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1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사절 열댓 명이 곧바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인간들의 입에서 진부한 변명과 사죄가 쏟아졌다. 저희는 전혀 몰랐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시장의 독단입니다……. 저질스러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곡마냥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불협화음이 울렸다.
“목소리가 제일 큰 인간부터 죽이도록 할까요.”
울보를 달래는 것도 귀찮기에 대충 말했다. 소리가 싹 멈추었다. 만족스러웠다. 언제 입을 닥쳐야 하는가, 이것만 알아도 사람은 의외로 쉽게 성공한다.
가끔씩 착각하는 인간이 있지만 말이다. 입구멍이 뚫려 있다고 해서 곧 말할 권리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입이란 말하기보다 닥치기 위하여 달려 있다. 그 사실을 제대로 숙지했다는 점에서 사절단은 일단 합격이다.
“사절단은 항복을 미끼로 삼아서 아군의 핵심 간부를 습격했습니다. 파이몬. 하늘을 기만하고 우리를 농락했으니 마땅히 사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아니, 과연 하이델베르크의 시민들이 항복에 합의했는지 의심스럽군요.”
“단탈리안.”
“번개가 내리쳤으니 천둥이 울릴 차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른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협정은 없습니다. 사절단을 교수형에 처하고, 요새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점령합니다. 하이델베르크에 거주하는 일만 시민은 몰살하여 여신의 제단에 바치겠습니다.”
“……사절단을 포박해서 격리시키세요.”
파이몬은 한숨을 쉬면서 명령했다. 사신들이 줄에 묶여서 끌려나갔다.
시트리가 씩씩거리며 직접 녀석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녀가 내풍기는 살기가 어찌나 짙었는지 사절단은 감히 살려달라고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시트리는 진짜로 화가 나면 말수가 없어지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단탈리안.”
파이몬이 각탁에 털썩 앉았다.
시트리는 포로를 인솔하러 떠났고, 라우라에겐 내가 쉬라고 막사에 돌려보냈다. 지금 사령부에는 파이몬과 나밖에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까요.”
“합스부르크 통령의 밀명입니다. 볼 것도 없지요.”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인간이 마왕에게 항복한다. 단지 항복할 뿐만이라면 또 몰라도 시민들의 생명이 완전히 안전하게 보장된 채로 투항한다…… 합스부르크 통령은 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파악했겠지요.”
파이몬이 괜히 요새를 점령하려는 게 아니었다. 하이델베르크 점령전은 군사적이기 이전에 정치적인 노림수로 계획되었다.
첫 번째, 월맹군에서 추락해버린 파이몬의 지위를 회복한다. 현재 산악파는 임시로 시트리를 맹주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시트리 본인은 물론이고 산악파의 마왕들은 파이몬을 지지한다.
다시 파이몬이 맹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화려한 전적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하이델베르크이다. 대륙 중부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요새도시를 아무런 피해없이 접수하는 것이다. 복귀식에 딱 어울린다.
두 번째, 마왕군의 이미지를 일신한다.
“공화국 국민은 마왕군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합스부르크 통령은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국민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있습니다만.”
“예에. 우리가 평화로운 항복을 받아들이면 여론에 분열하기 시작하겠지요…… 하지만, 벌써 이쪽의 의도를 간파하다니.”
파이몬이 재차 한숨을 쉬었다.
지난 월맹군에서 평원파가 거하게 삽질한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벨레드 형님이 일으킨 일련의 학살극이다.
듣자하니 인간들 머리통으로 뗏목을 만들어 수십 척이나 강물에 띄었다나 뭐라나. 인간종이 마왕군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당연지사. 기껏해서 내가 합스부르크 북부 지방에 쌓아둔 이미지가 시궁창으로 떨어졌다. 그놈의 머리통이 항상 문제였다…….
엘리자베트는 이걸 기회로 승화시켰다.
「마왕군은 극악무도한 악마, 학살자, 사갈의 무리이다.」
「우리 공화국은 지금 어려운 시기를 지나치고 있다. 이때 우리가 내분하여 서로를 모함하기에 이른다면 어찌되겠는가? 저 짐승들에게 잡아먹힐 뿐이다.」
자기 권력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공화정부를 비난하는 사람은 내란죄나 반란죄, 학살미수죄로 잡혀 들어갔다. 내부를 안정시키는 데 외부에 악의 집단을 설정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파이몬은 평화로운 항복협정을 원했다.
마왕군은 학살에 눈이 먼 미치광이 집단이 아니다, 얌전히 항복하면 누구도 죽이지 않는다. 그렇게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써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내부에서 혼란시킬 의도였는데…….
“자국의 분란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면 도시 하나쯤이야 희생시키겠다. 합스부르크 통령은 그런 속셈이겠지요.”
파이몬이 침음했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인가요……. 패도, 아니 외도를 걷는 군주군요.”
“말씀 그대로입니다.”
시장에게 암살 지령을 내린다. 무엇을 위함인가? 우리를 자극시키려는 것이다.
항복협정이 무산된다. 마왕군이 분노하여 도시를 통째로 불사지른다. 하이델베르크의 일만 시민은 마왕군에 맞서 최후까지 싸운 충열지사로 포장되겠지.
엘리자베트는 눈물을 가장하며 ‘공화국의 만민이여! 우리, 이 원한을 결코 잊지 않을지어다!’ 하고 울부짖지 않을까. 인간들은 통령님 만세를 외치고 말이다. 공화국은 더더욱 똘똘 뭉치리라.
그야말로 외도의 극치이다. 정말 엘리자베트에겐 배울 점이 넘쳐난다.
“합스부르크는 공화정의 탈을 쓴 참주정이와요. 이들을 분열시키고 하나하나씩 도시들을 독립시키고 싶었는데…… 만만치 않네요.”
“저쪽의 통령은 평범한 위인이 아닙니다. 인류가 낳은 지도자 중에서도 틀림없이 가장 유능합니다. 만만치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파이몬.”
자아. 이제 어떻게 할까.
나머지 사절단을 고이 살려보내고 항복협정을 그대로 진행시킬 수도 있다. 파이몬이 의도한 바가 그대로 실현되겠지. 다만, 그래서야 이쪽의 자존심이 상한다. 피습까지 당할 뻔했는데 아무 반격도 넣어주지 못하면 짜증난다.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자니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파이몬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새삼 반하셨습니까?”
“네? 그럴 리가요. 소녀가 단탈리안한테 반하더라도 얼굴 때문에 반하기란 불가능해요.”
“…….”
세상을 저주할 테다.
파이몬이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으응, 그냥요. 제 목적을 간파하고 주저없이 도시를 희생시키고자 한 통령도 대단하지만, 통령의 속내를 여기서 곧바로 파악한 단탈리안도 대단하구나, 싶어서.”
“어라. 칭찬하려는 거였습니까?”
좋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허락하겠다. 나는 칭찬받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고보니 단탈리안은 통령과 인연이 꽤 깊네요. 브루노에선 두 사람이 연설전에서 대결했고요. 혹시 따로 예전에 만났다던가 그런 일이 있었나요?”
“따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만. 그렇군요. 인연이 깊은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인연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게임에서 제일 좋아하는 히로인이었습니다, 라고 대답해본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엘리자베트는 결코 외도를 자청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왕도를 동경한다. 백성을 사랑하고, 인간 자체에 끝없는 희망을 갖고 있으며, 그렇다고 인간과 사회의 추악함에서 눈 돌리지도 않는다.
단지 지나치게 현명할 뿐이다. 무엇을 선택해야 피해가 가장 줄어드는가. 무엇이 가장 효율적인가. 엘리자베트에겐 전부 보인다. 그녀는 절망하면서도 기꺼이 그곳이 길이라면 걸어가겠지…….
웬만하면 엘리자베트와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마왕이었다. 타협의 가능성은 애시당초 전무했다. 뭐, 보아하니 엘리자베트도 나도 지옥행 급행열차를 일착으로 끊어놓았다. 사후세계에서나 회한을 풀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에서는 사이 좋게 싸우도록 하자, 엘리자베트.
“통령에 대한 대책 말입니다만. 저에게 그럭저럭 괜찮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파이몬이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우선 하이델베르크의 항복은 받아들입니다. 단, 지난 일 년 동안 우리한테 반항한 것에 대하여 괴씸죄를 묻습니다. 항복은 받아들이겠으나 반항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지요.
“책임이라고 한다면?”
“요는 합스부르크를 어떤 방식으로든 내분시키면 그만입니다.”
파이몬은 평화로운 수단으로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 전형적인 왕도였다. 나에게 그런 방법은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포로를 다시 불러주십시오.”
* * *
협상 결렬!
하이델베르크 시민은 사절단이 가져온 포고문에 크게 동요했다. 평화로이 항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해서 한숨을 놓은 것이 고작 어젯밤이었다. 그런데 사절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끔찍했다.
“시장이 암살을 시도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사절단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광장에서 성난 시민들이 소리쳤다.
일 년 동안 시민들은 용감하게 희생했다. 이런저런 군무를 도왔으며, 도시가 포위되어 생필품이 극도로 희귀해진 마당에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에 항복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자신들을 대표하는 시장이 무책임하게 암살 따위를 시도했다. 시민들은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서 격분했다.
“누가 시장의 가족을 잡아오시오.”
“가족을 교수형에 처해서 적군에게 보내면 조금이라도 자비를 구걸할 수 있겠지!”
광장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선 사절들이 땀을 뻘뻘 흘렸다.
“시민 동지 여러분. 시장의 가족은 이미 전부 죽었소. 살해당했지. 어제, 시장이 사절을 이끌고 나가기 직전 그 스스로 가족들을 참살했소. 집안에 아들과 딸, 아내, 친척까지 모두 시체로 쓰러져 있더이다.”
“…….”
시민들이 입을 다물었다. 자기 손으로 가족을 직접 죽였다. 즉, 실패했을 경우 가족이 욕보이기 전에 스스로 살해한 것이었다.
소름 끼치는 단호함에 시민들이 잠시간 말을 잃어버리자, 사절이 재빠르게 공고했다.
“여러분이 걱정하는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사절단이 멀쩡하게 돌아온 것 자체가 증거이지. 적군의 지휘관들은 여전히 항복협정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다고 전했소. 모든 하이델베르크 시민에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도 약속해주었소.”
단, 하고 사절이 덧붙였다.
“지휘관들은 항복에 조건이 있다고 명시했소외다. 지금까지 반항한 것과 암살을 시도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라고.”
안전이 보장되었다는 말에 환호하려던 시민들이 조건이란 단어를 듣고 긴장했다. 그렇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암살까지 시도한 도시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용서해줄 리 만무했다. 얼마나 혹독한 조건이 주어졌는가?
“여섯 명.”
“…….”
“하이델베르크를 대표하는 시민 여섯 명이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되어야만 하오.”
광장에 침묵이 맴돌았다.
발언권이 있는 시민 중 한 사람이 거수했다.
“질문이 있습니다. 정확히 누가 책임자라는 겁니까? 관리입니까? 아니면 지휘관입니까?”
“적들은 어느 누가 대표해도 상관없다고 말했소. 특정한 인물이나 직업을 꼬집지 않았소외다. 다시 말해서…….”
사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우리 책임자들이 누구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오.”
다시 한번 침묵.
광장에 모인 인파가 서서히 웅성거렸다. 웅성거림은 점점 커졌다. 삽시간에 광장 전체가 떠들썩한 시장판처럼 시끄러워졌다.
“아니, 무슨 권리로 희생자를 결정한다는 말입니까? 시장도 죽어버린 터에.”
“겨우 여섯 명만 죽으면 모두 살 수 있으니 관대한 조건이긴 한데…….”
“그러니까 누가 어떻게 정하냐고.”
이윽고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도대체 누가 죽으라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