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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52화 (252/510)
  • 00252 세상에서 제일 빠른 남자  =========================================================================

    나는 몸에 걸친 검은색 망토를 풀었다.

    “…….”

    소녀가 눈을 꾹 감았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져도 체념하겠다. 그런 느낌이 풍겨오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겉옷을 벗으니까 아마도 뭔가를 크게 착각한 것 같았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면서 그녀한테 다가섰다. 한 발자국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새삼스럽게 소녀가 얼마나 눈부시게 예쁜가 느껴졌다. 글쎄. 어쩌면 여자아이란 겉모습만으로도 눈부신 것일지도 모르겠다.

    망토에서 담뱃대만 꺼내 바지 주머니에 따로 챙겨넣고.

    나는 하얀 나신에 조심스럽게 망토를 걸쳐주었다.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가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뜻밖의 행동을 당했다, 하고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숙녀가 감기라도 들면 곤란하지.”

    “……영락없이 소인을 탐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아? 본인이 어디 무뢰한도 아니고 그대를 왜 탐하겠나.”

    어이가 없었다.

    그러자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송구하옵니다만, 전하께서는 소녀가 취향이시지 않았습니까? 바르바토스 전하도 그렇거니와 시녀로 두고 계신 여아를 고려하건대 틀림없이 그쪽 취향이라 판단했사옵니다.”

    “전혀 아니야.”

    어째서 세상에는 중상모략과 가담항설이 이리도 난무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성숙한 여인을 좋아한다. 설령 그쪽이 취향이라 할지라도 쿤쿠스카의 주인을 희롱할 만큼 내 생각머리가 부족하진 않네. 당연하지 않은가.”

    “으음. 과연, 보고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턱을 쓰다듬었다. 마치 그곳에 수염이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내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헛, 하고 손동작을 멈추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멋쩍은 듯이 헛기침을 하며 망토로 쓰윽 나신을 가렸다.

    “흠. 본체로 생활한 지 하도 오래되어 그만 버릇이 튀어나왔사옵니다. 용서해주시길.”

    몸짓뿐만이 아니라 말투 하나하나가 순 영감이나 진배없었다. 어린 여자애가 꼭 어거지로 어른 말투를 따라하는 것 같아서 재밌었다.

    “괜찮다. 따지고보면 그대를 이리 나오게 한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뭐, 그건 그렇고. 자네는 손님을 대접하는 게 영 엉망이로구만.”

    내가 근처의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직까지 포도주 한잔 내오지 않아서야! 이거 원, 자네와 친해질 수나 있겠는가.”

    “전하. 진심으로 저와 술을 대작하시기 위해서 행차하셨다는 말이옵니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양손으로 망토를 붙잡은 채 멀뚱멀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럼, 뭐? 본인이 자네 약점을 잡으려고 본모습으로 만나자 그랬는 줄 알았나. 누누이 말했을 텐데. 나는 그대와 잘 지내보고 싶다고.”

    내가 씨익 웃었다.

    “어디 쿤쿠스카의 주인이 손님을 대접할 때는 얼마나 고급스러운 술이 나올지 기대되는군. 부디 본인을 실망시키지 말아주게. 무척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야.”

    자아.

    게임을 시작하자.

    *  *  *

    꽤나 놀라운 점이지만, 나는 <던전 어택>의 히로인과 마주본 적이 없었다!

    물론 게임에서 등장한 여성 인물들은 엄청나게 많이 만나보았다. 그러나 정작 어느 누구도, 단 한 명도, 게임상 히로인은 아닌 것이었다.

    원통스럽게도, 나와 인연이 맺어진 인물들은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용사 주인공의 적대세력에 속해 있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대놓고 주인공과 적대적인 브르타뉴 왕국 소속.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시트리, 가미긴은 당연하게도 공략 자체가 불가능한 마왕.

    나는 게임에 등장하는 히로인들을 전부 공략해보았다. 어떻게 하면 그녀들을 농락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나, 하지만, 히로인이 아닌 여성들까지 공략하는 방법은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포도주를 들이키며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바르바토스도 파이몬도 시트리도 하나같이 호감도가 50에 머무르고 있지.’

    던전 어택은 참으로 빌어먹을 게임이다.

    모든 히로인에게 이른바 '호감도 락'이란 물건이 걸려 있다. 이것도 상당히 복잡한 시스템이지만, 간략하게 얘기해서 호감도 50과 호감도 99를 뛰어넘으려면 일종의 퀘스트가 필요하다고 보면 된다.

    이 퀘스트가 히로인마다 제각각 다르다. 거의 아무런 힌트도 없는지라, 플레이어는 히로인을 공략하고 싶다면 생노가다를 반복하여 조건을 만족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전부 알고 있다.

    주요 히로인들은 더럽게 퀘스트 알아내기가 힘들어서 팬사이트에도 공략 방법이 극소수만 올라와 있으며, 하루에도 제발 H씬 좀 구경하고 싶다며 징징거리는 게시글이 수십 개씩 올라올 정도였지만.

    나는 전부 알고 있다.

    게임에 주연과 조연을 다 합쳐서 등장하는 히로인만 세어봐도 72명이고, 그중에서도 엘리자베트 황녀의 진엔딩 같은 경우에는 히든보스인 바알을 깨트려야 한다는 최악의 제한조건이 붙었을 정도로, 모든 히로인의 공략법을 꿰뚫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나는 그러나 전부 알고 있다!

    바로 그 엘리자베트 진엔딩 하나 보겠다고 노가다에 노가다를 거듭한 게임폐인이 나다.

    “하하, 술맛이 각별하게 좋군. 과연 쿤쿠스카일세.”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옵니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지금 내 눈앞에서 최고급 포도주를 숨펑숨펑 퍼마시는 이바르 로드브로크는……당연하게도, 내가 호감도 락을 모조리 외우고 있는 히로인 중 한 명이다!

    오오. 여신이시여――.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테미스 여신께서 거두어주신 한 명의 사제로서 겸허하게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축복과 행운에 대하여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지금과 같은 기회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정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의 세계에 들어왔는데도 정작 히로인과는 한번도 떡을 쳐보지 못했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얘기냐는 말이다!

    “크흐. 이거 오랜만에 취하는군. 자자, 자네도 한잔 더 받게!”

    “물론이옵니다, 전하.”

    밤이 으슥해지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와 나, 둘 모두 술기운이 짙어졌다.

    마왕이나 흡혈귀나 술에 엄청나게 강한 족속이었다. 몸의 재생력이 술에 취하는 것을 방지해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묘한 경쟁심이 생겨서, 우리는 마치 생수를 퍼마시듯이 끊임없이 술을 위장에 채워넣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단순히 술자리가 계속되고 있다고만 생각하겠지. 벌써 세 시간이 넘도록 우리는 잡담만 떠들었다. 그녀는 언제 이쪽에서 진심을 드러낼 것인지,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바르.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다.’

    내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흡혈귀 인형술사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공략하는 첫 번째 관문. 여기에는 총 네 가지 조건이 방해물로써 단단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제1조건. 플레이어 캐릭터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단 둘이서' 술을 마실 것.

    제2조건. 플레이어 캐릭터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대작하기 시작한 지 게임 기준으로 최소 '세 시간'을 넘겼을 것.

    제3조건. 플레이어 캐릭터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처음 만나고서 게임 기준으로 최소 '일 년'이 흘렀을 것.

    제4조건. 플레이어 캐릭터가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특정한 이야기'를 들을 것.

    원래 히로인과 단 둘이서 술을 마시려면 호감도가 꽤 높아야만 한다. 호감도 없는 남정네와 여자가 밤 늦게까지 대작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문제는,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를 올리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내가 이쪽 세계에서 그녀와 함께 일한 지 벌써 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호감도가 20이 채 안 된 것을 봐라. 얼마나 난이도가 극악인지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나는 호감도와 상관없이 대작할 수 있는 지위를 갖고 있지.’

    꼼수라고 할까. 게임에서는 시스템적으로 엄격하게 지켜진 것을 여기서는 간단하게 지름길을 가로질러서 달성할 수가 있었다. 참고로 히로인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술자리에 어울려주느냐 역시 호감도와 관련되지만, 이 조건도 나는 간단하게 충족시켰다.

    ‘마지막 네 번째 조건을 만족시켜볼까.’

    내가 술에 잔뜩 취한 척 연기하며 말했다.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크크. 마왕이란 정말 빌어먹을 년놈들이야. 정말로 빌어먹을.”

    “전하?”

    “무얼. 자네도 알지 않는가? 보게. 제8차 월맹군이 일단락된 지도 벌써 한참이 지났어. 그런데도 제일 큰 공로를 세웠을 터인 내가 여전히 서열 제71위일세……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이기도 했으며, 아직 내가 진짜로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 판가름하기 어려웠겠지. 나는 더더욱 실감나게 술주정뱅이를 열연하며 소리쳤다. 실제로도 조금 취해 있었다.

    “바알이 공정하다고? 개 같은 소리도 그 정도면 훌륭하지. 뭣 때문인지 몰라도 내 서열을 올려주기가 싫은 거야. 제기랄. 바알이든 뭐든 결국 마왕 년놈들은 한꺼풀 벗겨보면 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야……!”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바르바토스나 시트리 같은 분도 계시지 않사옵니까?”

    “얼씨구. 자네, 내 말을 헛으로 듣는구만. 말하지 않았는가. 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라고!”

    내가 화난 척하며 왼손을 보여주었다.

    “보게나. 손가락 두 개가 없지? 이거, 바르바토스가 달라서 내어준 것일세.”

    “예?”

    “사랑의 증표를 얻고 싶다던가. 자기가 제일 소중하다는 확약을 간직하고 싶다던가. 그런 제멋대로인 이유를 들먹이면서 내 손가락을 잘라갔지. 그리고 목걸이로 만들어서 갖고 다닌다네.”

    내가 와인병을 쥐고 병나발을 불었다.

    “크흐. 나인들 어쩌겠는가? 바르바토스는 내 주인이나 다름없어……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다고. 손가락이든 발가락이든, 원한다면 눈알이든 아무거나 가져가라고 할 수밖에……전부 이기적이야. 전부…….”

    “……전하. 말씀이 과하십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안색에 그늘이 졌다.

    촉감이 왔다. 상대방이 서서히 떡밥을 물어오고 있었다.

    “과하기는, 전혀! 내가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마왕 따위는 되지 않았을 것일세. 마왕이라니! 모든 마인의 이상을 대신해서 이루어주는 존재라니!”

    내가 중얼거렸다.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족속이지 않은가. 사람이란 자신의 이상을 스스로 이루어야만 해……이상이란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야. 마왕은 태생부터 잘못된 것, 말하자면 이 세계의 오류일세……그렇고말고.”

    “…….”

    “솔직히 마인이나 인간이나 다를 바가 무엇인지. 마왕이 그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느냐 없느냐, 오직 그뿐이지 않은가……요컨대 마왕이란 족속만 없으면 인간이나 마인이나 다를 바가――.”

    “전하!”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소리를 질렀다.

    “그 이상 말씀하시면 도에 지나치게 되옵니다!”

    “……그런가? 내가 도를 지나쳤는가?”

    내가 쓰게 웃었다.

    “하지만 진심일세. 나로서는 정말이지 마왕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네……그저 정치꾼이야. 다른 정치꾼과 마찬가지로 모략을 짜고, 남을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연설로 대중을 선동하고……그럴 뿐인 존재야. 그래, 도에 지나친 것인가…….”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정말로 도가 지나친 것은 마왕이 아닌가? 마왕들이 지껄여대는 헛소리에 수없이 많은 마인과 마물이 희생되어왔다……이바르 로드브로크. 나는 둘 중 어느 쪽이 도에 지나치고 있는지, 술에 취한 지금도 명확하게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네……명확하게…….”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우리 둘 다 묵묵부답으로 술을 마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앉은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시옵니까?”

    옳지.

    나는 마음속에서 만면에 웃음을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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