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59화 (259/510)
  • 00259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뭐, 파이몬의 안색이 핼쑥해지긴 했어도 아무렴 적군만할까.

    본격적으로 공격하기도 전에 선단이 털려버렸다. 합스부르크 공화국 입장에서는 졸지에 귀신한테 홀려버린 기분이겠지. 이쪽에 괴물과 같은 군략가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으리라.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다.

    “차라리 기습이 아니라 전면전을 걸었어야 한다. 요새주둔군을 전부 이끌고, 기사단과 마법전대를 총동원해서 일대 회전을 펼쳤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라우라의 평가였다.

    인근에서 기사단 전력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귀중하고 또 귀중한 마법사 전력까지 손상되었다. 고급스러운 병종이 죄다 반불구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반면에 이쪽은 오우거와 마법사가 건재했다.

    그런데도 하이델베르크 요새는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별동대를 조직하여 이쪽이 방심한 틈을 노렸다. 근처 도시들도 원군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그들이 빈틈이라 믿었던 것은 모조리 라우라가 의도한 실수였다. 도시들이 원군을 보내느라 병력을 소모하자, 오히려 우리쪽에서 근처 도시 다섯 개를 점령했다.

    압도적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겠지.

    적군은 마지막 발악으로 수전(水戰)을 걸어왔다. 화공선을 포함하여 총 열다섯 척의 대형 갤리선이 진격했다. 적군도 바보가 아니였다. 열다섯 척 중에 어느 배가 화공선인지 알아보지 못하도록 위장해두었다.

    자칫 잘못하면 화공선이 접근하는 것을 허용해버릴지 모를 상황. 이때도 라우라는 지극히 냉정하게 판단했다.

    “침착하게 대응하지요. 배가 얼마나 물에 잠겼느냐에 따라 화공선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습니다. 화공선이라면 안쪽을 병사 대신 억새풀로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응. 응.”

    시트리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시트리는 그녀 나름대로 라우라에 대해 체념한 것이었다. 어차피 자기는 이해하지 못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면 만사 오케이라고.

    “도마뱀족과 정령을 그런 배에 집중시킵니다. 우선 화공선을 처리하고 그 다음에 나머지 잔당을 해치우지요.”

    “그러니까 얕게 가라앉은 배를 먼저 족치라는 거지? 알겠어.”

    전쟁터에서 선택과 집중은 언제나 옳았다.

    열다섯 척 중에서 강물에 얕게 가라앉은 배는 모두 네 척이었다. 백여 마리의 수중 몬스터가 네 척에 집중적으로 달려들었다. 노잡이들이 순식간에 도륙되었고, 돛이 형편없이 쓰러졌다.

    돛과 노를 잃어버린 화공선 네 척이 강물 정중앙에서 엉켰다. 이들은 거대한 방해물이 되어, 인간군의 다른 함선이 지나가는 것을 방해했다.

    “되었습니다. 전군, 일제히 불화살을 발사하도록 명령을.”

    불화살이 하늘을 가르며 화공선에 쏟아졌다. 리저드맨이 직접 횃불을 들고 헤엄쳐서 직접 불사지른 배도 있었다. 기름 먹인 억새풀로 꽉꽉 채워진 화공선은 실로 기세 좋게 타올랐다.

    거친 불길이 천천히 다른 함선들로 옮겨 붙었다.

    “불을 잡아라! 멍청한 새끼들――뛰어내리지 말고 불을 끄란 말이다!”

    “사, 살려줘!”

    “배를 버리고 퇴함하라! 퇴함하라!”

    인세에 지옥이 펼쳐졌다.

    갤리선들이 활활 타올랐다. 방해물에 가로막혀 이도저도 못한 채 적군의 함단은 그저 타오르기만 했다. 우리 몬스터 군단은 강줄기를 양변에서 포위하여, 헤엄쳐 올라오려는 인간군을 족족 사살했다.

    화공선 중에는 화약을 실은 전함이 있었다. 그 배는 화려하게 폭발했다. 혼자서 익사하기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주변의 함선 세 척까지 끌어들였다. 멋들어진 동반자살이었다.

    굳이 결과를 되짚을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완승을 거두었다.

    “포로로 사로잡은 기사들은 전원 성문 앞에서 효수하지요.”

    중장갑을 걸친 기사들은 물에 빠져 허둥대다 대다수 포로로 잡혔다. 풀어주는 대가로 몸값을 후하게 받을 수 있었지만, 라우라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전원을 처형했다.

    내가 의심스러워서 물어보았다.

    “라우라. 설마 기사의 목을 수집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주군은 소녀를 어떻게 보는 것인가. 소녀가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한다. 여기는 주군의 마왕성이 아니라 대륙의 전장이다. 소녀가 취미를 강요할 리 없지 않은가.”

    말은 저래도 허둥지둥 옆머리를 빙빙 꼬는 것이, 십중팔구 머리통을 수집할 생각으로 가득하였다.

    내가 짜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라우라. 혹시 변태입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군한테 변태 소리를 듣게 되니 무척이나, 으응, 무척이나 화가 나는군. 설마 소녀가 주군으로 모시는 자를 후려치고 싶어질 날이 올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주군을 때리고 싶다. 때려도 좋은가?”

    라우라가 입가를 부들부들 떨었다.

    “하. 설마 제가 변태라는 말입니까?”

    “설마가 아니라 정확히 그런 의미로 말했다. 소녀는 주군만큼 변태인 작자를 평생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중상모략이 따로 없군요.”

    내가 길길이 날뛰었다.

    “라우라는 저와 아홉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떡을 치는 주제에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바르바토스까지 따먹지 않았습니까.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몸을 취했으니 그 취향의 변태스러움이 가히 천하를 뒤덮을 기세입니다.”

    “뭐라? 소녀가 언제 원해서 아홉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몸을 섞었는가. 전부 주군이 강요해서 이루어진 일 아닌가! 주군이야말로 변태 중의 상변태요, 아프로디테 여신마저 기겁하여 도망치게 만들 위인이다!”

    라우라도 지지 않고 분기탱천했다.

    “말이야 말이지, 주군이 지금까지 따먹은 여자 숫자가 도대체 몇 명인가! 뻔뻔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 이 후안무치한 바람쟁이!”

    “흥. 세상은 무엇이든 양보다 질입니다. 제가 설령 이백스물다섯 명의 여성과 합방했다 하더라도 오로지 이성과 잤을 따름입니다. 반면에 라우라는 어떻습니까? 동성인 바르바토스랑 떡치지 않았습니까! 질적으로 라우라가 훨씬 더 변태이죠!”

    우리는 병사들까지 다 들리도록 큰소리로 난리를 부렸다. 마침 근처에 서 있던 파이몬이 싸움을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꼭지가 돌아버린 우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주군의 논리를 듣고 웃을 것이다. 소녀가 바르바토스 각하와 잤다면 주군은 어떠한가? 시트리 언니와 자지 않았는가! 시트리 언니는 양성이니 동성과 잔 소녀보다 양성과 잔 주군이 훨씬 더 농밀하게 변태스럽다!”

    “웃기지 마십시오! 이 후배위 성애자가! 확 덮쳐서 개처럼 범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해볼 테면 해봐라, 주군이 변태라는 사실을 온 사방에 퍼트릴 수 있겠군!”

    우리가 서로 이마를 부닥치며 으르렁거렸다.

    “빌어먹을 변태 신하!”

    “답이 없는 스타킹 성애자!”

    “후장이랑 같이 쑤시면 좋아서 죽으면서!”

    “그러는 주군은 무릎이 성감대인 남자이지 않은가! 웃겨 자빠지겠군!”

    “이, 이, 이, 야외노출에 환장한 성노예가 건방지게――!?”

    “변태 주군이나 그러겠지!”

    라우라와 나는 이미 갈 때까지 간 사이라서 일단 한번 싸움이 벌어지면 거의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이대로는 영원히 결착이 지어지지 않을 게 분명해서, 우리는 동시에 파이몬을 바라보았다.

    “파이몬! 당신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라우라가 더 변태스럽지요?”

    “파이몬 전하!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주군이야말로 상변태이지 않습니까?”

    파이몬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뇌했다. 로뎅의 조각상은 엉덩이로 가볍게 치워버릴 만큼 고뇌하는 얼굴에 실감이 넘쳐났다.

    “정직하게 말씀드려서……두 사람 모두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에 빠져 있고, 좋지 않은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는 것 같사와요. 한 마디로 말해서 심각해요.”

    나와 라우라가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누가 더 변태라는 얘기입니까?”

    “그래서 어느 쪽이 더 변태이온지요?”

    파이몬이 한숨을 쉬었다.

    “……방향성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두 사람 다 막상막하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보여요. 그 방향성이라는 것도 아주 나쁜 쪽으로 기울어 있어요. 여러분은 쌍방에 우열을 가릴 수가 없네요. 뭐, 어찌보면 천생연분인 것 같지 않은 것도 아니와요.”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여태까지 나는 설령 변태일지라도 라우라만큼 변태는 아니라고 자부했다. 하루에 이백 번을 가뿐히 가버리는 여자와 나는 동급의 변태였다는 말인가?

    “제가 그 정도로 변태인 줄은 몰랐습니다…….”

    “주군이 왜 충격을 받는가? 소녀야말로 일생일대의 정체성 혼란에 직면했거늘. 여신이시여, 소녀가 주군과 동급으로 취급될 정도로 천박했나이까……?”

    우리는 풀이 죽어서 침울해졌다. 삶에 의욕을 잃었다.

    의도치 않게 일타쌍피를 달성한 파이몬은 당황해서 우리의 기운을 복돋아주려 노력했다.

    “저기. 저로서는 왜 두 사람이 우울해하는지, 이유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는데요……. 제가 잘못했나요? 설마 지금 제가 잘못한 부분인가요? 아니죠? 아니라고 믿고 싶네요.”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군의 사령부는 패배감에 젖어들었다.

    잠시 뒤에 시트리가 돌아왔다. 그녀는 기사 이외의 일반 포로를 몽땅 강물에 수장시키고 오는 참이었다. 일반 포로 따위 살려봤자 밥값만 축내는지라 사령부는 만장일치로 몰살에 찬성했다.

    “어라? 분위기가 왜 이래?”

    시트리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라우라와 내가 우울증으로 향하여 초고속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파이몬이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흐음.”

    시트리가 설명을 전부 다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저기, 단탈리안. 라우라. 미노타우르스랑 성교한 적 있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당연히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고블린 떼거지랑 집단 섹스한 경험은?”

    “……없습니다만.”

    “있을 리가 만무하지요.”

    시트리가 마치 시대의 난제를 맞닥트린 수학자처럼 눈썹을 찌푸렸다.

    “도마뱀족이랑 수중 섹스는? 인큐버스한테 박히면서 서큐버스를 박은 경험은? 트롤의 성기에 식도가 터질 듯이 막혀본 경험은? 뱀족에게 뱃속까지 꾸욱꾸욱 하고 농락당한 경험은?”

    우리가 모든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자, 시트리는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이 '변태'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

    “헤헤. 전부 해본 내가 판결을 내려줄게. 두 사람 다 정말로 평범한 선남선녀야! 싸울 필요가 전혀 없어. 자, 화해하고 악수!”

    시트리가 헤실방실 웃으면서 우리의 손을 잡아 연결시켰다.

    라우라와 나는 완전히 경악하여 시트리를 쳐다보았다. 괴물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가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살짝 오해한 것일까. 시트리가 귀엽게 방긋거렸다.

    “참. 혹시 변태적인 거에 흥미가 생기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내가 친절하게 하나하나씩 가르쳐줄게! 난 단탈리안이랑 라우라가 정말 좋으니까. 헤헤.”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푸른 하늘 위에는 끝없는 우주가 펼쳐져 있다. 우주는 너무도 깊고 광대하여 평범한 사람이 함부로 여행을 떠났다가는 단박에 죽어버리기 십상이었다.

    라우라와 나는 진리를 깨달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라고…….

    *  *  *

    하이델베르크 요새는 정확히 열한 개월 만에 항복했다.

    저쪽에선 먼저 사절단을 보내왔다. 우리에게 제발 시민이라도 살려달라고 청원했다. 우리군을 이끄는 사령관은 공식적으로 시트리였지만 비공식적으로 파이몬이었으므로, 파이몬에게 결정권이 주어졌다.

    “항복의 조건을 받아들이겠사와요.”

    오늘이 바로 성문이 열리기로 약속된 날. 라우라가 지휘부를 지키고 있는 동안, 우리는 뱃놀이를 즐길 겸해서 강줄기를 따라 천천히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