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53화 (253/510)

00253 세상에서 제일 빠른 남자  =========================================================================

“음……?”

“여쭈었나이다. 단탈리안 전하께서 진실로 그리 생각하시는지.”

내가 고개를 들어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화려하지만 어두컴컴한 방. 촛불 몇 개가 처연하게 흔들리고 있을 뿐인 공간에서, 흡혈귀의 보라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보석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 꼭 그처럼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시선이었다.

“……아니. 그건 아닐세.”

여기서 한 번, 사양해둔다.

마치 술이 깼다는 것처럼. 지금까지 술기운에 힘입어 말해버린 것을 급하게 돌리고 싶다는 것처럼. 나는 술자리가 시작되고나서 전혀 입술에 대지 않은 물컵을 잡았다. 그리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술을 깨려고 물을 마신다. 상대방에게는 그렇게 비추고 있겠지.

“자네도 알지 않는가. 내가 무엇이든 다소 과장해서 말한다는 것 말일세. 하하. 술자리에서 나온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곳은 술자리입니다. 고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내 술잔을 채워주었다.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쉬이 증발해버리지요. 전하께서 속에 품고 계신 이야기가 있다면, 불민한 소인이나마 들어드리는 것 정도는 해내겠나이다.”

“흐흐. 쿤쿠스카의 주인이 내 술친구인가. 본인도 참으로 출세했군 그래.”

여기서 또 다시 말꼬리를 돌려버린다.

“그래. 슬슬 본인의 마왕성에 판매점을 내는 것을 논해야겠어. 본인은 그대와 흥정을 할 생각이 크게 없네. 이렇게 본체까지 보여주었거늘 이쪽 나름대로 성의를 보여야지. 안 그런가?”

“……물론, 그래주시면 소인이야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소녀는 슬쩍 포도주를 마셨다.

방금 우리는 새로운 화제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상대방이 술을 마셨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술을 마실 때는 입구멍이 막히므로 당연하지만 대화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게 된다.

‘자아.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대체로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첫 번째, 상대방이 나에게 말을 양보한 경우. 요컨대 '그래, 새로운 화제에 대해서 당신이 어떻게 얘기하는지 한번 들어보자'라는 태도이다.

이것은 거의 본능적인 제스처이다.

제법 재밌는 일인데, 사람들은 상대방한테 동의를 표시하고 싶을 때 오히려 약간의 딴짓에 열중한다. 이바르처럼 술을 들이키거나, 시선을 상대방한테서 30도 정도 기울인다……. 이러한 제스처를 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렇게 딴짓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이야기가 너무나 올바른 나머지,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하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일부러 상대방한테 딴짓을 보여준다. 자신은 그 딴짓에 열중하고 싶지만 당신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실패했다. 그만큼 나는 당신의 말에 진심으로 집중하고 있다……. 대충 이런 의미이다.

따지고보면 꽤나 전술적인 제스처이지.

사람에게 진심이란 거의 언제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없는 진심을 가장하려면 소위 저 같은 '연극 도구'를 스스로 지참하는 수밖에 없다.

단, 지금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취한 몸짓은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

아까 전에 대화 타이밍은 내가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가 아니었다. 이쪽이 주제를 꺼냈으니 상대방이 받아쳐줄 순서였다. 그런데도 타이밍을 무시하고 술을 들이켰다…….

즉 두 번째 경우……나에게 의도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저에게는 현재 전하께서 입에 올리신 주제가 썩 흥미롭지 않습니다. 더불어서, 화제를 돌리는 것 자체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매우 공격적인 의사표현이다.

일상대화 속에서야 스리슬쩍 넘길 수 있으나, 지금처럼 정치꾼과 정치꾼이 대작하는 자리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복싱으로 따지자면 거의 라이트훅에 가깝다. 아마도, 이번 공격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할까 지켜보고 싶은 것이겠지.

‘좋아.’

여기까지 판단하는 데 이 초.

나는 물컵을 테이블에 도로 올려놓으면서 질문했다.

‘한 번 더 알아듣지 못한 척 무시할까? 어떨까? 좋은 대처일까?’

곧바로 머리 한 구석에서 비토(veto)를 발동했다.

‘아니. 지금 나는 술이 화급하게 깨어 있는 상태를 연기하고 있어. 잔뜩 예민해져 있는 거다. 상대방의 제스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아무리 표정을 관리해도 어딘지 억지스럽고 꾸며낸 듯한 구석이 생겨버린다.’

좋다.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선의 반응인가?

벌써 삼 초가 지나려 하고 있다. 테이블에 물컵을 거의 다 내려놓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네놈이 머리를 굴릴 대목은 이런 것밖에 없다, 멍청아. 얼른 해답을 내놔봐라. 상대방의 안색을 살피고 거기에 따라 아부하는 것이 네놈의 특기 아니냐!

‘침묵은?’

최악이로군.

세상에서 제일 작위적인 연기가 침묵이지. 질 낮은 배우들만이 침묵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간주한다.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아가라.’

그거다. 이제 좀 쓸만한 대안이 나오는구나.

나는 입가에 상냥하게 미소를 그리며 생각했다. 그렇다. 지금 이쪽은 막 술기운에서 정신을 차렸다. 자기가 진심을 너무 과다하게 내비쳤음을 깨달아서 절찬리에 후회하고 있다. 상당히 예민해진 것이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예, 전하.”

“먼저 본인이 말을 돌리려고 한 것에 사과하지. 그래, 분명히 본인은 우리 둘 사이에 신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네.”

그런 상황에서 상대편은 이쪽을 공격해왔다. 어찌해야 할까?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들개처럼 으르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정답이라 확신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망설여지는 것일세. 자네는 끝까지 본체를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어. 자네와 거의 똑같이 생긴 여자아이의 몸을 가짜로 구해다가 내세웠지.”

“전하, 그것은…….”

“자네를 책망하려는 게 아닐세.”

내가 가볍게 웃었다. 상대방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무얼. 자네와 어울린 지 벌써 몇 년이 되어가네. 나도 자네의 방식에 슬슬 익숙해졌어. 자네는 그렇게 시험과 시험, 관문과 관문을 마련해두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부류인 게야. 그래.”

“…….”

“하지만 자네도 이해해주길 바라네. 자네가 마지막까지 본인을 시험한 대가로 인하여 나 역시 마지막까지 쉬이 마음을 풀 수가 없게 되었어. 기껏해야 술의 힘을 빌려서 밀어붙이는 게 전부였지. 그래, 그게 전부일세.”

이제부터 초조해져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상대편이다.

사람이란 영악해서 자기가 생각하여 해답을 내린 것만을 정답이라고 여긴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야기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일단 의심한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특히 그런 경향이 강하다.

반면에, 자기 자신이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론을 내리면 곧 정답에 가깝다고 판단해버린다.

현재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걸린 문제는 오로지 하나――이쪽이 진심이냐 아니냐.

그걸 판단하기 위해서 소녀한테 주어진 재료는, 여태까지 내가 은밀하게 보여준 제스처들. 그리고 내가 처음에는 말꼬리를 돌렸지만 두번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사실…….

“좋습니다.”

짧게 양갈래로 묶인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금발의 소녀가 말했다.

“전하께서 술기운을 빌리셨다고 말씀하셨지요. 하오면, 오늘밤은 그대로 디오니소스께 가호를 받으면 되지 않겠나이까.”

“호오.”

내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말인즉슨, 자네가 나한테 코가 삐뚫어질 때까지 퍼마실 것을 정중하게 제안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겠는가?”

“그러하옵니다.”

소녀가 오른손을 들어 공중을 휙휙 저었다. 어느새 소녀의 손가락 끝에는 실들이 달려 있었는데, 촛불 빛에 반사되어 실들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그러자 방 저편에서 약 수십 개의 술병이 낚아채졌다. 소녀가 술병들을 잡아당겼다. 휙, 하고 빠르게 다가오는 그것들을 소녀는 망토를 펄럭임으로써 부드럽게 받아냈다. 환상적인 기예였다.

“대단하군!”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망토를 물건받이로 쓰느라 소녀의 하얀 알몸이 훤하게 드러났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망토에 감싸인 술병들을 하나하나씩 테이블에 올렸다.

쿠웅. 쿠웅. 쿠웅.

마치 성채처럼 우람하게 술병들이 차례대로 들어섰다. 그것이 서른 개가 넘어서자 과연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위력이 있었다.

“소인이 감히 판단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보통 말술이 아니십니다. 소인 또한 술자리에는 이골이 나 있지요.”

“보통 술로는 진솔하게 마음을 털어놓기 힘들다?”

“말씀 그대로. 지금 전하께 진상한 것들은 모두 화탕지옥에서 엄별된 독주 중의 독주이옵니다. 평범한 흡혈귀가 마신다면 한 병에 주정뱅이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하고 소녀가 당돌하게 말했다.

“저의 진심과 전하의 진심. 어느 쪽이 더 가벼울지, 승부해보시지 않겠습니까?”

“크흐.”

내가 재차 박수를 쳤다.

“이제야 멋지게 나오는군. 본인은 바로 지금과 같은 순간을 열망했다네, 쿤쿠스카의 당주여.”

눈앞의 소녀는 틀림없이 똑똑했다.

모든 대화를 기억하고 또한 판단하겠지. 바로 그 똑똑한 면모에 자신의 발이 걸려 넘어진다는 것을 모른 채.

“하옵시면.”

“아아, 승부하겠느냐고? 당연히 받아들이겠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진심이란 게 애초부터 없으니까.

이번 술자리에 털어놓을 진심이 있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이래봬도 바르바토스, 벨레드와 대작해본 몸이다. 마왕군에서 제일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겠지. 미리 말해두자면, 자네는 나에게 승부를 건 것을 후회할 것이야.”

“전하와 대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소인에게는 영광이거늘 후회가 어디 있겠나이까?”

우리는 지금 정확하게 정반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입장에서, 나는 이미 거의 모든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본체가 따로 있었다는 것. 그녀가 아주 예전에 마왕 때문에 연인을 잃었다는 것. 요컨대 나한테 들킬 본심 따위는 이미 없었다…….

어차피 본심이 전부 들켜버린 바에야 이제는 이쪽의 진심만 캐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 잃을 게 없는 싸움이라면서.

‘사실은 자네가 잃을 것밖에 없는 싸움이지만.’

원래부터 없는 진심을 캐내겠다고 승부에 뛰어들었다.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예컨대, 이바르 로드브로크.’

나는 담뱃대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자네는 내가 미리 <숙취를 해소하는 효과>가 있는 약초를 준비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지.’

담뱃대에 쑤셔넣은 연초에 약초가 절반 가량 섞여 있었다. 제레미를 달달 볶아서 마련해낸 비장의 수단이었다. 하나의 약초가 아니라 여러 개를 조합해서 새로이 만들어낸 물건이니 냄새로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후우.”

담배를 깊이 들이 마시고 내뱉었다. 점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 때문인지 모르겠어도 효과가 죽여주었다, 껄껄.

“그럼. 어디 신나게 마셔볼까.”

“예. 소인이 먼저 따라드리겠습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공손하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미 승부가 결정난 게임이지만 말이다, 원래 세상이란 그런 거다. 인생은 게임이다. 누가 승리할 것인지 미리부터 정해져 있다는 의미에서. 대기업이 카지노를 짓는 까닭은 결국 자신이 승리자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 시간.

두 시간.

이윽고 다섯 시간.

우리는 정말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술을 퍼마셨다. 서른 병은 동이 난 지 오래였고, 새롭게 서른 병, 다시 새롭게 서른 병이 추가되었다.

그리하여 눈앞의 소녀는.

“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바르으 로드브록? 취했는가? 취했어? 크하하.”

“아닙니다……전하야, 말로. 취하신 게 빤히 보입니다만.”

“아닌데! 전혀 아닌데!”

내가 깔깔 웃었다. 정말 술주정뱅이처럼 보였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든 나든 아까부터 혀가 꼬여서 숫제 중얼거리는 어투가 되어버렸다.

“자아, 이젠 자네 차례에. 자네가 마실 차례야!”

“좋습니다……갑니다앗!”

알몸의 소녀가 술병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호쾌하게 병나발을 불었다. 꿀꺽, 꿀꺽, 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더니 금세 한병이 또 비었다.

“크으! 이제에, 전하 차례입니다……!”

참고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언제부터인가 망토를 벗어재꼈다. 알몸인 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 가슴까지 붉어졌다. 완전무결한 술주정뱅이 소녀가 내 앞에 있었다.

나는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좋아! 잠깐만, 담배 좀 피우고 말이야아.”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으음.

실로 향기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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