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56화 (256/510)
  • 00256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단탈리안은 성격이 너무 악독하와요.”

    파이몬이 홍차를 홀짝였다. 얼굴이 태평하여 말이랑 표정이 달랐다.

    우리는 나룻배에 올라타 있었다. 하얀색으로 깔끔하고 단정하게 채색된 나룻배. 한없이 부드러운 물결을 그리면서 강을 타고 흘렀다. 물의 정령이 배밑을 잡고 이끌어주는 덕분에 편안했다.

    평화로운 한나절. 정령을 뱃사공으로 삼아 나룻배 유람을 즐긴다. 마왕이 아니라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사치이겠지.

    “조금 더 여성을 배려할 수 없겠어요?”

    “여성을 배려하라니. 저만큼 여자를 배려하는 남자가 따로 없습니다.”

    “아휴.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라도 않을 텐데요. 시트리, 어떻게 생각하세요?”

    “응?”

    홍차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과자만 먹던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파이몬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곤란하다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아, 그. 파이몬 언니의 말이 맞지만. 단탈리안은 정말 상냥하다고 할까……배려를 잘 해주는 편이라고 할까……으으. 미안해, 언니.”

    “이래서 여자의 우정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와요.”

    파이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는 언니, 언니 하고 귀엽게 쫓아오던 시트리가 남자한테 푹 빠져버려서는. 천 년 동안 자매로 지내오던 저보다 남자가 더 소중하다는 얘기이죠? 정말 실망이에요, 시트리.”

    “아, 아앗!”

    시트리가 과자를 내던지면서 허둥지둥거렸다. 퐁당, 하고 케이크가 강물에 빠졌다.

    “아니야! 단탈리안은 여자를 배려하지 못하는데다 나쁜 녀석이야! 언니 말대로 어찌나 악독한지 머리카락 냄새만 나도 여자들이 죄다 줄행랑쳐버릴 지경인 거야! 여신들도 지상에 단탈리안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벌써 지상을 살피지 않은 지 오래되었대.”

    시트리가 제 딴에 만족했는지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그 순간, 파이몬과 내가 눈짓을 나누었다.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확실하게 의사를 교환했다.

    “응, 단탈리안은 나빠. 언니 말이 옳아.”

    “……너무하는군요, 시트리.”

    내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시트리가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저 상처 받았습니다.”

    “아? 어라?”

    “세상 만인이 저를 손가락질하며 욕할지라도 시트리만큼은. 그래요, 시트리만큼은 저를 끝까지 믿어주고 응원해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시트리도 저를 천하의 나쁜 놈이고 상종하지 못할 녀석으로 여기고 있었군요…….”

    시트리가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야! 절대 아니야! 단탈리안, 그러니까 이건 언니 때문에!”

    “파이몬 때문이라고요? 파이몬 때문에 진심에도 없는 걸 지어서 말했다는 겁니까?”

    “으……으응.”

    내가 날카롭게 시트리를 노려보았다.

    “시트리는 만약 누군가가 시키면 진심에도 없는 말로 저를 험담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시트리에게 있어 저 단탈리안의 존재란 겨우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군요. 여신이시여, 저는 그동안 시트리를 진정한 친우라고 생각했거늘……!”

    “으아아? 으아에?”

    시트리가 안절부절하지 못해서 내 손을 덥썩 붙잡았다.

    “미, 미안해. 단탈리안. 난 너가 상처받을 줄 모르고……언니가 화날까봐 무서워서, 그냥 무심코……미안해. 진짜루 진심이 아니었어!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잠깐만요. 시트리. 그게 무슨 말이와요?”

    파이몬이 옆에서 불평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시트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시트리는 진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이 방금 저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요?”

    “어, 언니야? 그게 아니라.”

    “실망이와요. 정말로 실망이와요. 아아, 시트리가 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파이몬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참고로 이 세계에 와서야 깨달은 사실이다만, 귀족 부인들이 부채를 들고 다니는 이유는 장담하건대 저런 식으로 한숨을 쉬기 위해서였다. 부채로 입을 가린 다음에 대놓고 한숨을 쉬면 엄청나게 재수없었다. 상대방을 빡치게 하는 데 이만한 제스처가 없었다.

    “더 이상은 시트리를 믿지 못할지도 모르겠네요. 우정에도 녹이 스는 법인걸요.”

    “으……으으!”

    결국 시트리가 폭발했다.

    “언니도, 단탈리안도, 전부 미안해요! 사죄하는 의미에서 제가 배를 몰 테니까 부디 용서해주세요!”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나룻배가 휘청거렸다. 우리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시트리는 그대로 강물을 향하여 다이빙했다.

    “꺄아.”

    물방울이 거하게 튀어오르자 파이몬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저건 연기였다. 시트리에게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나는 파이몬이 부채 너머로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미소 짓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파이몬. 표정을 관리하셔야죠.”

    “그러는 단탈리안도 히죽거리고 있는걸요?”

    “어이쿠야.”

    이런. 시트리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그만 방심해버렸다.

    우리 두 사람은 쌍으로 방긋거리면서 시트리를 바라보았다. 시트리는 헤엄치며 나룻배를 뒤쪽에서 밀고 있었다. 물의 정령이 이끌어주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빠른 속도로 나룻배가 나아갔다.

    시트리는 헤엄을 치는 와중에도 간간이 소리쳤다.

    “미안해요! 파이몬 언니, 미안해! 단탈리안, 미안해!”

    그 광경을 보고 누구인들 웃지 않겠는가. 마침내 우리는 빵 터져버렸다. 웃음소리가 공중으로 퍼져올라 햇빛 속으로 찬란하게 흩어졌다.

    “음. 가끔은 이렇게 뱃놀이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군요.”

    “홍차랑 과자가 전부 엎어졌지만요. 이렇게 세 명이서 즐기는 것도 오랜만이와요.”

    “여러모로 바빴으니 말입니다.”

    파이몬이 다소곳하게 미소를 지었다.

    “덕택에, 총 서른세 곳의 자유도시가 들어섰어요.”

    해방동맹은 프랑크 내전에서 크게 패배했다. 그러나 앙리에타라는 희대의 영웅이 어디에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폴리투니아 왕국, 튜튼 왕국, 사르데냐 왕국……각 지방에서 민중이 성공적으로 봉기하였다.

    순짜 농민이 혁명을 성공시킨 곳도 있었다. 길드 마스터나 신진 귀족이 주도하여 혁명한 곳도 꽤나 많았다. 그리하여 현재 대륙에는 자유도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파이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결국,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는 건 실패했지만요…….”

    “무엇이든 처음부터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파이몬. 이것이 비록 우리에게 있어 자그마한 발걸음으로 여겨질지언정, 역사에 있어서는 위대한 도약이 될 것입니다.”

    “…….”

    파이몬이 멍하게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끔씩 단탈리안은 깜짝 놀랄 만큼 멋들어진 말을 하네요. 예술적인 재능이 전무한데도. 신기해요.”

    “모르셨습니까? 상대를 진심으로 위로하고자 하면 무사 여신들께서 저절로 은혜를 내려주시는 법입니다.”

    내가 손을 뻗어서 파이몬의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파이몬은 어머나, 하고 부채로 입을 가렸다. 별로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정말. 이런 식으로 또 어제 누구를 홀렸나요?”

    “제 솜씨가 미진한 탓인지 어제는 영 운수가 나쁘더군요. 밤자리가 외로워서 혼났습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놓치지 않을 작정입니다.”

    “어머나.”

    파이몬이 기쁜 듯이 꺄르르 웃었다.

    나는 내친김에 손을 슬쩍 위쪽으로, 더 위쪽으로 옮겼다. 손목을 잡았다가 팔을 스르륵 쓰다듬었다. 파이몬은 마치 고양이가 몸을 가져대듯이 기꺼이 나의 손길을 허락했다. 이윽고 파이몬의 붉은색 머릿결을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솔직히 말씀드려, 이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만.”

    “예에. 소녀도 나룻배에서 한 적은 없으니 기대되지만요.”

    “아무래도 목적지에 벌써 도착해버린 것 같군요.”

    우리가 눈길을 돌려 강변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도시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오른다는 표현은 약간 과격할까. 시꺼먼 연기가 대여섯 줄기 피어올랐다. 수천 마리의 몬스터가 창칼을 쥐어잡고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다.

    “드디어 일 년 만에 하이델베르크를 점령하는군요.”

    “대륙 중부에서 제일가는 요새도시였으니까요. 고작 일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사와요.”

    하이델베르크는 접경 지대의 요새였다.

    네카어 강을 끼고 완성된 이곳은 합스부르크 공화국……엘리자베트 통령의 국가가 각별하게 신경을 써서 관리하는 도시였다. 마왕군이 더 이상 대륙을 침범할 수 없도록 만들겠다며 호언장담하며 쌓아올렸지.

    솔직히 말해, 하이델베르크는 난공불락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성벽 자체가 두텁고 높았다. 사방을 해자로 둘러싼 데다 성탑이 뺴곡하게 들이찼다.

    여기에다 규모까지 컸다. 요새 안에서 거주하는 시민만 해도 일만이 넘었는데 이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세상에 어느 요새에 시민이 일만이나 산다는 말인가?

    그 시민들이 전부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 이골이 난 병사. 여기에다 기사단이 자그마치 구백 명.

    월맹군 전체가 휘몰아친다면 또 모를까, 현재 월맹군은 끝장나 있었다. 파이몬과 시트리는 이곳을 산악파의 군세만으로 점령해야만 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산악파는 지난 전쟁에서 최선봉에 서느라 전력 소모가 극심했다. 게다가 이 년 전에 일어난 내전에서 또 한번 전력을 소모했다. 저런 괴물 같은 요새를 거꾸러트릴 힘이 없었다.

    “요새를 포위하면 될 것 아닌가.”

    이때 라우라가 계책을 내놓았다.

    요새가 너무 난공불락이라 곤란하다며 파이몬이 내게 상담했고, 나는 곧바로 라우라한테 상담했다.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하던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요새는 네카어 강을 옆에 끼우고 있습니다. 설령 도시를 포위하더라도 적군은 강줄기를 통하여 계속해서 보급품을 전달받겠지요.”

    “그러니까, 주군. 바로 그 강줄기를 봉쇄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흐음?”

    네카어 강은 강폭도 오육백 미터에 이르렀다. 그걸 무슨 수로 완벽하게 틀어막는가.

    “뭐, 감시선을 배치하면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만……합스부르크 공화국 군대는 유능합니다. 야간처럼 감시가 어려운 시간대를 활용해서 보급하겠지요. 그런 것까지 완벽하게 막아내기란 불가능하죠.”

    “나 참. 주군은 정말 전술에는 둔하군.”

    라우라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감시선을 푸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강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아버린다. 허면 애시당초 보급선이 오갈 수도 없을 것 아닌가.”

    “네?”

    다리를 만들어서 강줄기를 봉쇄해?

    “……강폭이 그리 넓은 곳에 다리를 놓으려면 어마어마한 인력과 자원이.”

    “굳이 제대로 된 다리를 만들 필요는 없다. 교각을 확보해두고 전함들로 다리를 이어붙인다. 봐라, 주군. 훌륭한 다리가 완성된다.”

    “…….”

    내가 고심에 잠겼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써먹었던 것처럼 전함들을 서로 이어붙인다는 것이다. 나룻배로 임시적인 다리를 만드는 일이야 흔했지만 거대한 전함으로 똑같은 일을 행하는 것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지나치게 엽기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가능하겠군요. 아니, 반드시 성공합니다. 바타비아 공화국은 우리의 편. 몰래 그쪽 강줄기를 거슬러서 전함을 끌어오면.”

    “아아. 포위망이 완성된다.”

    라우라가 빙그레 웃었다.

    “하이델베르크가 제아무리 대륙 중부 최강의 요새라 한들 완벽하게 이루어진 포위망에서 몇 년이나 버티겠는가? 기껏해야 일 년이다.”

    “요새를 함락하느라 전전긍긍하느니 차라리 느긋하게 일 년을 기다리는 편이 낫다…….”

    “바로 그것이다.”

    나는 곧바로 라우라의 계책을 파이몬에게 타전했다.

    파이몬과 시트리는 처음 내 얘기를 듣고 어디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았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얘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두 마왕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으응, 너무 기발한 계책이라서 불안한 면이 있지만.”

    “확실히 그럴듯하네요. 좋아요, 단탈리안. 그 계책을 전격적으로 수용하겠사와요.”

    역사상 유례가 없던 방식의 요새포위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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