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66화 (266/510)
  • 00266 반역하는 자  =========================================================================

    “흐음…….”

    라우라가 책장을 넘겼다. 그녀는 독서할 때마다 저렇게 으음, 하고 소리를 내고는 했다.

    이상한 버릇이라고 생각하여 언젠가 한번 지적했더니 라우라는 ‘내가 책을 이해했다고 나 자신에게 암시를 거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놀랍게도 천재인 그녀조차 책을 한 번만 읽어서는 이해하지 못한다던가. 일종의 기법이겠지.

    “주군. 자유도시들을 거점으로 계속해서 공화주의 사상서적이 나오고 있다.”

    “그렇습니까? 뭐, 그동안 지식인들도 꽤나 억압받고 있었겠지요.”

    이 세계에 공화주의는 낯설지 않다. 단지 발흥할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계속해서 사상가들이 공화주의를 지지해주는 논거를 내뱉어주면 좋겠네요. 그래야 대륙이 혼란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딱 부러지게 하나의 공화주의라고 부르기에는 곤란해보인다.”

    라우라가 옆머리를 꼬았다.

    “애시당초 공화주의가 무엇이냐 자체가 논란이 되는 모양이다.”

    “흐음?”

    “봐라. 이 저자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라우라가 책을 내 쪽으로 펼쳤다. 그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이 공화적 헌정체제를 민주적 헌정체제와 혼동하지 않기 위해 주의가 필요하다.」

    「첫 번째로, 국가 혹은 도시국가는 어떤 종류의 인격체가 국가권력을 소유하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즉, 단 한 사람만이 소유하거나, 몇몇 사람이 연합하여 소유하거나, 아니면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소유한다.――우리는 이를 순서대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로, 국가 혹은 도시국가는 통수권자가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이, 통치의 방식이 어떤가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통치의 방식에 따라서 우리는 국가가 공화주의적인지 전제주의적인지 구분한다.――공화주의는 입법권력과 집행권력(정부)을 분리하는 방식을 뜻한다. 반면에, 전제주의에선 집행권력이 스스로 입법을 행한다.」

    「그렇기에 민주정의 형식은 필연적으로 전제주의이다.」

    “……에엥?”

    입에서 쉰소리가 기어나왔다. 이것이 무슨 참신한 개소리인가.

    내가 라우라한테 책을 넘겨받아 다음 장을 펼쳤다. 읽기 더럽기로 소문난 합스부르크어로 쓰인 문장들이 계속해서 꾸물꾸물 이어지고 있었다.

    「예컨대 정책과 법률 등에 있어 어느 한 사람이 찬성하지 않는다고 해보자. 민주정에서는 모두가 그 한 사람을 무시하고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따라서 모두가 아닌 모두가 결정하게 되며, 이것이 곧 집행권력(정부)을 정당화시킨다.」

    「그리하여 공화주의적이고자 하는 모든 사회에서는 직접적인 민주정이 아니라 반드시 대의적인 정치체계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하지 않을 경우, 입법을 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집행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고, 국가권력은 일개 사적인 소유물로 전락할 것이다.」

    「모든 민주정은 위와 같은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다.」

    「아니, 민주정은 오히려 대의적인 정치체계를 아예 불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만인이 국가의 주인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군주정과 귀족정은 엘리자베트 합스부르크 통령이 “나는 한낱 국가에서 가장 높은 하인일 뿐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대의적인 정치체계의 정신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 적어도 가능하다.」

    「우리는 주장한다. 국가권력을 지배하는 인원이 적으면 적을수록, 즉 달리말해, 국가권력의 대의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도리어 국가는 공화주의에 가까워질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공화주의 국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군주정보다 귀족정에서 훨씬 더 어려우며, 더더욱 민주정에선 오직 폭력적인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네에에?”

    다시 한 번 입에서 쉰소리가.

    너무나도 그럴듯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어 두려웠다. 뭐냐 이거. 겁나게 무섭잖아. 심지어 깨알처럼 엘리자베트 통령이 했다는 말까지 삽입했다. 대놓고 책 뒤에 모종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평범한 인민에겐 국가가 군주정이냐 민주정이냐 따위보다 비교할 수 없으리 만치 통치방식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군주정이든 귀족정이든, 만약 그 국가가 대의적이지 않고 전제적이라면, 인민은 고통에 신음할 것이다. 민주정이어도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국가가 대의적이라면, 즉 국가가 인민의 뜻을 충실하게 대신하고 있다면, 인민은 국가형식이 군주정이든 귀족정이든 민주정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듯이 공화정은 결코 민주정과 똑같은 의미가 아니며, 심지어 두 개는 서로 양립하는 것조차 요원하다. 공화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대의적이어야 하며, 대의적인 통치방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군주정이 가장 적합하다.」

    「단지 '전제주의적인 군주정'에서 군주를 왕 혹은 황제라고 부르는 반면, 우리는 '공화주의적인 군주정'에서 군주를 통령 혹은 대통령이라고 부름으로써, 둘 사이에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둔다.」

    “와우…….”

    원더풀한 개소리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라우라가 재밌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어떤가, 주군?”

    “감탄했습니다. 인간이란 이토록 논리적으로 권력의 개가 될 수 있군요. 훌륭합니다. 단, 자기가 내뱉는 소리가 기껏해야 개가 헉헉거리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불쌍할 따름입니다.”

    사기꾼과 선동꾼의 차이점을 무엇일까.

    사기꾼은 자기가 사기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사기를 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동꾼은 다른 사람을 선동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선동하고 있다.

    나는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 결코 사기를 치는 게 아니다, 나 자신에게 떳떳하다, 나는 옳다……. 그렇게 자기 자신까지 속여버리는 순간, 그놈은 단순히 선동꾼이 되어버린다. 이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악당으로 따져도 하수에 불과하겠지.

    만약 이 세상에 뭔가 옳은 것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부분에 관련해서는 거짓말을 칠 수가 없게 된다. 사기꾼이 사기를 칠 수 없는 지점, 즉 약점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결과는 단순. 그 부분을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다른 사기꾼에게 언젠가 이용당하고 먹혀버린다…….

    사기꾼은 언제나 사기를 치는 사람으로 남아야지,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이 대상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자기 자신에게 사기를 당해서야 어쩌자는 것인가? 논리적인 화법이든 감정적인 화법이든 여하간 볼썽사납다.

    “공화정이든 민주정이든 국가의 권력이 사유화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습군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것을 찾아 해매기 마련입니다. 그건 그저 본성이지요.”

    내가 연초를 꺼내서 물었다. 지독한 향이 폐를 게워내는 것이 느껴졌다.

    “책망할 것도 비탄에 빠질 것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어떻게 인생이 우리의 것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무언가에 의해 낳음을 당했을 뿐입니다.”

    후우, 하고 연기를 뱉었다.

    “그러니 모두 무엇이 자신의 것인지 찾아 나서는 겁니다. 누군가는 얼굴을 자신의 것으로, 누구는 연인을, 누구는 예술작품을, 누구는 재물을, 누구는 아름다운 이상을…….”

    머릿속에 잭이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녀석은 꿈속에서 마주치는 걸로 이미 충분했다.

    “자기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먼지 새끼들이 어떻게든 자신의 두 팔로 아득바득 잡동사니를 긁어모았다가 잠시 후에 사라져버립니다. 잡동사니 중의 잡동사니가 바로 권력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제일 거대한 잡동사니지요.”

    자신이 하는 말에 사람이 죽을 수 있다.

    자신이 정책을 결정하면 수만, 수십만의 인간이 달라붙어 그것을 실제로 이루어낸다.

    “알겠습니까, 라우라? 처음부터 시각이 글러먹었습니다. 권력이 사유화 되느냐 되지 않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권력은 그 자체로 이미 사유화되고, 사유화되어야만 하는 물건입니다. 그놈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아귀처럼 달라붙는 먼지들이 바로 정치꾼이죠.”

    고로, 공화주의는, 어떻게 하면 권력을 더더욱 대의적으로 만들 것인가에 초점이 달려 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권력을 무용지물한 물건으로 만들 것인가에 달린 것이다.

    “예컨대 감사기관들을 두는 게 한 가지 방법이 되겠죠. 기관들이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겁니다. 권력이 독점되지 않게 되도록이면 분산시켜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공화정에는 그나마 민주정이 어울립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한 대로이다. 민주정에서는 모두가 주인이 되려고 나선다.

    결과, 실제로는 아무도 주인이 없는 정치체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각 기관장에 임기를 정해두어야겠죠. 한번 기관장에 임명되면 평생 봉사한다?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야 권력을 자기 걸로 만들지 않는 사람이 도리어 비정상적입니다. 10년도 깁니다. 5년도 너무 길어요.”

    “하지만, 주군.”

    라우라가 가만히 내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에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그중 어느 한 기관이 점점 더 권력을 장악하게 되지 않겠는가?”

    “맞습니다. 임시방편에 불과하죠.”

    담배 연기가 천장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니까 권력 자체가 없어지면 됩니다.”

    “…….”

    “전부 죽여버리면 간단하게 해결되지요. 뭐, 라우라. 우리가 '새삼스럽게' 공화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말한 건 만약 공화주의자가 된다면 그럴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나는 사유화된 권력을 아주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표현해도 좋다.

    권력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나를 대신해서 죽으라고 명령할 수 있다. 지금도 위층 던전에서는 몬스터들이 모험대에 맞서 죽어나간다. 권력이 있으면 부하들이 바라는 바를 대신 들어줄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우리보다 강력하고, 우리를 적대하는 권력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간단해서 좋군.”

    라우라가 웃었다.

    “주군의 말이 맞다. 어떻게 권력을 평화롭고 영원한 형태로 만들 것인가. 이걸 고민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겠지.”

    라우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슬쩍 나한테로 다가왔다. 그녀는 손으로 내 목을 감싸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가볍게 키스했다.

    “허나 주군, 그래서야 너무도 희망이 없지 않는가?”

    “희망은 있습니다. 다만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닐 뿐이지요.”

    “프랑크에서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여왕이 제국을 건설한다고 들었다.”

    내가 라우라의 머리를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부드러운 감촉. 기분이 좋았다.

    “삼 년 전의 복수를 할 때로군요.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주군은 완전히 박살나지 않았는지. 다시 싸워봤자 또 깨질 거다.”

    “음, 맞습니다. 저 혼자서 나댄다면 생드니 평야를 재현할 뿐이겠지요.”

    내가 라우라의 하얀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하지만 저에게는 자칭 타칭 천재 군사 아가씨가 있지요.”

    “호오.”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눈썹을 치켜들었다.

    “소녀한테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인간의 군주, 그리고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왕을 동시에 상대하라는 명령인가?”

    “솔직히 그년들 살아 숨쉬는 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마침 파이몬한테 빚을 만들어뒀습니다. 용이하게 써먹도록 하지요.”

    라우라가 작게 키득거렸다.

    “알겠다, 주군. 소녀는 주군의 검이다. 어떤 왕이 적일지라도 그 목을 베어 주군에게 바치겠다.”

    그해 5월. 니블헤임에서 회합이 개최되었다.

    나, 서열 제71위에 불과한 단탈리안이 전체 회합을 소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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