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55화 (255/510)
  • 00255 세상에서 제일 빠른 남자  =========================================================================

    “괜찮네.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야.”

    나는 소파에 편하게 등을 기대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쓰다듬으며 소녀의 얼굴을 내 얼굴에 꾹 눌렀다. 그래서 나 역시 그녀의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아직은 거짓말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사막을 걷는 낙타처럼……느릿느릿하지만, 단 한발자국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렇게 기나긴 밤을 지새다보면 멀리서 천천히 새벽이 온다.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일세.”

    나는 한껏 상냥하게 속삭여주었다. 마치 주술사가 소녀에게 최면을 걸듯이. 내가 당신을 오롯하게 받아주겠다는 듯이.

    “모든 것, 정말로 모든 것이. 이바르 로드브로크. 긍지 높은 진조여.”

    “…….”

    문득, 소녀가 젖은 눈망울로 이쪽을 흐릿하게 올려다보았다. 우리 두 사람의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촛불이 어둠을 더 어둡게 했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오롯하게 나만을 비추고 있었다.

    소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전하.”

    그것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모를 만큼 난 둔탱이가 아니었다.

    서로를 이해한 남녀. 앞으로 함께 걸어가기로 맹세한 두 사람. 어두컴컴한 방, 촛불 그리고 온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끈덕지근한 술향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나의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눈을 감았다. 연한 분홍빛의 입술이 매끄러워 보였다. 나는 그러나 그곳으로 향하지 않고, 그저 자그마한 이마에 스치듯이 키스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눈을 깜빡거렸다.

    “어째서…….”

    “나는 그대처럼 소중한 아가씨를 술기운에 품을 정도로 무례하지 않네. 이바르 로드브로크.”

    내가 미소를 화사하게 지었다.

    안 그래도 빨간 소녀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띠링, 하는 효과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흡혈귀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가 14 오릅니다!」

    정말 처음으로 그녀의 호감도가 올라갔다. 상급마족 중에서 상급마족인 히로인의 호감도가 한꺼번에 14씩이나 오르다니. 분명히 호감도 한계선이 깨진 것이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시선을 피하면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저기……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옵고……황송하옵니다만 단지, 그것이…….”

    “자네, 이제보니 제법 귀엽군.”

    “……!”

    소녀는 얼굴이 다시 한번 화악 붉어졌다. 인간이 어디까지 빨간색에 접근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호감도가 2 올랐다는 홀로그램 알림창이 추가로 떠올랐다. 그야말로 호감도 대박 잔치였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나한테서 벗어나려 팔을 마구 움직였다. 별반 소용은 없었다. 술에 취해서 손짓이 엉망진창으로 흐느적거렸고, 내 몸을 밀어내지 못해 쉽게 미끄러졌다.

    “저, 전하. 밤이 지나치게 깊었나이다. 소인은, 그러니까. 소인은――흐읍!?”

    그녀는 말을 다 끝마칠 수 없었다. 내가 도중에 막아버렸다.

    다가올 때 상냥하게 밀어주고, 물러갈 때 과격하게 쫓아가준다. 그것이 내가 즐겨쓰는 전술이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생각치도 못한 일격에 눈이 동그랗게 떠져서는 팔을 휘저었다. 저항이라기에는 적이 나약했다.

    “읍……흐읍, 하아. 잠깐……으읍.”

    입술이 겹치고 혀가 얽혀들었다. 순간적으로 틈새가 벌어질 때마다 그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입속은 밤새도록 마셨던 미주처럼 감미로웠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밀어내는 소녀의 팔에서 힘이 스르륵 빠졌다.

    그걸 확인하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내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어떤가. 이제 술이 조금 깨었는가.”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부끄러움에 목소리마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자가 몸을 허락할 경우 정말로 진심으로 허락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분위기를 타서 허락해버렸는지, 두 경우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이 여자와 하룻밤 즐기고 말 생각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기나긴 시간을 쌓아올릴 생각이라면 쌍방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시작해야만 한다.

    그걸 판단하는 것은 보통 매우 어렵다. 서로 술에 취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흡혈귀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가 14 오릅니다!」

    세상에는 정말이지 이상한 방법으로 진심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라든지.

    “으응…….”

    나는 소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재차 키스했다. 이번에는 이쪽을 밀어내려는 반항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중력에 이끌려 소파에 누웠다.

    그날밤, 수천 년 동안 남자를 잊어버린 채 살아온 소녀는 쾌락이 무엇이었는가 철저하게 기억해냈다.

    *  *  *

    소파에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나신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으응, 응……흐으읏…….”

    쾌감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는지 잠결에 간간이 신음했다. 격렬한 정사의 흔적이 허벅지, 머리카락, 가랑이에 흘러내렸다. 촛불에 드문드문 비치는 새하얀 몸이 오히려 눈부셨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몇 번 쓰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우우.”

    연초를 빨았다.

    “……이제 막 여자로 돌아온 녀석한테 좀 심했나.”

    약간 과하게 굴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평소에 라우라를 상대하다보니까 기준치가 너무 높아져버렸다. 이제 성노예 레벨이 놀랍게도 S를 찍어버린 라우라는, 하루종일 몸을 섞어도 두어 번 기절할지언정 끝까지 날 상대해주었다.

    라우라와 나 사이에는 기본이 여섯 시간이었다. 거기에 익숙해져버린 내가 그만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고 폭주했다. 아이고,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의 몸으로 돌아온 걸 고려했어야 하는데!

    결과는 자명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아예 혼절해버렸다.

    “으으. 첫경험에 너무 과격한 기억을 심어주게 되었네.”

    바보 멍청이 머저리 녀석.

    물론 엄밀히 말해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처녀는 아니었다. 애당초 마왕에게 복수하기로 맹세한 이유가 과거의 연인 때문이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이미 수천 년이 흘러버렸다. 말하자면 처녀에도 유효기간이란 게 있어서, 수천 년 정도 여자로서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냥 도로 처녀로 취급해야 마땅했다. 마치 천년동정 벨레드 형님이 여전히 동정이듯이.

    그만큼 배려를 해줘야 했는데, 씁. 게임의 정식 히로인이 내 품안에서 쌩으로 헐떡이는 광경을 보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브레이크가 박살나버렸다. 뭔가가 폭발했다.

    소파에 힘없이 쓰러진 소녀를 보며, 내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적어도 씻겨라도 줘야.”

    나는 손수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적당한 통을 구해다가 물을 채워넣었다. 그리고 벽난로에 달구어진 돌을 물통에 빠트렸다. 수증기가 일어나면서 물이 데워졌다. 뜨거운 물 완성!

    망토자락을 찢어서 임시로 수건을 만들었다. 이 수건을 뜨거운 물로 적셔서 조심스럽게, 잠이 깨지 않도록 천천히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몸을 닦아주었다.

    “흐흐흥, 으흥.”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딱히 괴로운 노동이 아니었다. 도리어 즐거웠다. 아름다운 여자아이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주는 일을 마다할 남자는 단언컨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걸.

    “으응……흣…….”

    중간중간에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신음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얇은 팔뚝과 매끄러운 종아리, 야트막하게 부풀어오른 가슴까지, 따뜻한 수건으로 씻겨주었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예의였다.

    만약 여자가 격렬하게 한판 뛰고 정신을 잃었다고 해보자. 힘겹게 깨어났더니, 이게 웬걸. 자기 몸이 끈적끈적하고 미끌미끌한 액체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별안간 인생 최악의 기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으으으.”

    신이시여, 상상만 해도 정말로 끔찍하군…….

    부디 세상의 모든 여자가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어젯밤에 폭주하여 배려하지 못한 나로서는 적어도 그녀에게 '괜찮은 아침'을 대접할 의무가 있었다. 뭐, 본편 내용이 과격했을지라도 정작 일어났을 때 기분이 좋으면 사람이란 '어젯밤은 멋졌어!' 하고 믿어버리거든.

    요컨대 이게 다 상대방이 나한테 좋은 이미지를 가지도록 사전 작업해두는 거다.

    “청소 완료!”

    잠시 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깨끗해졌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피부가 도로 새하얗고 미끄러워졌다.

    그녀를 소파에 눕힌 다음, 절을 올리듯이 손바닥을 합장했다.

    나는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잘 먹었습니다.”

    “흐응……끙…….”

    “정말 맛있었습니다.”

    오늘도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신 올림포스의 여신들께 삼가 감사를 아뢰오니.

    어제는 가미긴, 오늘은 이바르 로드브로크, 내일은 또 파이몬과 시트리가 예정되어 있사오니 이야말로 여신들의 축복이요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아프로디테 여신님의 미천한 종으로서 다만 여신께서 세상에 명하신 대로 사랑을 실천하고 경작할 따름이오니, 만약 저에게 미진한 점이 있다면 아량을 베푸시고, 만약 저에게 칭찬할 점이 있다면 더더욱 큰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아멘.”

    나는 사제 시절에 배운 손놀림으로 성호 비스무리한 것을 그었다.

    사실 난 아프로디테의 사제가 아니라 아르테미스의 사제이고, 아르테미스 여신께는 아멘이라는 구호 따위가 전무하며, 심지어 여신께서는 다름 아니라 처녀와 순결의 수호신이시지만――나는 여신님의 뜻을 개혁교리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세상에 모든 처녀와 순결을 보다듬어 수확하거라.'

    원래 모든 종교에는 개혁적인 재해석이 필요한 법이다.

    “음, 끝났다. 완벽하군.”

    나는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내 망토를 이불마냥 살짝 덮어주었다.

    그리고 가뿐해진 몸으로 상회 건물을 나갔다.

    “흐으흥~. 진격하자 조국의 아들딸이여~.”

    여신님의 자비로우신 뜻에 오늘도 충실하게 따른 여파일까.

    상회를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으며 더없이 상쾌했다. 나는 기분좋게 팔자걸음으로 거리를 활보하며 담배를 피웠다. 시원한 아침공기와 향긋한 연초내음이 섞여들어 최고의 기분을 만들어주었다.

    “창칼을 잡으라, 시민동지들이여~. 으라라, 그대 부대의 앞장을 서라~.”

    햇빛이 내 몸에 환하게 부딪쳐왔다.

    이럴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세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는 생각이 들곤 한다.

    세상은 이처럼 아름답지 않은가?

    *  *  *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숨을 들이키며 화들짝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녀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방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소녀가 눈쌀을 찌푸리고 어젯밤 일을 기억해내려고 하자, 갑작스레 어마어마한 두통이 덮쳤다.

    “……으윽.”

    숙취였다.

    비로소 방바닥에 널린 술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른 병, 쉰 병, 일흔 병……상인으로서 몸에 밴 습관대로 물건의 숫자를 세었지만, 두통이 방해했다. 그녀는 일흔두 병까지 세고 포기했다.

    머리가 전혀 돌아가지 않는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좋은지,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단탈리안 전하를 뵙고…….”

    소녀가 사고가 아니라 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내뱉어진 것의 힘을 빌어서 차근차근 어젯밤 있던 일을 추적해나갔다.

    “내기를 해서……술을 마시다가……그리고…….”

    그리고 떠올랐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소리없이 절규했다.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현재 마왕군에서 가장 위험한 분자와 몸을 섞다니 제정신인가!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어떻게 그리 어리석게 행동할 수 있는가, 로드브로크! 멍청한 녀석!

    “……아니, 아니다. 손해만 있는 '거래'는 아니다.”

    소녀가 허겁지겁 혼잣말했다.

    “그래. 단탈리안 전하와 보다 깊은 관계를 맺으면 다른 측면에서 마왕군에 개입할 수가 있다. 바로 그런 점을 이제부터 활용해야 한다……좋다. 사랑에 빠진 숫처녀를 연기하여 전하를 속인 다음…….”

    너무 발버둥을 친 탓일까.

    무언가가 털썩, 하고 몸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기엔 상당히 고급스러운 망토가 떨어져 있었다.

    “…….”

    소녀가 망토를 집어서 끌어올렸다. 이것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단탈리안 전하의 망토였다. 그녀는 양손으로 망토를 펼쳐잡아서 한동안 그걸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슬그머니 망토에 코를 가져다댔다. 말없이 망토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

    다행히 그녀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