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0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일단의 연대장들이 강가에서 도열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탄 나룻배가 미끄러지듯 강변에 닿았다. 곧바로 시종들이 나왔다. 시종들은 둘둘 말린 붉은 카펫을 화려하게 펼쳤다. 내가 먼저 나룻배에서 내려, 공손하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마담 파이몬.”
“상냥도 하셔라.”
파이몬이 살풋 미소 짓고 내 손을 가벼이 잡았다.
연대장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사령관 각하들께 경례!”
“월맹에 영광을!”
처억, 하고 경례의 파도가 이어졌다.
강물에 햇볕이 반사되어 눈부셨다. 그 눈부심 속에서 깃발들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파이몬을 상징하는 사봉(四峰) 낙타. 시트리를 상징하는 뿔이 세 개 달린 염소. 각종 연대 깃발. 그리고, 이들이 격파하고 전멸시킨 기사단의 깃발들…….
우리는 군진 정중앙에 깔린 카펫을 밟으며 걸어갔다.
“마치 결혼식이라도 올리는 것 같군요.”
“어머나. 그런 얘기를 아무한테나 하고 다니면 큰일이 나버려요?”
“아무한테나 하지 않습니다. 파이몬이니까 건네는 얘기이지요.”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믿음이 하나도 가지 않는 거와요, 단탈리안.”
파이몬이 쿠쿡 웃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연애 짭밥이 수백 년이 넘으니 절대로 안 속았다. 파이몬은 이바르 로드브로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수였다.
“어서오십시오, 파이몬 전하. 단탈리안 전하. 그리고…….”
최고 참모로서 진지를 지키고 있던 라우라가 마중 나왔다. 라우라는 우리 뒤쪽을 보더니 고운 이마에 눈썹을 찌부렸다.
“시트리 언니께선 왜 물에 흠뻑 젖어 계신가요?”
“흐허헝. 다 내가 못난이라서 그래. 미안해요, 파이몬 언니. 미안해, 단탈리안. 으아아앙!”
시트리는 물에 빠진 생쥐가 다름없었다. 그녀가 강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얼굴에 흘리며 훌쩍거렸다.
“……항복 사절단이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라우라는 인상을 한번 쓰더니 싸악 덤덤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신경 써봤자 좋을 일 없다는 사실을 단박에 간파한 모양이었다. 영리한 녀석 같으니라고.
항복 사절단은 라우라 말대로 성문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옷차림이 고급스러운 게 딱 봐도 다들 귀족 출신이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혁명을 일으켰노라고 자부했지만, 계급과 신분이 엄연히 남아 있었다.
공식상에서는 귀족과 시민이란 낱말 대신 제1급 시민, 제2급 시민, 이런 식으로 말한다던가. 요컨대 눈 가리고 아웅이다. 훌륭한 수법이로군. 엘리자베트 통령에게는 정말로 배울 점이 많다.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위대한 존재를 뵙나이다.”
하이델베르크를 대표하는 신사들이 허리를 숙였다.
우리는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비록 적군이라 해도 사절단한테 무례하게 대할 리가 없다――즉시 항복 문서를 검토했다.
하이델베르크에 대한 모든 권리를 마왕군에게 넘길 것. 전쟁배상금으로 사만 리브라를 지불할 것. 마왕군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자는 즉시 도시에서 떠날 것.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서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군요.”
무척 관대한 조건이었다. 책임자들의 목숨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약탈하지도 않았다.
사절단이 우리의 자비를 입술이 닳도록 칭송했다.
“자비를 베풀어주심에 어찌 감복하지 않겠나이까?”
“위대한 존재께 만신(萬神)의 축복이 함께할 것이옵니다.”
파이몬이 이쪽 대표자로서 문서에 서명했다.
중년 남성이 큼직한 열쇠를 파이몬에게 바쳤다. 남성은 하이델베르크 시장이었고, 진상품은 바로 도시 정문의 열쇠였다. 긴장된 공기 속에서 파이몬이 활짝 웃으면서 시장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당신은 신민을 돌보는 시장으로서 임무를 다했고, 도시를 지키는 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했어요. 저 파이몬은 당신에게 예우를 표합니다.”
“소, 소신을 너그러이 봐주셔서 황공하옵니다.”
시장은 누가 봐도 잔뜩 쫄아 있었다. 턱수염이 복슬복슬하게 자란 주제에 겁쟁이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소신이라니? 그거 자신의 주군한테만 쓸 수 있는 용법이라고, 아저씨. 주변 인간들이 다 들었는데 댁은 살아서 돌아가도 반역죄로 처형당하겠구만. 엘리자베트가 패전의 희생물을 만들지 않을 리 없다. 쯔쯧.
“그것이, 감히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사온데…….”
“어머. 무엇이든 질문하세요.”
“소신은 우둔하고 우매하여 병법을 논할 계제가 못 되옵니다.”
시장이 반쯤 대머리가 된 이마에서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런 소신이므로 기사단의 야습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고…… 심지어 화공선단이 하일브론에서 전멸된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위대한 존재께서는 어느 이치에 닿으셨기에 천리가 꿰뚫렸는지 감히 여쭙나이다.”
어라, 이 후줄그레한 아저씨가 의외로 적군의 참모이기도 했나보다.
흐으음. 흐음? 으음…….
의심스럽군. 조금이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준비해둘까. 설마 그럴까 싶어도 뭐든지 유비무환이다.
“글쎄요. 어느 이치에 닿았느냐라.”
파이몬이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라우라는 나의 부하였다. 나에게 질문에 대답할 권리가 있었다. 나는 다시 라우라를 쳐다봄으로써 당사자한테 권리를 양보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귀관의 계획을 사전에 방지한 것은 소관이다.”
“에……?”
시장 아저씨가 당황해서 라우라의 외관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라우라가 불쾌해하며 눈썹을 찌부리자, 시장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지나치게 젊으신 듯하여서…… 소신이 마족 여러분의 나이를 헤아리는 데 미숙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소관은 마족이 아니다. 인간이지. 스무 살에 세 달을 살았을 뿐이니 귀관이 실례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
시장은 얼굴 표정이 서서히 혼란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시장 말고 다른 사절들 또한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인간이시라고요……? 아니, 그보다 스무 살의 여식이 어떻게……?”
“번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도록 하지.”
라우라가 딱 잘라서 말했다.
“먼저 귀관은 어찌 천리를 꿰뚫어 보았느냐고 물었다만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이번 전쟁에서 귀관이 패배한 까닭은 결코 천리나 운명 탓이 아니다. 천운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전쟁도 있지. 허나 이번은 아니었다.”
라우라가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소관은 귀군이 극히 유능하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통령은 전무후무한 전술가이며, 통령을 지지하는 군부 역시 유능한 인사로 채워져 있지. 하이델베르크는 가장 중요한 거점 중에 하나이다. 합스부르크 통령이 무능한 군인을 책임자로 보냈을 가능성은 한없이 영에 수렴했다.”
“그게 무슨…….”
“귀관의 성격이 대략이나마 엿보였다는 뜻이다.”
그녀가 금빛 머리를 뒤로 스윽 쓸어넘겼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는 표시였다.
“유능한 군인은 언제 과감해야 하고 언제 신중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합스부르크 통령이 그대에게 하이델베르크를 맡기면서 뭐라고 당부했는지, 대체로 상상이 간다. 반드시 요새를 지켜라.”
“…….”
“그러나 병력이 부족하다. 중앙의 원군을 기대하지 말 것이며, 최대한 적은 피해로 전쟁에 임하여라……. 대충 이러할까. 귀관은 극히 효율적으로 군사를 운용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시장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러건 말건 라우라가 자기 할 말을 밀고 나갔다.
“요새가 포위되었다. 귀관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요새의 포위망을 아예 뚫어버리는 것? 절대로 아니다. 귀관은 유능하다. 그렇기에 '다리만 파괴하면 모든 전황이 해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파악했겠지. 아닌가?”
“……마, 맞습니다.”
“봐라. 문제가 간단해진다.”
라우라가 활짝 웃었다.
“일점을 집중적으로 파괴하고, 피해를 최소로 줄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기습입니다.”
“음. 정확하게 말하면 야습이지. 그러나 야습은 꽤나 훈련된 병력이 아니면 스스로 실패해버리기 마련이다. 귀관은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최정예 병력. 즉, 기사단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친구가 친구에게 마술의 비밀을 짜잔 하고 얘기해주는 것처럼 라우라는 친절했다.
“귀관은 설령 우리가 야습을 대비하고 있을지라도 돌파할 수 있도록, 기사단에게 성공할 때까지 몇 번이고 수십 번이고 돌격하라고 주문해놓았겠지. 기뻐하게. 귀관이 지시한 대로 기사단은 열여섯 번이 넘게 돌격했다. 전멸할 때까지 말이지.”
시장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귀관이 어디를 노릴지, 무엇으로 노릴지, 어떻게 노릴지 모두 밝혀져 있었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시장이 고개를 숙여 잠시 침묵했다. 다른 사절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시장이 이마에서 땀을 닦아내며 겨우 입을 다시 열었다.
“화공선단은……어떻게…….”
“똑같다. 기사단이 일소된 이상, 귀관은 다시 한번 최소한의 피해로 다리를 돌파하고자 결심했다. 지상에서 공격할 수단이 사라졌으니 이제 남은 수단은 무엇인가? 정답은 수상이다. 간단한 양자택일 문제이다.”
“간단한…….”
시장이 얼굴을 들었다. 눈동자에 실핏줄이 번져 있었다.
“하지만, 화공선단은 다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궤멸되었습니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음? 뻔하지 않은가.”
라우라가 이해되지 않는 낯빛으로 되물었다.
“귀관은 동풍이 거센 날에 선단이 다리에 도착하는 시간을 역계산했겠지? 그렇게 역계산된 것을 다시 역으로 계산하면 선단이 하일브론에 들릴 시각은 단번에 도출된다. 이것 역시 간단한 논리이다. 자아, 천리이니 천운이니 하는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
침묵이 있었다.
시장이 분노에 찬 신음을 내뱉은 것은 그때였다.
“네 년이……네 년이, 우리의 영토를 잘도!”
저런.
시장이 양손을 펼쳐서 짐승처럼 라우라한테 달려들었다. 주먹에서 희미하게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장은 기사 출신인 것이었다.
주변에서 비명이 터졌다. 사절들이 경악으로 가득 차서 어, 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파이몬은 눈을 휘둥그레 떴고, 시트리가 서둘러 나아가기 위해 땅을 내딛었다. 그러나 그들이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흐어――크아아악!”
시장은 이미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대검들에 온몸이 뚫렸다.
죽음의 기사들이었다. 진즉에 이상해서 내가 대기시켜두고 있었다.
잠자코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거 원, 너무 수상하지 않은가. 이 아저씨는 시장인데다가 군사 지휘관, 게다가 작전참모였다. 요컨대 민정과 군정, 군작전까지 한꺼번에 맡은 위인이었다. 무지막지하게 유능했다.
그런 유능한 인물이 자기 말투랑 표정도 관리하지 못해서 소신을 자칭한다고?
의심스럽다. 억지로 약한 척을 해서 상대방이 방심하도록 유도하고 싶었겠지. 미안하지만 그렇게 허접쓰레기 같은 연기로는 갓난애기조차 속일 수 없다.
“주군.”
라우라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닥 놀라지도 않은 눈치였다. 무슨 스무 살 아가씨가 저리 강심장일까.
어딘지 재밌어서 내가 실실 쪼갰다.
“선물입니다, 라우라. 저 돼지새끼의 목은 수집품으로 가져가도 좋아요.”
라우라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주군이 내린 하사품을 소녀가 마다할 수는 없지.”
라우라가 허리에 찬 롱소드를 뽑았다. 사지가 꿰뚫렸지만 아직 숨이 붙은 시장의 목을, 라우라는 단칼에 날려버렸다. 머리통은 아주 잠깐 허공을 떠돌다가 툭, 하고 땅바닥에 뒹굴었다.
사방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초대장이 잘못 도착한 것일까요. 아무래도 이분들은 사절단이 아니라 암살단인 모양입니다. 이거 원, 배달부가 관청과 암살자 길드까지 헷갈리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파이몬한테 느긋하게 말했다.
사절들이 새하얗게 얼굴이 질려 있었다. 분위기를 보건대 시장은 단독으로 암살을 실행한 것 같았다. 단독범행, 다른 이들은 무죄. 인간종으로서 최후의 자존심을 보여주고 나머지는 산다. 그런 걸 의도했는가…….
좋다. 안이하게 생각한 대가를 보여주겠다.
“잔치를 망치는 불청객은 이쪽에서 사양입니다. 그들이 가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싸그리 죽여버리자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