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7 반역하는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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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집에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돌았다.
먼저 회합을 주최한 장본인이 문제였다. 여태까지 회합은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 혹은 그 이상의 서열을 가진 마왕이 열었다.
아무리 평원파의 실세로 급부상했다고 하나 단탈리안은 서열 제71위. 마왕군을 통틀어서 가장 미천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가 감히 발푸르기스의 밤을 개최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아니.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거늘 어찌 이리 무례하게 만행을 일삼는가.”
초대장을 받아든 마왕들 중 몇몇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단탈리안은 비유하건대 졸부와 같았다. 못해도 수백 년을 살아온 마왕한테 요 몇 년 사이 갑작스레 잘 나가기 시작한 단탈리안은 그다지 경탄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봤자 겨우 사오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무엇을 걱정하나? 상위 마왕들이 어련히 잘 처리하려구.”
“콧대 높은 애송이에게 무서운 꼴을 보여주겠지.”
그들은 회합 소집이 자연스럽게 무산되리라 생각했다. 상위 마왕들이 초대를 거부하면 그만이었다. 몇몇 이는 단탈리안이 자기 스스로 정치적인 입지를 떨어트리게 생겼다며 비웃었다.
하지만 사태는 정반대로 돌아갔다.
먼저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가 참석을 밝혔다.
여기까지는 어찌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일이었다.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은 똑같이 평원파에 속해 있으므로. 더군다나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에게 푹 빠졌다는 소문까지 파다했다.
“쯔쯧. 바르바토스가 어쩌다 남자한테 꼬리가 물려가지고…….”
“사랑에 눈이 멀면 아무리 냉철한 사람이라도 망가지는 것이지.”
단탈리안한테 지나치게 빠져버린 나머지 평원파의 수장이 절차와 도리를 망각했다. 몇몇 마왕들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다음으로, 서열 제4위의 마왕 가미긴이 참석 의사를 밝혔다.
“가미긴도 단탈리안과 그렇고그런 사이라고 하지 않나.”
“참 나! 여마왕들은 죄다 머리통이 비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어처구니가 없군.”
“흠, 단탈리안 그놈의 거시기가 물건은 물건인 모양이지.”
마왕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세태가 왜 이리 돌아가느냐고 한탄했다. 서열 제71위가 내건 소집에 응답하다니, 사랑이고 뭐고 운운하기 이전에 자존심이 걸린 사안이었다. 연애 감정에 자존심마저 버린 창녀들…… 그런 뒷담화까지 오갔다.
그리고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가 참석하겠다고 공언했다.
“…….”
“…….”
이때 가서는 비교적 정치에 무관심했던 마왕들조차 느끼기 시작했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바르바토스가 참석했으니 평원파도 전원 나올 테고.”
“가미긴을 따르는 무소속 여마왕이 대충 네 명은 되지 않던가?”
“중립파까지 가세한다는 말인데, 이러면…….”
이러면 벌써 과반수 이상의 마왕이 회합에 참석하게 된다.
아니, 그보다 마르바스가 참석에 응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마르바스는 중립파의 수장으로서 지금까지 발푸르기스의 밤을 주관해온 자. 그가 단탈리안의 소집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열 제9위의 파이몬과 서열 제12위의 시트리가 참석을 밝혔다.
중립파도 아니고 평원파의 실세가 연 회합에 산악파가 참가했다. 누구보다 크게 반발해서 회합에 반대해야 할 세력이 말이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우발적인 회합이 아니다!”
“평원파, 중립파, 산악파, 게다가 가미긴까지 미리 상의하고 들어간 것이다!”
평원파, 바르바토스를 포함하여 열일곱 명.
무소속, 가미긴을 포함하여 다섯 명.
중립파, 마르바스를 포함하여 열 명.
산악파, 파이몬을 포함하여 열여섯 명.
──회합에 참여하기로 예정된 마왕의 숫자가 벌써 마흔여덟.
월맹군 전쟁으로 인하여 현재 마왕은 일시적으로 예순네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회합에 참석하는 인원이 전체 마왕에서 2/3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이들만으로 '새로운 월맹군 원정'을 결의할 수도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참석해야 하네.”
“빌어먹을, 어째서 서열 제71위짜리에게 우리가 휘둘리는 건지…….”
극소수를 제외하고 모든 마왕이 회합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서열 제1위의 마왕인 바알도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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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마왕들이 회합에 참여하면, 보통 그들을 위해 자리를 따로 마련해둔다.
각 파벌의 수장이야 부하들끼리 똘똘 뭉쳐 있으니 제외한다. 서열 제2위인 아가레스는 요새 들어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역시 제외. 그러니까 서열 제1위에서 서열 제10위 중에서 여섯 명쯤은 따로 상석을 두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번 회합에서는 상석 자체가 마련되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그 때문일까. 회합이 열리기 직전까지 니블헤임의 무도회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평원파도, 중립파도, 산악파도, 수십 명이나 되는 마왕이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 파벌에도 소속되지 않은 마왕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불안하게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는 그들도 몰랐다. 다만,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회장 가운데에는 삐적 마른 남자가 한 명.
모두가 침묵하면서도 남자를 힐끔거렸다. 시선이 집중된 걸 모르는 것일까. 남자, 단탈리안은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단탈리안 주변만 마치 또 다른 공기가 감도는 것처럼 차분했다.
문지기가 소리쳤다.
“서열 제3위, 공정의 마왕, 바싸고 님 드십니다!”
회장이 적막한 탓에 문지기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크게 울렸다. 곧이어 대문 사이로 젊은 귀공자가 걸어나왔다.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새하얬다.
“……?”
바싸고는 회장의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간파했는지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이윽고 원래라면 준비되어 있어야 할 상석이 어디에도 없음을 발견했다. 대마왕 바알마저 회장 저편에서 의자 없이 서 있었다.
바싸고는 주변의 마왕들을 둘러본 다음, 차가운 표정으로 단탈리안을 노려보았다. 그가 단탈리안에게 다가섰다.
“예의가 아니로군. 서열 70위 정도 되면 무엇이 기본적인 예법인지 일일이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인가.”
단탈리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옅게 그렸다.
“바싸고 전하 아니십니까.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지요?”
“문제? 문제라고?”
바싸고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모든 것이 문제이다. 네놈이 분수도 모르게 회합을 주최한 것이 문제요, 애송이 놈의 장단에 마왕이란 녀석들이 죄다 놀아난 것이 문제요, 천연덕스럽게 내 질책에 반문한 것이 문제이다. 바르바토스!”
바싸고는 상대할 가치를 찾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바르바토스가 서 있었다. 그녀는 제파르가 따라주는 와인을 덥썩 받아 마시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눈을 껌뻑였다.
“응? 난 왜 불러, 애늙은이 영감.”
“수하를 대체 어떻게 관리했길래 이런 꼬락서니가 벌어지게 방관했는가. 이번 사태를 가만히 넘어가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바르바토스가 포도주를 홀짝였다.
“꼭 내가 뒤에서 조종했다는 말투다? 난 그냥 회합이 열린다니까 참석했을 뿐이야. 착각하지 마.”
“웃기지도 않는군. 세상에는 법도가 있고 절차가 있다. 마인들이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비웃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수하를 제멋대로 놔둔 네 녀석이 책임을 피할 것이라…….”
별안간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왕들이 시선을 돌렸다. 단탈리안이 숨을 죽여가며 웃고 있었다. 이 무례한 행동에 바싸고는 얼굴 표정이 굳었다.
“……네놈.”
“죄송합니다. 바싸고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투가 하도 재밌어서 말입니다.”
“재미있다고?”
바싸고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전신에서 푸른 마력이 나풀거렸다. 당장이라도 회장을 송두리째로 무너트릴 만큼 마력이 짙었지만, 단탈리안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차분했다.
“예. 어찌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바르바토스의 수하라니요? 전쟁에서 부대의 상관으로 모시는 경우라면 또 모를까, 제가 어떻게 바르바토스의 부하이겠습니까.”
“뭐?”
“우리는 말 그대로 마왕입니다. 한명한명이 각자 마인을 대표하는 군주이지요. 바르바토스든 누구든 우리는 결코 우리 위에 황제를 모시지 않습니다. 바싸고 전하, 혹여 무언가를 착각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바싸고가 바르바토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뭐 어떻냐는 얼굴로 씨익 웃기만 했다. 바싸고는 황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싸고 전하. 세상에 법도가 있고 절차가 있다면 오로지 마왕은 그 스스로 존립한다는 것뿐입니다. 서열을 정해두고 자신보다 높은 서열을 황제로 모시는 게 법도라고요? 쓰레기 구정물 냄새가 풍기는군요.”
바싸고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지껄이는구나.”
“모처럼 입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지껄여주지 않으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단탈리안이 웃었다.
“전하께선 착각하고 계십니다. 마인들이 우리를 비웃는다면 서열 제71위가 회합을 개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회합을 개최하는 데 있어 서열이 어떻느니 파벌이 어떻느니, 책임 소재부터 찾는 작태에 신물이 나겠지요.”
“…….”
“솔직히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입니다. 태초부터 어디 마왕에게 서열이 있었습니까? 한낱 인위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인양 떠받들고 있으니 소꿉놀이가 따로 없군요. 마족들이 우리한테 질려버리는 것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바싸고의 어깨가 분노로 떨렸다.
마왕군의 서열은 바알과 바싸고, 두 사람이 정하고 있었다.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곧 바싸고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녕 이 자리에서 피를 보아야 닥칠 속셈이냐!”
“죄송합니다, 바싸고 전하. 제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마인들이 이번 회합을 비웃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만, 글쎄요. 과연 정말로 그럴지 의문이군요.”
단탈리안이 가볍게 손뼉을 두들겼다.
대문에서 일단의 무리가 걸어 들어왔다. 인랑족, 묘족, 호족, 요정족 등, 니블헤임을 대표하는 열여섯 명의 상인이었다. 그 선두에는 쿤쿠스카 상회의 주인,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서 있었다.
“무슨…….”
“니블헤임을 대표하는 시민 여러분입니다. 이번에 발푸르기스 밤을 주최하는 데 여러모로 협력해주었지요. 아무렴 제가 마왕이라고 해서 이 자리를 마음대로 열었겠습니까.”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비롯하여 상인들이 마왕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단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발푸르기스 밤은 우리 마왕군의 행보가 결정될지도 모를 중요한 자리. 마왕군의 행보는 곧 마족의 생명과 직결됩니다. 마족 여러분에게도 발푸르기스 밤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권리가 있지요.”
“…….”
바싸고가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여태껏 인식되지 않은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회장의 왼편. 서열 제13위의 벨레드가 언제든지 튀어나올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회장의 오른편. 서열 제12위의 시트리가 손을 허리춤에 찬 칼잡이에 올려놓았다.
바로 뒤쪽에는, 서열 제4위의 가미긴이 아까 전부터 마력을 발동시키고 있었다.
‘……크으.’
바싸고가 이빨을 갈았다. 벨레드와 시트리는 각 파벌을 대표하는 무투파였다. 거기에다 가미긴은 대마법사. 즉, 가미긴이 마법을 발통하여 자신의 발을 묶는 틈을 노려서 두 무투파가 공격해올 형국이었다.
심지어 니블헤임을 주름잡는 대상들까지.
――어디 한번 허튼 짓을 해보라. 세 명의 마왕이 동시에 공격하는 걸 막을 자신이 있다면. 더 나아가, 당신이 저지를 추태가 온 마계사회에 퍼져도 상관없다면.
단탈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문득, 바싸고 머릿속에 아가레스가 떠올랐다. 여기에 아가레스가 자리했다면 무투파 마왕을 전부 무시하고 한바탕 난동을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가레스는 다름 아니라 눈앞의 단탈리안, 그리고 평원파-중립파-산악파의 연합군에 격파되어 쫓겨난 것이었다.
만약 3년 전, 아가레스를 쫓아낸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준비였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서로 싸우기 바빴던 파벌들이 연합하였다는 말인가.
“네놈. 도대체 언제부터……!”
“그만하면 되었다, 바싸고.”
그때 뒤편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열 제1위의 마왕, 바알이었다.
바알이 웃음기가 담긴 어조로 말했다.
“단순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했거늘 꽤나 재미난 농단을 부리는구나. 좋다, 단탈리안이여. 그대가 회합을 열어 달성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고.”
바알의 목소리는 마치 무게를 가진 것처럼 바닥에 낮게 깔렸다. 고요함에도 불구하고 회장에서 가장 구석진 곳까지 흘러드는 힘이 있었다. 단탈리안은 그 목소리를 정면에서 받으며 조용히 말했다.
“제가 이번에 발푸르기스의 밤을 개최한 까닭은, 바알 전하. 바로 당신의 죄를 문책하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