중립파, 무소속, 거의 모든 마왕이 함께 대열을 맞추어 긴장 어린 낯빛으로 빈틈없이 바알을 노려보았다.

    바알이 파이몬에게 시선을 돌렸다.

    “파이몬이여. 그대가 들은 그대로이다.”

    “…….”

    “본인은 그대가 인간계까지 포섭한 강국을 이룩하기를 바랐노라. 그렇기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이라.”

    “……인간과 마인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파이몬은 차게 식은 눈초리로 바알을 노려보았다.

    “소녀에게 그렇게 말씀해주신 분이 다름 아니라 전하였사와요. 전부 거짓말이었나요?”

    “거짓말이라니 적이 섭섭하구나. 본인은 계기를 마련해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대에게는 마음이 약한 구석이 있었지.”

    바알은 안타깝다는 얼굴이었다.

    “지난 월맹군에서 드디어 대성하나 싶더니 마력마저 잃고 추락했다…… 실망했도다. 결국에 그 정도 그릇에 불과했다는 얘기이리라.”

    “바알. 자네는 나에게 각 파벌의 중재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하고 마르바스가 무표정하게 질문했다.

    “하나가 된 마왕군. 하나가 되어 전진하는 군세. 그것을 위한 부탁이 아니었는가.”

    “오래된 친우여, 미안하지만 아닐세. 만약 그러했다면 내 그대 중립파에게 힘을 더욱 더 실어주어야 마땅했겠지.”

    “……파벌이 존재하되, 다툼이 격화되어 지나치게 약화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그러함으로써 바알 자네에게 대적할 만한 힘을 적당하게 비축하도록.”

    바알이 턱끝을 끄덕였다.

    “과연 자네는 현명하네. 하지만 현명한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에 충실한 나머지 바깥을 돌아보지 않는 경향이 있지. 그것이 자네의 오점이었다, 마르바스.”

    “……충고, 고맙게 새겨듣지.”

    바알이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금 단탈리안을 바라보았다.

    “가히 멋진 선물이로다. 단탈리안이여. 네놈을 본인의 대적자로 인정하노라. 허나, 과연 이 자리에서 본인을 격살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마는.”

    단탈리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생각보다 쉬워보이지는 않습니다. 전하께서 지금 걸치고 계신 망토도 살짝 의심스럽군요. 강력한 반(反) 마법이 걸린 특제 망토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정확한 추측이다. 한때 네놈에게 예언의 능력이 있는 것 아닌가 낭설이 떠돌았거늘, 단순히 낭설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로다.”

    “최악의 상황이군요.”

    단탈리안이 바알한테서 멀어지며 말했다.

    “그렇다고 얌전히 전하를 배웅할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눈앞에 놓인 사냥감을 괜히 놓쳐서 나중에 뒤통수를 후려맞는 것입니다.”

    그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이곳에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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