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65화 (265/510)
  • 00265 그래서 갑은 누구인가?  =========================================================================

    “라우라, 군마(軍馬) 좋아하지? 내가 빈드보나에서 끝내주는 명마 하나 봐둔 게 있거든. 얘가 보통 말이 아니에요. 생긴 것도 깔쌈하게 생겨먹은 게 달리기도 잘 달려.”

    바르바토스가 쩔쩔매면서 라우라의 손을 잡았다. 기생한테 잡혀버린 졸부마냥 선물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그리고 장검도. 이야, 대장장이 시켜서 만든 장검인데 아다만티움 함량이 자그마치 칠 할이야. 씨발 내가 한번 들어봤더니 이건 뭐 검이 아니라 회초리예요. 존나 가벼운데 뭐 사람 뼈다구가 무 썰리듯이 확확 베는 맛이 있더라니까. 라우라가 다 가져.”

    “우와아…….”

    그 꼬라지를 옆에서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바르바토스가 대단해서 경탄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란 이 정도로 추락할 수 있구나, 하는 의미에서 입을 벌린 것이었다. 바르바토스, 너 겁나게 추해…….

    라우라가 여전히 세침데기 각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언니. 제가 지금 선물 받겠다고 언니한테 이러는 것 같습니까?”

    “아니지. 암. 아닌 거 알고 있지.”

    바르바토스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내가 미안해서……응? 아무것도 안 해주면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내 마음 알잖아, 라우라.”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점입가경이로군.

    내 얼굴이 시궁창으로 썩어들었다. 참고로 저편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라피스도, 내 옆에서 다소곳하게 서 있는 데이지도, 다들 얼굴이 시베리아 평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애정 싸움이란 옆에서 지켜보면 추악함 그 자체였다.

    바르바토스와 라우라가 사귀기 시작한 게 대략 일 년쯤이 되어간다.

    바르바토스야 원래 동성애자였다. 게다가 지독한 여성우월주의자이기도 했는데, 남성이란 본디 음식물찌꺼기와 같은 생물이며 오직 여성과 여성만이 순수하게 아름다운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유일한 예외는 나였다. 하지만 나와 사귀는 이유 역시 내가 성별을 뛰어넘어 매혹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음식물찌꺼기 수준을 아득하게 초월하여 쓰레기 중 쓰레기이기 때문이었다. 헛소리에도 정도가 있었지만 아무튼 바르바토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럼 여기서 라우라의 스팩을 살펴보자.

    첫 번째, 일단 아름답다. 소녀 시절을 지나쳐서 이제 막 성인 여성의 계절에 접어든 라우라는 그야말로 한껏 물이 오른 국화.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라우라만큼 예쁜 여성은 글쎄, 기껏해야 한두 명밖에 없겠지.

    두 번째, 똑똑하다. 열여섯 살 때 이미 각종 철학을 통달했고 여섯 가지 언어에 능통했다. 사람이 똑똑하더라도 얼마든지 천박해질 수 있는데 라우라는 경우가 달랐다. 내가 무슨 책을 독파했다느니 언어를 몇 개나 할 수 있다느니, 그런 식으로 자랑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밤기술이 끝내주었다.

    라우라는 성노예 직업 레벨 S를 찍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한가?

    경국지색에 팔방미인인데다 팜므파탈. 가히 나라 하나는 껌값으로 멸망시키고 더 나아가 대륙을 뒤흔들 여걸다웠다. 이런 여아가 대쉬하는데 아무렴 바르바토스라고 함락되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얼굴 반반한 애가 꼬시니까 얼씨구 웬 떡이냐 하고 달려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바르바토스는 라우라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떡을 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밀당에서 바르바토스가 점점 더 불리해지더니 몇 달 전부터 아예 라우라가 주도권을 휘어잡았다. 나도 잘은 모르겠다만, 아마도 둘이서 섹스할 때 라우라가 더 힘든 입장을 맡아주는 것 같았다.

    바르바토스 입장에선 대륙에서 제일 잘난 여자애가 이걸 원하면 이걸 들어주고, 저걸 원하면 저걸 들어주는 셈이었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겠지.

    그러니까 전형적인 낮져밤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언니와 저는 종족과 신분을 뛰어넘어서 마음으로 강하게 이어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약간만 큰 일이 생겨도 침대에 내버려두고 떠나버리는 그뿐만인 관계…….”

    라우라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저는 인간입니다. 노예였습니다. 언니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이미 사치겠지요. 어차피 저는 주군이 성기를 빨라면 네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하염없이 쭈그려 앉아서 빨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

    “다, 단탈리안! 너 그런 짓을 우리 라우라한테 시켰단 말이야!?”

    왜 또 나한테 화살촉이 돌아오는가.

    더군다나 '우리 라우라'라니. 언제부터 라우라가 네 녀석의 재산이 되었냐. 황당무계하고 어이가 없었다. 잘못하면 아주 간이고 쓸개고 죄다 쓸어바칠 기세구만.

    “아니. 거 부하한테 거시기 좀 빨아달라고 시킬 수도 있지, 내가 뭐?”

    “라우라가 어딜 봐서 그냥 부하야! 내 애인이기도 하거든! 성깔 더러운 새끼, 어떻게 내 애인을 성노마냥 함부로 다뤄!”

    “너한테 성깔 더럽다는 얘기 들으니까 진짜 기분 더럽다…….”

    마왕군에서 너만큼 성깔 더러운 여편네가 없어요, 바르바토스 씨.

    “애당초 라우라는 네 애인이기 한참 전부터 내 애인이었어. 애인끼리 물고 빨고 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괜히 쫄리니까 나한테 화 쏟아내기는, 쯔쯧.”

    “아, 좀!”

    바르바토스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나는 깨달았다.

    “라우라가 옛날에 얼마나 지독한 꼴을 당했는지 알면서도, 앙? 주군이란 놈이 방바닥에 앉혀서 펠라나 시키고 말이야!”

    이 녀석, 나한테 화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애걸복걸하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절절함이 묻어나왔다. 제발 장단 좀 맞춰달라며 시선이 말없이 소리쳤다. 입이랑 눈이 따로 놀았다. 자기 혼자서 라우라가 삐진 걸 풀어줄 자신이 없으니 나한테 SOS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우리 라우라 예쁜 엉덩이가 얼마나 차가웠겠어. 그런 것쯤은 다 고려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하여간 단탈리안 네놈은 배려가 부족해, 배려가. 예전부터 태도가 글러먹었어!”

    “…….”

    “자. 어서 라우라한테 사과해! 얼른! 잘못했다고 빌어!”

    내가 볼을 긁었다.

    뭐, 오늘이 약속날인 걸 몰랐던 건 내 잘못이다. 바르바토스가 라우라한테 저렇게 매달리는 광경이 별로 유쾌하지 않은 면도 있다. 한수 접어주자.

    내가 라우라한테 말했다.

    “……바르바토스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제가 잘못한 걸 알겠습니다. 라우라, 미안했습니다. 조금 더 라우라를 배려했어야 하는데. 바르바토스 말이 맞아요. 제가 심했습니다.”

    “흐음. 이제부터 소녀에게 한 시간 이상의 펠라티오를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라.”

    뭐시라?

    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우라는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세상에.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린 것인가. 의도적으로 표적을 나한테로 돌려서, 사죄를 받아내고, 더 나아가 이런 약속까지 따내겠다고……?

    무시무시했다. 너무나도 무시무시했다. 데이지도 그렇고 라우라도 그렇고, 우리 마왕성 여자들은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속이 이토록 새까맣단 말인가!

    “그, 그건 곤란한데요. 아무리 그래도 한 시간이라니요. 오늘처럼 서류로 작업하거나 심심할 때는 아무리 못해도 세 시간은 빨아주어야 제가 심심하지…….”

    “단탈리아아안!”

    바르바토스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지금 라우라가 용서해주겠으니까 앞으로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잖아! 너는 사내 새끼가 되어가지고, 앙? 여자한테 제대로 사과하는 방법조차 모르냐?”

    “…….”

    내가 바르바토스를 노려보았다. 더러운 입과 다르게 무척이나 쌍불한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소리없이 외치고 있었다. 제발, 뭐든지 다 들어줄 테니까 제발 여기선 항복해달라고.

    한숨이 나왔다.

    “……알았습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한 시간 이상 펠라티오를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정리하자면.

    '라우라 > 바르바토스'가 성립함으로써, 우리 마왕군의 서열 순위는 '라우라 > 바르바토스 ≥ 단탈리안 > 그 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배갯머리 송사가 정말 무섭다.

    “음. 감사한다, 주군.”

    라우라가 만족스러워하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바르바토스는 또 좋아 죽겠다는 듯이 표정이 헤벌레 풀어졌다. 완전 어린애처럼 웃고 있었다. 으이구. 저거 빠져도 단단히 빠진 거야.

    라우라가 두 손으로 바르바토스의 손을 잡았다.

    “언니. 언니의 마음을 착각해서 미안해요. 언니는 절 위해서 이렇게나 애써주시는데…….”

    “아, 아니야. 나야말로 그날 말하지 않고 떠나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언니.”

    “라우라!”

    두 아름다운 여인이 서로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어찌나 공기가 화사한지, 당장 주변에서 배경화면으로 하얀 백합이 피어줘야 할 것 같았다. 사람에 따라 감동적인 광경으로 비출지도 모르겠지. 참고로 라피스와 데이지 그리고 내 경우를 거론하자면, 우리는 나란히 썩은 동태눈깔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라. 우린 위층에 시찰 좀 다녀올 테니.”

    두 여인은 이미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이미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겠지만 일단 예의상으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함께 집무실에서 벗어났다.

    집무실에서 나가기 직전, 라피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라우라. 내일 군사훈련이 예정되어 있는 것, 잊지 마시길.”

    “아, 응. 알겠다, 언니.”

    내 작별인사에는 반응하지도 않았던 라우라가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아마 정말로 내일 예정을 까먹어버린 모양이었다. 라피스한테 지적당하고 퍼득 떠올린 것이겠지. 그래서 저절로 기합을 주어 대답했을 테고.

    쿵, 하고 집무실 문이 닫혔다.

    우리 세 명은 집무실에서 빠져나와 대충 지하 10층 던전을 거닐었다. 왜인지 마음이 씁쓸해서 입에 담배를 물었다.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말이야. 서로를 좋아해도 너무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니까.”

    “그렇습니까?”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맞장구쳤다.

    “아아. 두 사람 사이에 딱 경계를 그어놓고 침범하지 않아야 담백한 관계가 유지되거든. 저거 바르바토스 좀 봐라.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라우라한테 전부 요구해버리니까, 역으로 라우라한테 잡혀 살잖아.”

    적당히 요구했어야지.

    “저렇게 잡혀 사니까 얼마나 보기 흉해? 서열 제8위에다 평원파의 수장이어도 연애에서 한번 삐딱하면 끝장인 거야. 음, 라우라가 바르바토스한테 들이댄 것 자체가 의아스럽긴 하지만.”

    나는 사실 라우라한테 동성연애 기질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둘이서 사귄다고 들었을 때도 내 입에서는 에엥? 하는 소리가 튀어나갔다. 동성연애든 뭐든 신하의 청춘사업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만, 라우라는 나한테 그런 낌새를 하나도 보이지 않았거든.

    “혹시 월맹군에서 라우라가 참모할 때 바르바토스랑 몰래 만나기라도 한 걸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은 없습니다.”

    “흐음, 세상엔 신기한 일도 다 있어.”

    따지고보면 라우라와 나는 바르바토스를 사이에 두고 연적이 되어버린 건데, 딱히 라우라가 나한테 심술을 부리는 것도 전혀 없고. 여러모로 신기하다.

    “단탈리안 님. 그보다 중요한 서류가 남아 있습니다.”

    “어? 서류는 집무실에 두고 나왔잖아.”

    “사태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아서 미리 챙겨두었습니다.”

    라피스가 옆구리에 낀 가방을 보여주었다.

    “많이 챙기지는 못했습니다만 두 시간 어치는 됩니다.”

    “으으으, 조금 놀 수 있겠다 싶었는데…….”

    “단탈리안 님의 집무실이 점령되었으니, 제 집무실에서 마저 작업하도록 하지요.”

    라피스가 이견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걸어나갔다.

    나는 시무룩하게 그녀한테 연행될 수밖에 없었다. 뒤쪽에서 데이지가 따라오면서 ‘사실 진실로 군림하는 쪽은……’ 하고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우리 마왕성은 그렇게 대체로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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