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62화 (262/510)
  • 00262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사람들은 쉬지 않고, 때로는 강하게 소리치고 때로는 약하게 수군거렸다.

    다름 아니라 누구를 희생양으로 바칠 것이냐는 게 문제였다.

    상층민은 하층민이 연합하여 자기네한테 덤터기를 씌우지 않을까 두려웠으며, 하층민은 상층민이 자기네를 모함하고 핍박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모든 시민이 이것이 지극히 난감한 문제임을 깨닫고 있었다.

    ‘누가 되었든지 간에 내가 나서면 안 된다.’

    ‘이럴 땐 무조건 묻어가야 해!’

    ‘함부로 나댔다가 괜히 몰매 맞을지도 모르는걸.’

    만약 앞장서서 어떤 사람을 희생양으로 몰아세운다 해보아라. 당장 위기를 벗어날 수는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다시 일상이 돌아온다. 그때 동료들이 자신을 뭐라고 평가할까.

    동료 시민을 배신하고 모함한 자,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남을 죽인 살인자…… 그같은 꼬리표가 평생 동안 붙어 다니겠지. 결국 도시에서 살아갈 수조차 없게 된다.

    ‘아무나.’

    ‘아무라도 좋으니 어서 나서라고!’

    선동꾼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목청 큰 사람이 등장하여 외치기만 하면 된다. 예컨대 ……시민 여러분! 지난 일 년 동안 우리를 고생시킨 장본인이 누구였소. 노예였소? 일반 시민이었소? 아니면 이 도시를 소유하고 지키기를 원했던 상류층이었소? 상류층은 책임을 지시오.

    아니면 ……시민 여러분! 이 비극적인 사태에서 우리는 가장 피해가 적은 수단을 고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에서 사라져도 거의 아무런 피해가 없는 그런 사람들을 고릅시다. 그렇습니다, 저는 바로 거지 여섯 명을 선택하자고 제안드리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라도 좋다. 자기만 아니라면.

    “…….”

    그때 한 노인이 일어섰다.

    노인은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었다. 하인이 두 명이나 호위하고 있었는데, 노인은 하인들을 손짓으로 제지한 다음 홀로 걸어나갔다. 노인이 단상에 올라서자 사절들이 서둘러 자리를 비켰다.

    “……시민 여러분.”

    아티팩트를 통해서 노인의 목소리가 광장에 나지막하게 울렸다.

    노인은 백작이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계급의 특권을 전부 잃어버렸다. 비공식적으로는 백작님이라 불렸지만 아무런 실권이 없어 노인들의 사교계에나 얼굴을 비추는, 이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유물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백작.

    시장이 죽어버린 지금 노인에게는 확실히 강한 발언력이 있었다. 어차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서 희생양을 정하는 것도 괜찮겠지.

    이제부터 시작한다. 노인이 입을 열어 의견을 밝히는 순간, 시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떼처럼 일어서서 희생양을 호명하리라…….

    “제가 먼저 죽겠습니다.”

    *  *  *

    “여섯 명의 책임자를 뽑으라는 말씀이옵니까?”

    “그렇다.”

    다시 불러모은 항복사절단에게 말했다.

    “그동안 그대들이 저항한 죄. 여기에 더불어 암살을 시도한 죄. 설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용서를 바라지는 않을 터. 허나, 암살은 시장이 단독으로 벌인 범행임을 본인은 믿고 있다.”

    “하, 하옵시면……?”

    “굳이 여섯 명을 죽일 생각은 없다는 얘기이다.”

    내가 너그럽게 사절의 어깨를 두들겼다.

    “다만 우리에게도 체면이란 게 있다. 이만한 소동이 일어났는데 어떠한 처벌도 뒤따르지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부하들에게서 위엄을 유지하겠는가.”

    고로, 하고 내가 말했다.

    “희생양을 뽑되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신청한 자만을 선별하라. 마지막 사형의 순간에 우리가 희생양을 용서하도록 할 것이다. 무얼, 짜고 치는 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황공하옵니다!”

    살았다는 생각에 사절단이 넙죽 엎드렸다.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희생양은 오로지 귀족이어야만 한다. 어중이떠중이를 보내와서야 아쪽 체면이 죽어버리니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가.”

    “예, 예! 당연한 말씀이옵니다.”

    사절단은 자기끼리 다 알아서 준비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돌아갔다.

    *  *  *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방금 노백작이 뭐라고 말했는가?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을 가진 자가 무슨 말을 입에 담은 것인가.

    “자랑스러운 하이델베르크의 시민 여러분. 우리는 일 년 동안 절망적인 싸움을 이어왔습니다.”

    세월이 스며들어 굳은 노인의 이맛살은 온화했다.

    “공포스러운 창칼을 마주보며 우리는 하나로 단합하였고, 한 조각의 빵이 절실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이 나보다 더 굶주렸다면 기꺼이 내 몫을 단념하였지요. 죽음 앞에서 만인은 평등할지어니.”

    노인이 유명한 경구를 읊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살아남을 길이 보였습니다. 죽음에 맞서 그토록 끈끈하게 단합했던 우리가 오히려 삶을 눈앞에 두고 분열된다면 이보다 우스운 일이 없습니다. 하이델베르크의 시민이여! 적군은 우리가 자기 목숨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러합니까?”

    노인이 상냥한 주름살과 달리 굳건한 눈빛으로 광장을 둘러보았다.

    “진실로 우리는――우리 인간은, 다른 이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없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정체모를 열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노인이 소리쳤다.

    “정의는 의연하게 피어나는 꽃일지어니! 의인(義人)들이여! 하이델베르크를 위해 일어서시오!”

    그러자.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일어섰다.

    “사악한 마물 무리의 계략에 넘어질 수는 없지. 인간의 자존심을 보여줍시다.”

    “하잘 것 없는 인생을 마감하기에 훌륭한 무대라오.”

    항복사절단 중 한 명이었던 남작.

    도시상업을 지배하는 거상인 자작.

    그들이 단상에 올라서서 말없이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세 사람이 추가로 일어섰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시민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이델베르크 사교계를 주름잡는 마담, 도시 법원의 판사장, 신전 사제장…….

    죽음을 자처한 여섯 명 전원이 고위 귀족이었다.

    광장은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어째서 귀족들이 희생하겠다고 나섰는가. 저들은 누구보다 이기적이지 않았던가.

    놀라움과 의문이 뒤섞인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노백작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고귀한 자는 마땅히 다른 이보다 더 무거운 책무를 짊어져야 하는 법입니다.”

    귀족들이 보여준 태도에 일만 시민은 경탄했다. 그들은 각자 신들에게 기도하여 여섯 의인한테 축복이 내려지기를 빌었다.

    다음날 새벽, 여섯 명은 사형수처럼 속옷 차림으로 성문을 나섰다. 이른 아침인데도 시민들은 길거리에 나와 여섯 명을 배웅해주었으며, 그들이 가는 길에 끊임없이 기도를 외웠다.

    *  *  *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유지되는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내가 파이몬에게 계책을 설명하며 말했다.

    “첫 번째는 아까 논의했듯이 마왕군에 대한 적의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두 번째 이유, 바로 귀족에 대한 적의입니다.”

    “외부의 적, 그리고 내부의 적인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트는 독재자로서 전형적이지만 효율적인 수법을 실행하고 있다. 외부의 적만 설정해버리면 국민이 지나치게 단합해버린다. 그렇게 하나가 된 국민이 독재자보다 더 강력하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훌륭한 독재자라면 마땅히 내부에도 적을 설정해야만 한다.

    국론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보다 여럿으로 나뉘는 편이 독재자 입장에서 국가를 통치하기 수월하다. 그로써 국가는 적절하게 통합하면서도 분열된 상태를 유지하는데, 이러한 정치적 기교의 목적은 명확하다. 국가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재자 자신의 지지세력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엘리자베트의 경우에는 고위 귀족을 공공연한 죄인으로 만들었다.

    “합스부르크 통령은 도시 자체를 희생시킴으로써 마왕군이라는 외부의 적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내가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받아쳐줄 차례입니다. 희생의 범위를 도시 자체가 아니라 고위 귀족만으로 줄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될까?

    하이델베르크를 구한 것은 시장(市長)이 아니다. 군사도 아니다. 공화국 정부에게 천대받는 고위 귀족, 그들이 죽음을 자처함으로써 도시를 구해냈다…….

    귀족들이 보여준 고귀한 희생정신에 모든 백성이 감동하겠지. 희생만큼 사람 마음을 강렬하게 뒤흔드는 것은 드물다. 공화국에서 귀족의 이미지는 일변할 것이다.

    “정부에서 발탁한 시장은 암살 따위를 저질러서 도시를 위험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합스부르크 통령이 자랑하는 군대도 '무능한'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귀족들이 희생한 것입니다.”

    관리와 군인은 체면이 구겨지는 반면에 귀족은 발언권이 높아진다. 다시 말해, 엘리자베트의 하수인이 약해지고 대적자가 강해진다.

    “……통령은 아무것도 못하겠네요. 어찌되었든 귀족들은 도시를 구한 영웅. 칭찬하는 수밖에 없사와요.”

    파이몬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략에 있어서는 귀신 같네요. 단탈리안이 제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하하.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여섯 명은 처형할 생각인가요?”

    내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인상만 나빠집니다. 당연히 살려줘야죠. 스스로 죽음을 자청한 의인들. 여기에 마왕조차 감격하여 그들을 용서해준다……. 보십시오. 무척 좋은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정의로운 귀족에 자비로운 마왕까지.

    음, 멋진 주인공에 멋진 엔딩이다. 이야깃거리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올해 음유시인들은 어디 가도 굶어죽을 걱정이 없겠군. 모르긴 몰라도 내 덕을 보는 음유시인이 상당히 많을 거다.

    “게다가 죽은 영웅보다 살아 있는 영웅이 훨씬 더 거추장스럽습니다. 여섯 명은 계속 살아주어서 합스부르크 통령의 골칫거리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죽은 영웅보다 살아 있는 영웅이 골칫거리라…… 정말 단탈리안다운 말이네요.”

    파이몬이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소녀가 혹시 말한 적 있나요? 단탈리안은 성격이 너무 악독하다고.”

    “글쎄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만.”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파이몬이 빵 터졌다. 그녀는 부채를 접고 한참이나 웃었다.

    다음날 아침, 예정된 시나리오에 따라 처형식이 이루어졌다.

    여섯 명이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기 직전 파이몬이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 이들은 저 도시에서 가장 의로운 이들이 아닌가요? 만약 우리가 이들을 죽인다면 세상에 얼마 없는 정의마저 사라지게 될 것이니, 감히 어떻게 처형을 거행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파이몬 님.”

    내가 짐짓 분노한 척하며 소리쳤다.

    “하이델베르크에는 대죄가 있습니다. 죄는 처벌되어야만 합니다!”

    “소녀는 의인을 죽이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 묻고 싶사와요. 비록 우리가 마인과 인간으로 나뉘어 반목하고 있으나, 어찌 정의를 논하는 데 있어서 마인의 정의가 따로 있고 인간의 정의가 따로 있을까요?”

    파이몬이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소녀는 이들을 용서하겠습니다. 의인들이여! 그대들은 작게는 하나의 도시를 구했으며, 크게는 세상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였으니, 저 파이몬, 종족을 뛰어넘어 경의를 보내는 바입니다. 그대들은 고귀한 책무(noblesse oblige)를 다한 자로서 역사에 길이 남겨질 것이에요.”

    여섯 명의 의인은 풀려났다.

    저들은 어차피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희생을 자처한 것이었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선수였으므로 황공하옵니다, 파이몬 님이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선군이십니다, 하는 말이 한참이나 오갔다.

    이날 파이몬이 만들어낸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크게 유행을 타서 음유시인들의 입에 오르락 내리락거렸다. 역사란 이런 것이겠지.

    아쉽게 됐구나, 엘리자베트. 내가 여기에 없었더라면 당신 뜻대로 됐을지도 모를 텐데.

    하지만 세상에 뜻대로 흘러가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좋은 경험을 했다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주었으면 한다.

    사람이란 모쪼록 겸손해야 하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