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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64화 (264/510)
  • 00264 그래서 갑은 누구인가?  =========================================================================

    잠시 단탈리안 마왕군의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자.

    내 던전이 건축 공사에 돌입한 지 삼 년이 넘어간다. 1층, 지하1층, 지하2층, 지하3층까지 던전이 완벽하게 건설되었다. 나머지도 차근차근 지어지고 있다. 지금도 수많은 고블린과 난쟁이가 연장을 챙겨들고 쉴 새 없이 던전을 돌아댕긴다.

    그중 유독 지하 10층만은 미리 깔끔하게 지어놓았는데, 바로 여기에 나를 비롯하여 단탈리안 마왕군의 핵심 인물들이 거주한다.

    말하자면 지하 10층에 세를 들여놓은 사람이 곧 우리 마왕군의 간부라는 얘기.

    단탈리안 마왕군에서 서열 제1위를 차지하는 자는 물론 나 단탈리안이다.

    “아버님. 홍차를 끓여왔습니다.”

    지하 10층에 마련된 집무실. 그곳에 앉아서 느긋하게 서류를 읽고 있자니, 데이지가 다가왔다. 소녀가 홍차를 내려놓았다. 홍차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맙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독을 탔냐?”

    “이백 년에 걸쳐서 꾸준히 복용하면 뼈가 녹는 독을 섞었습니다.”

    데이지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레미 스승님께 배운대로 무색, 무취, 무미의 조건을 만족시켰습니다. 자신작입니다.”

    “수고했다. 다시 타와라.”

    “예, 아버님.”

    데이지가 홍차를 도로 가져갔다.

    데이지는 저번 달로 열네 살이 되었다. 열 살 시절 이미 꼬맹이 주제에 장난 아니게 묘한 색기를 풍기던 아이였다. 열네 살이 되자 어리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 그러니까 배덕적인 매력을 잔뜩 품은 독사과 같은 소녀로 자라났다.

    “처벌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내 맞은편에서 함께 서류를 보던 라피스가 말했다.

    “단탈리안 님을 독살하려 한 것입니다. 태형으로 다스려야 마땅합니다.”

    “아서라, 저 꼬맹이가 나한테 독살을 시도한 것만 벌써 일흔네 번이야.”

    심장에 새겨진 노예각인 때문에 자그마치 이백 년 동안 꾸준히 먹이지 않으면 쓸모가 없는 독약이나 사용하고 앉았다. 사실 독살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했다. 불쌍한 녀석.

    “쟤는 평생 저러고 살 팔자니까 그냥 무시해.”

    “알겠습니다.”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말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다시 서류작업에 돌입하였다. 여느 때처럼 정장을 입었는데, 양갈래로 묶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정장 앞가슴을 살포시 덮었다.

    라피스 라줄리가 단탈리안 마왕군 서열 제2위에 해당했다.

    그녀는 내무부 상서를 맡고 있다. 우리 마왕군에서 내무부는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권력이 막강한데, 마왕성과 영지의 치안을 감독하며, 감옥을 책임지며, 영지 전반의 행정까지 관리한다.

    행정부와 경찰, 정보기관이 합체한 괴물이다.

    그런 부서에서 톱을 차지한 라피스 라줄리는……음, 대충 국무총리에다 경찰청장을 겸임하고 거기에 덤으로 국정원장까지 맡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어마어마한 직위로군.

    참, 라피스는 호부와 공부. 그러니까 재정부와 건설부에서도 상서를 맡고 있다. 저 찬란한 직위들에 재정부 장관 및 국토건설부 장관만 더 추가하면 되겠다. 얘가 반란을 일으키는 날이 곧 단탈리안 마왕군 멸망의 날이라는 소리이지.

    하하.

    “단탈리안 님. 서류에 결재를 부탁드립니다.”

    “응, 알겠어. 그런데 아무리 서류가 밀렸다고 해도 우리가 꼭 탁자를 같이 쓰면서까지 일할 필요가 있을까?”

    “있습니다.”

    라피스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단탈리안 님께서 라우라 양과 함께 놀러다니느라 서류가 잔뜩 쌓였습니다. 얼른 처리해주시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아직 주말도 남아 있고…….”

    “주말에는 바르바토스 전하와 만나시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분 탓인지 라피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때 가면 어차피 단탈리안 님께서는 바르바토스 전하가 놀러오는 바람에 일을 못하겠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라고 변명하시겠지요. 뻔합니다.”

    “나의 완벽한 계획이 간파되었다……!?”

    전율이 일었다. 사정할 때처럼 서릿서릿한 감촉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말도 안 되었다. 계략만 따지면 전 대륙을 통틀어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나를, 겨우 일개 하급 서큐버스가 꿰뚫어보았다는 말인가.

    “단탈리안 님과 함께한 지 몇 년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는 도망치실 수 없습니다. 단념해주시길.”

    “하이델베르크 함락하고 아직 사흘밖에 안 지났는데……흑, 막 놀고 싶은데…….”

    내가 눈물을 머금으며 서류를 읽었다.

    뭐, 라피스는 개국공신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기를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봐도 좋았다. 흑색 허브로 대박을 터트리고 미네르바 작전을 성공하는 것도 라피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라우라가 까불 때는 이틀 밤낮으로 범해주면 그만이고, 데이지가 까불 때는 밤새도록 진득하게 조교해주면 그만이지만, 라피스가 화내면 그냥 게임 오버이다. 무조건 엎드려서 앞으로 잘할 테니까 용서해달라고 빌어야 한다.

    “후우.”

    책상 밑쪽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이제 벌써 네 번째다.”

    라우라였다. 그녀는 각탁 아래에 쭈그려 앉아서 내 성기를 입으로 애무하고 있었다. 아까 전에 사정할 때처럼 전율이 일어난 까닭은 정말로 사정했기 때문이다. 라우라는 내가 싼 정액을 전부 삼키고 나서 조그맣게 한숨을 쉰 것이었다.

    “소녀는 슬슬 방으로 돌아가서 새로 입수한 앙투완 아르노의 철학책을 읽고 싶다만…….”

    “안 됩니다. 라우라가 가버리면 제가 꼼짝없이 서류작업에만 매달리게 되지 않습니까. 적어도 제가 서류를 전부 끝낼 때까지 애무하세요.”

    “……라피스 언니. 주군의 서류가 전부 끝나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는가?”

    글쎄요, 하고 라피스가 대답했다.

    “적어도 다섯 시간은 더 필요하겠군요.”

    “지금 소녀보고 다섯 시간 내내 펠라티오를 하라는 말인가!”

    라우라가 울상을 지었다.

    “주군은 모르겠지만, 이거, 턱이 꽤나 힘들다! 주군은 쓸데없이 여기만 커다래서 입으로 감싸기 힘들단 말이다.”

    “아, 아. 잠깐만요. 손가락으로 때리지 마세요. 사정한 직후라서 예민하다고요.”

    단탈리안 마왕군 서열 제3위, 라우라 데 파르네세.

    그녀는 병부를 책임지고 있다. 국방부 장관이라고 표현하면 편하겠지만 실상은 조금 더 권한이 강력하다. 군정, 군령, 군작전을 모조리 총괄하기 때문이다.

    던전에 사는 모든 마물은 라우라가 내리는 지휘를 반드시 따라야만 한다. 따르지 않을 경우, 내 의사와 상관없이 라우라는 즉석에서 병졸을 처벌할 권리를 갖고 있다.

    실제로 라우라는 평소엔 맹하지만 일단 군사업무에 들어가면 용서가 없다. 한달에 꼭 몬스터 두세 마리는 군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죄로 처형당한다. 아마 내 던전에서 사는 몬스터는 나보다 라우라를 훨씬 더 무서워할 거다.

    “하이델베르크를 함락시킨 건 주군이 아니라 소녀이지 않는가! 소녀야말로 휴가를 받아 마땅하거늘, 어째서 주군한테 다섯 시간이나 봉사해야 한다는 말인가……불합리하다!”

    “이제 알았습니까? 세상은 원래 불합리합니다. 싫으면 라우라가 마왕하세요.”

    “으으……!”

    라우라가 눈물을 머금고 재차 내 성기를 입에 물었다. 음, 딱 기분 좋은 포근함이 하반신을 감쌌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서류를 읽어나갔다.

    여기까지가 단탈리안 마왕군의 최고 간부라 하겠다.

    다음으로는 파르시가 서열 제4위. 마왕성 이외에 영지의 업무를 맡고 있다. 영지의 행정권과 조세권을 담당한다. 몬스터에게는 제일 두려운 인물이 라우라이고, 인간에겐 제일 두려운 인물이 파르시이다.

    그 다음으로는 제레미가 서열 제5위. 내무부 휘하의 자경단장이다. 라피스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치안과 감옥을 관리한다. 여기서 감옥을 관리한다는 것은, 제레미에게 죄수를 불로 지져버리거나 배를 째버리는 권리가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데이지가 서열 제6위. 나의 개인적인 비서이자 시녀장이다.

    마왕성에는 내 귀여운 정령이들을 비롯해서 꽤나 많은 마물이 시종으로 근무한다. 이들 모두를 데이지가 감독하고 있다. 아울러 마왕인 나의 의사를 영지에 전달하는 사람도 데이지이다. 측근 중에 측근이라 할 수 있다.

    “홍차를 다시 우려왔습니다.”

    “오냐. 이번에는 또 무슨 독을 탔니?”

    “삼백 년 동안 꾸준히 복용하면 내장이 썩어버리는 독을.”

    “다시 타와.”

    “예, 아버님.”

    최측근이 틈만 나면 나를 암살하려 든다는 게 넌센스이지만.

    나머지 서열은 일일이 나열할 필요가 없다. 각 마을의 촌장, 던전 각층의 보스방에 머무르는 상급 몬스터 정도가 서열 제7위에 해당하겠지. 한두 명이 아니다.

    참고로 데이지의 오라비인 루크는 자경단의 부단장. 제레미 휘하에서 열심히 무예를 수련하고 있다. 굳이 서열을 매기자면 서열 제15위쯤일 거다. 자기보다 어린 여동생한테 출세 경쟁에서 뒤진 기분은 어떨까.

    간단하게 요약해보자면.

    단탈리안 > 라피스 > 라우라 >>> 파르시 > 제레미> 데이지 >>> 각 마을의 촌장, 상급 몬스터.

    이것이 공식적인 서열이겠다.

    그런데 조금 더 내밀하게 파고들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단탈리안!”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뻥 차고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바르바토스가 씩씩거리고 있었다. 최고위 마왕의 등장에 라피스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바닥에 부복했다.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야. 여기가 네 안방이냐? 올려면 온다고 시종이라도 미리 보낼 것이지 뭐하는 거야.”

    “개새끼. 오늘 아침 빈드보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면서 뭐, 시종? 네 녀석 목에 달린 물건이 바가지냐 대가리냐!”

    “어라.”

    내가 깜짝 놀랐다.

    “약속한 날이 오늘이야? 내일 아니었어?”

    “개 같은 자식!”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아득 물었다. 숨이 거친 것을 보아하니 아마 단단히 분노한 모양이었다.

    “언제 올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주 저녁이 될 때까지 감히 나를 바람맞혀?”

    “자, 잠깐만. 난 정말로 내일인 줄 알았어! 내 시녀가 분명히 너와 약속한 날은 내일이라고!”

    내가 사색이 되어 데이지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아버님. 저는 아버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수첩에 적어놓았을 따름입니다.”

    데이지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녀석의 입끝이 아주 조금, 약 3mm 정도 슬쩍 올라간 것을. 데이지의 눈동자는 계획을 성공한 책사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너 이 자식!?”

    “파이몬이랑 놀아나는 것만 해도 분통이 터지는데, 아앙? 바람을 맞혀? 단탈리안 개새끼, 아주 간땡이가 배밖으로 튀어나가도 삼천리는 튀어나갔구나.”

    바르바토스의 오른손이 검은 마나로 빛났다. 채찍이 나타났다. 바르바토스는 채찍을 쥐어잡고 나한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공포에 몸이 떨렸다.

    여기에 서글픈 진리가 있었다. 단탈리안 마왕군 서열이 이러니 저러니 허구한 날 논해봤자……바르바토스는 그 모든 것에 우선했다. 세력만 살펴봐도 '바르바토스 >>>>>> 단탈리안'이니 어쩌겠는가.

    나는 필사적으로 주변의 신하를 쳐다보았다. 나 좀 도와줘!

    “…….”

    “…….”

    아무도 나랑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럴수가. 세상에 충신이란 충신은 죄다 죽어버렸다는 말인가. 군주가 죽을 판국인데 몸 하나 바치는 충의지사 한 명 없단 말인가.

    “흠. 바르바토스 언니가 왔군요.”

    그때 각탁 밑에서 라우라가 기어나왔다.

    바르바토스는 라우라를 보고 멈칫했다.

    “……라우라? 왜 그런 곳에 있었어?”

    “주군이 펠라티오를 시키는 바람에 잠깐 수고했습니다. 그나저나 바르바토스 언니. 지난 번에 다음날에도 함께 하기로 약속했으면서 어째서 아침에 사라졌습니까?”

    “어. 그, 그게.”

    바르바토스가 말을 더듬었다. 기세등등한 모습은 어디로 증발했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갑자기 빈드보나에 일이 생겨서, 어떻게든 처리해야 해서.”

    “언니가 나와 한 약속은 그 정도 가치밖에 없었던 겁니까. 소녀, 언니와 아침을 같이 보낼 생각에 두근거렸는데……언니는 별로 기쁘지 않았나봅니다.”

    “아, 아니야! 절대 아니야!”

    바르바토스가 얼른 채찍을 역소환시키고 라우라한테 달려들었다.

    그렇다.

    놀랍게도, '바르바토스 >>>>>> 단탈리안'이라는 서열이 확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우라 > 바르바토스'라는 서열이 또한 존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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