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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57화 (257/510)
  • 00257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우선 전함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였다.

    바타비아 공화국……그러니까 사실상 파이몬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국가는, 최강의 해군을 자랑한다. 순전히 정부에 소속된 대형 갤리선만 헤아려도 무려 육십 척이 넘는다. 괴물 같은 해양국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파이몬이 간단하게 말했다.

    “우리 마왕군이 몰래 약탈한 걸로 위장하죠.”

    평화로운 시기에 대형 전함은 곧잘 무역용으로 활용되었다. 내륙까지 들어와서 장사하는 함선을 산악파의 수중 몬스터가 급습. 일곱 척을 여유롭게 강탈해왔다.

    일반 상인들이 몬스터의 앞니에 처참히 물려 죽은 것은 물론이었다.

    내가 어쩐지 우스워서 말했다.

    “바타비아가 소유한 함선 아닙니까? 따지고보면 파이몬의 물건을 파이몬이 훔친 꼴이군요.”

    “어머나. 저는 공화국을 제 사유물이라고 여기지 않는답니다? 국가의 사유화는 참주정으로 가는 지름길인걸요.”

    파이몬이 싱긋 웃었다. 참주정이란 독재국가 비스무리한 물건이다.

    “시민 여러분의 물건을 잠시. 아주 잠시 빌릴 뿐이에요.”

    “잠시 동안 빌리는 와중에 함선에 타고 있던 상인들이 떼로 몰살당했습니다만…….”

    “그 사람들, 번번이 독점을 유도해서 시장을 엉망으로 만드는 상회 출신이거든요. 언제고 기회를 봐서 몰살시키고 싶었어요.”

    파이몬이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살벌한 얘기를 꺼내었다.

    “정부 차원에서 싼값에 대형선을 빌려준다고 하니까 덥썩 미끼를 물던걸요. 이번에도 소도시들에 독점을 유발할 계획이었던 모양인데……후후. 쓰레기는 청소되기 마련이지요. 안 그런가요?”

    “하하하…….”

    이럴 때 파이몬이 마왕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와닿았다.

    파이몬은 이상주의자인데다 공화주의자인 주제에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쓰레기는 청소되어야 한다며 수백 명의 인간을 주저없이 강물에 빠트려 익사시켰다.

    이런 인물이 배후에서 감독했기에 공화국은 타락하지 않았겠지. 땅덩어리가 콩알만큼 작으면서도 열국과 대등한 국력을 자랑했다. 모르긴 몰라도 파이몬이 '청소'한 인간의 숫자가 천 명은 가뿐히 뛰어넘으리라. 그중에는 분명히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닌가.

    전함들을 쇠사슬로 꽁꽁 묶어서 일렬로 주르르 배치시켰다. 양쪽 강변에 튼튼하게 교각을 만든 다음, 중간에 전함들을 세워놓으니 과연 다리가 뚝딱 완성되었다.

    하이델베르크 요새주둔군이 ‘어? 어?’ 하는 사이에 포위된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요새주둔군은 별동대를 조직하여 다리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물줄기가 막히면 보급선이 끊겨버리며, 보급선이 끊겨버린 상태에서 포위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우리는 적이 공격해오리라는 사실을 빤히 예상하고 있었다.

    *  *  *

    “적군도 마왕군과 야전(野戰)에서 붙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알고 있을 터입니다.”

    이제 최고 참모로 발탁된 라우라가 우리 마왕들 앞에서 말했다. 그녀가 바르바토스의 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꽤나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므로, 파이몬이나 시트리도 꽤나 정중하게 라우라를 대접했다.

    “틀림없이 기사단을 주력으로 삼아 소수정예를 활용하겠지요. 제일 강력한 부대를 구성하여 일점돌파한다. 그것이 요새주둔군의 계획입니다.”

    “곤란하네요…….”

    파이몬이 부채를 천천히 펄럭였다.

    “기사단은 위력적이에요. 아군이 패배하진 않겠지만 피해가 막심할 텐데.”

    “예. 허나 피해없이 기사단을 궤멸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헤에.”

    시트리가 팔짱을 끼고 재밌다는 듯 라우라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나도 어디 가서 쫄릴 만한 마왕은 아니지만 기사단은 싫은걸. 아가레스가 아니고서야 피해없이 기사단을 전멸시키기란 불가능해. 천하의 바르바토스도 그건 어려워.”

    “외람된 말씀이오나.”

    라우라가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아군은 현재 적군이 어느 곳을 공격해올지, 어떤 부대로 공격해올지 모두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미 아군이 절반은 이긴 상태라 판단해도 좋습니다.”

    “좋았어, 단탈리안의 군사 양. 한번 작전을 말해보라구.”

    “존명.”

    라우라가 군사지도를 가리켰다.

    “마법사 전대를 동원하여 네카어 강 주변 일대를 모두 뻘밭으로 만듭니다. 기사단은 십중팔구 기습의 효과를 살리기 위하여 야간에 기습해올 터. 그러나 전마(戰馬)가 제아무리 무시무시할지라도 다리가 뻘밭에 빠져버리면 무용지물입니다.”

    “…….”

    “전장이 강변인 만큼 마법사들도 마음껏 수마법을 쓰겠지요.”

    라우라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카어 강은 기사단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그녀의 예측은 무서우리 만치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하이델베르크에 주둔하던 기사단은 야밤을 노려서 다리를 노려왔다.

    나중에 헤아려보니 육백 명 가까이 기사단을 이끌고 왔는데, 요새주둔군의 기사단 전력 중에 2/3이나 동원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근처의 다른 도시들이 원군을 보냈다.

    전부 합쳐서 물경 천오백 명의 기사단이 야습했다. 기사단이라 해도 대다수는 견습기사 혹은 아카데미아 견습생으로 이루어졌지만, 이들마저 최고급 기병임에는 분명했다. 그들은 재빠르게 쳐들어와서 다리만 불사지르고 빠질 계획이었다.

    “돌격하라! 통령 각하의 명예를 위하여!”

    “공화국 만세! 통령 각하 만세!”

    그러나 라우라가 의도한 대로 전장은 온통 진흙탕으로 변모해 있었다.

    힘차게 달리던 전마가 갑작스레 뻘밭에 가로막혀 속도가 죽어버리자 기사단은 당황했다. 그러나 눈앞의 목표물인 다리를 향해서 용감하게 전진했다. 즉, 그들은 전쟁에서 용기란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님을 증명하게 된 것이었다.

    “말을 위주로 공격하십시오.”

    라우라가 다리 위에 자리한 사령부에서 차분하게 명령했다.

    아군은 적들이 뻘밭에 진입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 세례와 투창 세례를 퍼부어주었다. 오크가 온힘을 실어 날려버리는 투창에 전마들이 통째로 꼬챙이가 되어 절명했다.

    우리가 미리 설치해둔 말뚝, 목책, 여기에 진흙탕까지. 기사단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전진했으나 우리쪽에서 쏘아대는 화살과 투창에 전마가 속속들이 쓰러졌다. 어쩌겠는가? 말에서 내려 돌격해야지.

    기사단은 무거운 중갑을 걸친 채로 뻘밭을 헤엄치게 생겼다.

    시트리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파안대소했다.

    “이거 걸작인데! 단탈리안, 저것 봐! 꼭 애벌래들 같잖아!”

    음. 사람들이 떼죽음 당하는 광경을 가리켜 낄낄거리는 걸 보면, 시트리도 마왕스러운 감성의 보유자였다. 마왕군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역시 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기사는 뻘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러를 활용하여 마치 메뚜기처럼 돌격해왔다. 문제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전열을 이루어서 돌격해오지 않는 이상 소수의 기사는 딱히 전쟁 차원에서 무서울 게 없었으며, 시트리가 이끄는 몬스터 부대에 의해 사냥당했다. 검의 주인이 떼거지로 달려들지 않는 이상에야 별 도리가 없겠지.

    이날 밤, 기사단은 열여섯 번이나 돌격을 감행했다.

    브르타뉴 왕국군만큼은 아니어도 합스부르크의 기사단 또한 대단했다. 하지만 브르타뉴의 경우와 다르게 그들에겐 전술적인 이점이 전무했다. 우리가 쏟아붓는 화살 세례에 천천히 죽어나갔다.

    “으응. 사백 마리 정도 도망친 것 같은데, 쫓을까?”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적군의 핏물을 시뻘겋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예. 중갑을 껴입은 채로 도망쳐봤자 속도가 느릴 것입니다.”

    “확실하게 사살해두라는 얘기지? 헤헤, 너 인간인데도 참 마음에 든다. 단탈리안이랑 바르바토스가 왜 아끼는지 알겠어.”

    시트리가 라우라의 등을 빵빵 두들겼다. 당연하게도 시트리의 무력은 장난이 아닌 수준이었고, 라우라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거의 바닥에 코를 박을 뻔했다. 시트리가 싱글벙글 웃었다.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도 좋아.”

    “화, 황송합니다……시트리 님.”

    “에이 참. 언니라고 부르라니까!”

    라우라가 약간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시트리 언니.”

    “그래, 그래. 헤헤.”

    시트리가 신나게 환호하며 늑대에 올라탔다.

    “이제 난 바르바토스 애인의 언니야! 바르바토스 애인의 언니라구! 아싸라비야!”

    그녀는 늑대기병을 이끌고 순식간에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

    “…….”

    사령부에 남겨진 파이몬과 나, 라우라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서야 파이몬이 멋쩍게 중얼거렸다.

    “저기, 데 파르네세 양? 시트리한테 악의가 있는 건 아니와요. 정말로 단순히 바르바토스의 애인과 자매가 되어보고 싶었을 뿐일 거예요. 저 아이, 바르바토스한테 마음의 빚을 느끼고 있어서요.”

    라우라가 애매하게 웃었다.

    “시트리 님께서 진심이라는 것을 소녀도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소녀는 도대체 전생에 무슨 업을 쌓았길래 마왕 전하들의 애인이 되고 의동생이 되는 것인지…….”

    라우라가 동태 눈깔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요? 제가 뭘?

    “인간으로서는 최초 아닙니까? 훌륭하군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라우라.”

    “……하아.”

    왠지 모르게 라우라가 한숨을 쉬었다.

    가끔 이 아가씨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인단 말이지. 여자란 그런 것일까? 세상이란 참 신기해.

    *  *  *

    전투는 합스부르크군의 완벽한 참패로 끝났다.

    천오백의 기사단 중에서 살아돌아간 병력은 고작 이백 명이 안 되었다. 전멸이라는 낱말로 표현하기에도 지나치게 처참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완벽하게 자신의 재능을 입증했다.

    하이델베르크 요새주둔군은 이번 전투로 인해 기사단의 가용 전력을 모조리 소모했다. 남은 기사단은 요새를 지키기에 급급하겠지. 우리의 포위망이 단숨에 견고해졌다.

    이제 요새가 기대할 만한 원군은 중앙에서 직접 파견해주는 군사뿐이지만……미안하게도,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에는 본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부족하다.

    현재 엘리자베트 통령의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은 산악파뿐만이 아니다. 바르바토스의 평원파, 마르바스의 중립파, 가미긴, 세 세력이 전부 합스부르크 공화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것이다.

    정국이 이러하기에 엘리자베트 통령은 거점마다 요새를 확보해두었다. 요새들을 방어하는 방법을 택하여 전비를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뒤집어 말해, 요새를 방어하는 것 이상의 전략을 쓰기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겠지.

    “그렇지만 적군이 아예 요새를 방관할 리 없습니다.”

    전투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며칠 뒤, 라우라가 다시 회의에서 발언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군부는 지극히 유능합니다. 전비가 들지 않으면서도 도시를 구원할 계책을 마련할 게 분명합니다.”

    “응? 그런 게 가능해?”

    시트리가 케이크를 집어 먹으면서 질문했다. 참고로 시트리는 케이크를 정말로 좋아했다. 어디에서 구했는지 몰라도 회의에서건 전장에서건 만날 과자를 먹으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예. 적군에 현명한 책사가 있다면 그는 이번 포위전의 핵심이 어디까지나 다리를 파괴하느냐 마느냐,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것입니다. 다리만 파괴할 수 있다면 굳이 기사단이나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없지요.”

    “으으응……잘 모르겠는데.”

    시트리는 여전히 얼굴 표정에 물음표를 띠고 있었다.

    막사 안의 공기가 포근해졌다. 여하간 시트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정체불명의 따뜻한 마음을 불어넣는 재주가 있었다.

    “제가 적군의 참모라면 대규모의 선단을 준비하겠습니다. 함선마다 기름을 잔뜩 먹인 짚단을 가득 실어 놓습니다. 이 선단을 전진시켜 다리에 충돌시킨 다음, 선단과 다리를 통째로 불태웁니다. 우리에겐 별다른 함선 전력이 없으므로 이들을 막아내기가 무척 어렵겠지요…….”

    라우라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만약 우리가 적의 의도를 파악해두지 못했다면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푸른 수국은 파르네세 가문의 문양입니다. 지난 날 파르네세 가문은 사르데냐 왕국에서 내전을 일으켰지만 패배하여 몰락했습니다. 이렇게 몰락하는 가운데 라우라는 성노예로 팔려갔지요.

    그리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던전 디펜스에 등장하는 모든 전투는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전투를 오마쥬하고 있습니다. 이번 챕터에 등장하는 전쟁은 두 전투, 아니 세 전투를 섞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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