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58화 (258/510)
  • 00258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누구인지 몰라도, 라우라를 상대하게 된 적군에게 동정심이 느껴졌다.

    기사단으로 야습을 건다. 말로 표현하면 쉬워보인다. 실상은 요새를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병력을 한꺼번에 올인한 것이다. 그것도 포위망이 완성되자마자 곧바로.

    평범한 지휘관은 일단 대기하고 관망하겠지. 당장 요새가 포위될지라도 최소한 반년은 아무런 문제없이 버틸 수가 있다. 안전한 요새에서 빠져나가 몬스터 대군과 맞서 싸운다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휘관은 시간이 길어져봤자 허송세월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중앙 정부는 현재 원군을 파견할 여력이 부족했다. 차라리 기습하려면 포위망이 완성된 직후. '설마 벌써부터 기습을 걸어올까' 하고 방심하는 찰나를 노려야만 한다…….

    그래서 지휘관은 주변 도시의 기사단까지 규합하여 공격했다.

    대담성, 판단력, 교섭력, 어느 하나 부족한 바가 없었다. 이것을 라우라는 단 한 마디로 간파했다. 합스부르크의 군부는 '유능'하다. 유능하니까 반드시 기습해올 것이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화공을 걸어올 거라고 예측했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배가 오는 족족 없애버리면 된다는 거지?”

    시트리가 입가에 묻은 슈크림을 닦아냈다.

    “리저드맨이랑 물의 정령을 동원해서 노를 죄다 박살내면 되겠네.”

    “죄송하지만 불가합니다, 시트리 언니. 적군은 필히 바람이 잘 부는 날을 고르겠지요. 노가 전부 파괴되어도 돛의 힘으로 전진할 수 있는 그런 날씨를. 이런 종류의 기습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상대편의 생각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라우라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한번 실패하면 이쪽의 경계가 더욱 더 심해져버린다……. 기회는 오로지 한 번뿐. 적군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신중에 신중을 기할 것입니다.”

    적은 유능하다. 반드시 기습이 최고로 효과를 발휘하는 순간을 노린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적이 어떻게 판단할지 예상된다고 라우라는 단언했다.

    “네카어 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새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는 하일브론입니다만, 항구가 지나치게 작습니다. 화공선을 숨기기에는 적절하지 않지요. 즉, 화공선단이 대기할 곳은 아마도 슈투트가르트.”

    그녀가 지도에 그려진 강줄기를 짚었다.

    “적군은 기동력을 살려 3단 갤리선을 활용하겠지요. 슈투트가르트에서 3단 갤리선을 타고 오면 어림잡아 여덟 시간. 하일브론에서 잠깐 정박하여 쉬는 것까지 포함하면 아홉 시간쯤 걸립니다.”

    우리는 멍하게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라우라는 우리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군사지도를 내려다보며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꼬았다. 그녀의 입이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정확히 어느 시각에 출발하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적군은 다시 한번 우리의 정찰을 피하기 위하여 야간을 이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밤 열한 시에서 새벽 네 시 정도의 무렵에 이곳에 도착하기를 원하겠지요. 그렇다면 역으로 계산하여, 슈투트가르트에서 화공선단이 출발하는 시각은 낮 한 시에서 저녁 여섯 시입니다.”

    “…….”

    “그러나 낮 한 시는 지나치게 밝습니다. 적군은 하일브론에서 잠깐 정박할 때도 최대한 어둡기를 바라겠지요. 즉, 저녁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출발할 것입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동풍이 거센 날, 저녁 다섯 시에서 여섯 시가 곧 적들이 작전을 결행하는 시간입니다.”

    “…….”

    “만약 이런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3단 갤리선이 목격된다면 십중팔구 화공선입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고, 파이몬은 표정이 굳었다. 시트리는 아예 입이 떡 벌어졌다.

    “어? 어? ……으응? 어라?”

    “아마 적군도 수중 마물이 공격해오는 걸 대비할 것입니다. 마법사로 이루어진 부대가 승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노가 전부 파괴되더라도 마법사들이 어떻게든 돛만은 사수함으로써 화공선단을 다리에 충돌시킨다…… 그것이 적의 노림수이지요.”

    라우라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구태여 우리가 적군의 장단에 놀아줄 필요가 없습니다. 화공선단이 하일브론에 정박한 순간을 노려서 급습합니다. 하일브론은 성곽조차 없는 소규모 어촌입니다. 소관은 마을째로 선단을 불태우는 것을 추천합니다.”

    시트리가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니까…… 저기, 마을을 공격하라구?”

    “예. 동풍이 거센 날, 밤 열 시에서 열한 시 경. 시트리 언니께서 별동대를 이끌고 하일브론을 기습해주십시오.”

    라우라가 간단하게 대꾸했다. 자신이 뭘 얘기했는지 우리가 하나도 남김없이 이해했으며,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우리가 정박지에서 공격해오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겠지요. 어린애 목을 비트는 것보다 아주 약간 더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 이거 참 쉽죠, 하는 환청이 어디선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파이몬과 시트리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라우라가 내놓은 계책에 따라 다리를 완공했으며, 포위망을 완성했고, 야습까지 막아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정확한 예측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파이몬이 내게 몰래 말했다.

    “단탈리안. 소녀가 비록 전술에 있어서 독보적이진 않지만, 이런저런 아수라장을 거쳐오면서 깨달은 점이 있사와요.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기발한 상상력이나 계산이 아니에요. 견실한 판단력과 병사들에 대한 장악력이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기발한 착상으로 작전을 펼쳐본들 용감하고 강력한 연대에 미치지 못한다. 견실한 판단력. 곧 어느 순간에 이 연대를 투입할 것이며, 어느 시점에 앞선 연대를 뒤로 뺄 것인가. 어디에 막사를 건설할 것인가. 이런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전투는 거의 대부분 머리싸움이 아니다. 이것이 많은 책사가 착각하는 부분이다.

    책사는 말하자면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다. 음악을 실제로 연주하는 것은 연주자이지, 결코 지휘자가 아니다. 지휘자는 연주자들이 제대로 한곡을 뽑아낼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줄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실제로 싸우는 사람은 병사이지 책사가 아니며, 책사는 병사 한명한명이 가장 용감하고 가장 질서 있게 분투할 수 있도록 전장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언젠가 반드시 패배하게 되어 있다.

    참고로 내가 그래서 앙리에타 여왕한테 참패했다.

    갑자기 슬퍼지는군…….

    파이몬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데 파르네세 양은 분명히 재능이 넘쳐요. 하지만 열여덟 살의 인간 아가씨가 꿰뚫어볼 정도로 전장의 깊이가 얇지는 않을 거예요. 머리만으로 전쟁이 굴러가지 않는다……그 사실을 데 파르네세 양께 가르쳐주었으면 해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파이몬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충고해주었다. 상식적이면서도 소중한 경고였다. 만약 라우라가 대륙의 역사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군사(軍師)임을 내가 몰랐다면, 여기서 얌전히 물러섰겠지.

    철혈재상 라우라 데 파르네세.

    결코 좋은 별명이 아니다. 사실 브르타뉴의 적대국에서 만들어낸 별칭이다.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진 재상 주제에, 만날 전쟁터를 싸돌아다니며 피바람을 몰아친다.' 대충 그런 뜻이다.

    “하지만 파이몬, 저는 그녀의 후견인입니다. 저로서는 그녀의 재능에 판돈을 걸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저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진다고요? 농담이겠죠, 단탈리안.”

    “예에, 농담입니다. 단지 만약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후견인이란 그런 만약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믿지 않을지언정 나만큼은 그녀를 믿어주고 싶습니다.”

    “정말, 사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헷갈린다니까요.”

    파이몬이 기가 막혀 했다.

    “단탈리안. 저는 사령관의 한 사람으로서 도에 지나친 전술은 수용할 수 없사와요.”

    “자아, 자. 파이몬. 여기서는 제 체면을 봐주십시오. 간단하게 생각해보세요. 기껏해야 별동대를 한번 운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흐음. 그렇지만요.”

    파이몬은 여전히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하여간 이런 지점에서 사람 성격이 드러났다. 공화국 하나 건국하는 데 수백 년씩이나 신중하게 행동한 마왕다웠다.

    내가 은근슬쩍 말했다.

    “이건 어떻습니까? 만에 하나 라우라가 성공한다면 파이몬이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고, 라우라가 실패할 경우에는 제가 파이몬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것이.”

    “……소원이요?”

    파이몬이 눈을 깜빡거렸다.

    “예. 상대방이 들어줄 수 있는 한도에서 무엇이든지.”

    “무엇이든지…….”

    파이몬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숙고했다.

    “가령, 제가 단탈리안의 손가락으로 된 목걸이를 갖고 싶다고 말하면……들어줄 건가요?”

    “예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아가씨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파이몬이 부채를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저 예를 들어서 한 말이와요. 손가락을 내놓을 정도의 각오를 갖추고 소녀에게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 것인지 궁금해서요.”

    “아니, 뭐. 물론 가능합니다. 제 손가락에 천금의 값어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어차피 다시 자라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변태적인데.

    내가 바르바토스한테 그렇게 만들어준 목걸이가 하나 있긴 있다. 설마 바르바토스가 여마왕들한테 그걸 자랑하고 다니니까 막 유행처럼 번진 걸까?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 대박 유행, 이라는 느낌으로.

    ……그런 물건이 유행할 리 없다고 딱 잘라서 말하기가 어렵군. 마왕들은 죄다 변태니까 말이다.

    정말이지 무서운 동네다. 어머니께서 지금 내 모습을 보시면 방바닥을 두들기며 '어째서 내 착한 아들이 저런 변태들과 어울리게 되었을까!' 하고 슬퍼하시겠지. 불효자가 되어버려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좋아요, 단탈리안. 기꺼이 내기를 받아들이겠어요.”

    “……감사합니다.”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지만 감사를 표했다.

    이 계절에는 하얀 바다에서 서풍이 불어왔다. 동풍은 드물게 불었고, 이틀 이상 지속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다. 그러나 요새가 포위된 지 두 달이 지날 즈음해서 동풍이 강하게 부는 날이 있었다.

    라우라는 즉시 군사회의를 요청했다.

    “오늘이 결행일입니다. 시트리 언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응.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깨부수고 난장판으로 만들면 그만이지?”

    다녀올게, 하고 시트리가 씩씩하게 나섰다. 늑대를 탄 다크엘프 오백이 빠져나갔다.

    파이몬이 여전히 의뭉스럽다는 얼굴이었다. 파이몬은 라우라의 계책에 동의했지만 그와 별개로 만약 화공선단이 접근했을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 다리 근처에 물의 정령을 육십 마리나 배치시킨 것이었다.

    반나절이 지나고 시트리가 돌아왔다.

    시트리는 전신이 피로 덮혀 있었다.

    “우와! 정말로 마을에 갤리선이 잔뜩 있던걸! 안에 뭘 실었는지 불화살 몇 방 쏴주니까 활활 타오르더라구. 덕분에 칼도 몇 번 휘두르지 않았는데 지들끼리 불에 타서 난리였어. 헤헤,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광경이더라.”

    시트리가 방실방실 웃으면서 자랑스럽게 전과를 떠들었다.

    슬쩍 옆을 쳐다보니, 파이몬이 부채로 가리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을 벌렸다.

    “참. 마법사도 아홉 명 있더라.”

    하고 시트리가 왼손에 들고 있던 것을 막사 바닥에 내던졌다. 머리통 아홉 개가 줄줄이 묶여 있었다.

    “포로로 잡으려고 했는데 끝까지 반항하는 게 귀찮아서 그냥 다 죽였어. 나 잘했어?”

    “예, 잘하셨습니다. 역시 시트리 언니군요. 완벽한 수행 능력입니다. 수급만 따로 취하신 것에서 시트리 언니의 미학적인 수준마저 엿보입니다.”

    라우라가 화사하게 웃었다.

    “…….”

    파이몬이 귀신이라도 목격한 표정으로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뭐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단어가 나오지 않는 듯이 몇 번 입을 뻥긋거리더니, 이윽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방긋 웃었다.

    소리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내.기. 기억하시죠? 나중에 하나 들어주셔야 합니다?’

    파이몬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래서 부하는 잘 두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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