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51화 (251/510)
  • 00251 던전의 주인  =========================================================================

    “저희 상회측의 경비원이, 전하를, 말입니까?”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웃었다.

    “아아. 아니, 그렇다고 너무 죄송스러워하지는…….”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몸을 엎드렸다. 방바닥에 말 그대로 오체를 투신했다. 그와 동시에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둘러 싸고 있던 패거리들이 똑같이 절을 올렸다. 한꺼번에 열댓 명의 마인이 나를 향해서 엎드린 셈이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직원 교육이 어찌나 철저하게 이루어진 것인지, 간부진이 엎드리자 이쪽에서 오간 대화를 듣지도 못했을 상회인들마저 줄줄이 오체투지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이 나를 중심으로 반경 수십 미터에 서 있던 마인들이 모조리 무릎을 꿇었다.

    어마어마한 장관이었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상회인들이 갑작스레 절을 하자 다른 곳에서 온 손님이나 소상인이 어리둥절하게 이쪽을 쳐다보았다.

    “…….”

    내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바르 로드브로크. 정치에 이골이 난 영감탱이야!

    경비원이 쫓아낼 때 나는 얌전히 물러가주었다. 당연했다. 나는 이제부터 이바르 로드브로크와 칼날 없는 전쟁을 벌일 예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방한테 조금이라도 책임부담을 떠넘길 기회가 다가온 것이었다.

    마법수정구를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은 것은 나의 잘못. 그렇지만 실수를 역으로 이용하여 상대편에게 잘못을 떠넘길 수가 있었다.

    이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상황을 듣자마자 전광석화처럼 재빨리 행동했다.

    니블헤임은 마계에서 유일무이한 중립도시였으며,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도시를 통치하는 거물 중 하나였다. 웬만한 마왕보다 격조가 높았다. 그런 작자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사죄했다.

    “……그대들이 잘못한 것이 무에 있겠는가?”

    당연하지만, 사죄를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그대들을 용서할 것도 없다. 과례를 접고 이만 일어서도록.”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상대편이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

    하긴, 이렇게 질 낮은 수작에 쉽게 걸려 넘어질 만큼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마는……. 그보다 도대체 직원들을 어떻게 교육시켰길래 아무런 군말도 없이 오체를 투지하냐? 얘네도 정상이 아니로군.

    “아니옵니다, 전하. 무례란 용서받기 이전에 결코 사라지지 않는 법.”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여전히 이마를 바닥에 갖다댄 채로 고했다.

    “당장 불의천만한 죄를 범한 자들을 잡아들여 효수하겠사옵니다!”

    내가 눈쌀을 찌푸렸다. 아이고야. 아주 못까지 꽉꽉 밖으시겠다?

    방금 전에 나는 '그대들을 용서할 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매우 어중지간한 언사였다. 이번 일은 그냥 이대로 넘어가주겠으나 결코 잊어버리지는 않겠다는 의미. 이바르 로드브로크한테 심리적인 부담을 실어주고자 했다.

    상대방이 이걸 알아차리고 곧바로 '그냥 처벌하시죠! 아주 엄하게!'라고 받아쳤다. 즉, 우리 두 사람이 몇 초 동안 주고받은 대화는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었다.

    ‘네 꼬봉이 나한테 잘못했는데 어쩔까?’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용서는 못해주겠고, 일단 네 얼굴 봐서 넘어갈게.’

    ‘용서해주지 못하실 거면 깔끔하게 처벌하고 여기서 끝내시죠?’

    곧 죽어도 나한테 마음의 빚은 못 지겠다는 소리였다. 영악한 새끼.

    내가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오크 경비원을 족치겠는가. 이미지 나빠지게. 단탈리안 그 마왕이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마냥 좁아 터졌더라, 하는 뒷소문만 창궐할 것이 뻔했다. 관대하게 용서해주어야 마땅하겠지.

    “들으라. 오래 전부터 현자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얌전하게 물러서줄 생각은 까마귀 발톱에 낀 때만큼도 없었다.

    “어느 나라가 대단히 풍요롭고 평화로운지라, 옆나라의 대신이 그곳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하여 잠행(潛行)을 갔다. 과연 나라에서 군주를 칭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이라.”

    “……?”

    갑작스레 고사를 들먹이니 의아스러워 하는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프랑크에서 연설하고 다녔던 시절에 써먹었던 말투를 사용하며 천천히 분위기를 이쪽으로 잡아당겼다.

    “대신이 궁금하여 길 가던 백성에게 질문했다. '이 나라의 군주께서는 얼마나 덕성이 깊으시기에 이리도 사랑을 많이 받습니까?' 그러자 백성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이리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본인은 군주가 뭘 하는지 모르노라고.”

    내가 짐짓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대신은 황당했노라.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군주를 백성들은 왜 열렬하게 칭송하는가? 아무래도 이 무지몽매한 농사꾼이 뭣도 모르는 것이리라. 대신은 그 백성을 마음속으로 욕하며 다른 사람을 찾아나섰다.”

    “…….”

    “그리하여 대신이 재차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질문하니, 이것이 어찌된 일인고? 새로이 질문을 받은 사람 역시 대답하기를, 본인은 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무엇을 하는지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겠지. 나는 요순시대 어쩌고 하는 고사에서 들은 얘기를 즉석에서 각색해보았을 뿐이지만. 뭐, 저작권 같은 것도 없었다. 요긴하게 써먹어주겠다.

    “세 번째로 물어본 사람도, 네 번째로 물어본 사람도, 이윽고 일곱 번째로 물어본 사람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군주의 이름조차 모른다고 대답했나니, 그제서야 대신은 크게 깨달았노라. 본디 백성에게 관심사란 일신의 안전일지언저! 세상이 풍요롭고 평화롭다면 통치자의 이름과 생김새 따위 알 바가 무엇이겠는가. 반면에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울수록 백성들은 통치자에게 관심을 품고, 통치자의 이름을 가지고 놀며, 통치자의 용모를 비웃으며 희롱하는 법이다.”

    어디선가 자그맣게 탄성이 들려왔다. 그렇다. 내가 만든 얘기는 아니지만 실로 잘 지어낸 고사였다.

    “본인이 상회에 거동했거늘 경비원들이 쫓아낸다. 그들은 내가 마왕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만약 지금 시대에 마왕들이 폭군처럼 그대들을 탄압하고 억압했다면, 그대들이 마왕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곧바로 알아보았을 터인즉. 이 사람 많은 상회에서 아무도 본인을 알지 못했으나 오히려 기쁘구나. 슬퍼할 일이 어디 있으며 용서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빙그레 웃었다.

    “다행히도 나 단탈리안이 지금까지 그대들에게 크게 잘못한 일은 없음을 이 자리에서 확인했다. 쿤쿠스카의 일원들이여, 그만 자리에서 일어서거라. 그대들이 나에게 사죄함이 도리어 무례가 될 것이니라.”

    간부진을 비롯해서 상회 직원들이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잔뜩 감격한 얼굴로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에 따라서 줄줄이 성은이 망극하다는 소리가 상회 건물에 울려 퍼졌다.

    나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또한 환하게 미소 지으면서 나에게 길을 안내했다. 단탈리안 전하 만세! 단탈리안 전하 만세! 하고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서 떠들어댔다.

    내가 은근하게 눈웃음을 주었다.

    ‘본인이 얌전하게 물러나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그러자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눈가에도 주름이 깊어졌다.

    “한낱 경비원을 구제하는 것에 심려가 닿으시니 어찌 전하의 덕을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상회에서 일하는 자들이 모두 만족하고 평온해보였으니 본인이야말로 그대의 덕을 칭찬하고 싶네.”

    결국은 경비원 하나 처벌하는 걸로 끝내기 싫어서 일장연설을 펼친 것 아니냐.

    맞다. 상회 직원을 통솔하는 네가 책임을 져야지 어디서 꼬리를 자르려고 수작질이냐.

    대충 이런 대화가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화기애애한 공기를 연출하며 걸어갔다.

    “자아. 이쪽으로 모시겠나이다.”

    상회 한쪽 구석에 텔레포트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최상층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비록 이동하는 쪽과 나오는 쪽이 미리 정해져 있는 장치였지만, 순간이동 마법을 허락받았다는 것 자체가 쿤쿠스카 상회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텔레포트 장치를 타고 이동한 사람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간부진은 두고 왔다.

    “…….”

    “…….”

    상회 최고층 건물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아까 전까지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치 별세계에 온 것처럼 우리는 뚜벅뚜벅 걸어서, 복도 맨끝에 자리 잡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

    미노타우르스의 머리가 뚝 잘려서 벽면에 장식되어 있었다. 기괴한 귀신과 마물의 조각상이 사방에 들이찼다.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진득하게 흘렀다. 악취미라고 볼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한가운데, 흡혈귀의 관(棺)이 열 개나 놓여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입을 열었다.

    “전하. 소인의 본체를 드러내는 것은……이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삼가 모든 여신께 고하여 맹세하건대, 나 단탈리안은 그대의 정체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언가 굳게 다짐한 얼굴로 걸어나갔다. 열 개의 관 중에 한 곳을 골라 들어가더니, 잠시 후, 다른 관짝이 열렸다. 그곳에서 소녀가 걸어나왔다.

    “소인, 이바르 로드브로크. 재차 단탈리안 전하를 뵙습니다.”

    금발의 소녀가 공손하게 드레스 끝자락을 집어 올렸다.

    나는 여자애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쿤쿠스카의 주인이여. 어디까지 나를 우롱할 생각인가.”

    “예?”

    소녀가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말씀이옵니까, 전하?”

    “그것은 그대의 본체가 아니다.”

    금빛 머리카락에 작은 여자아이. 여기까지는 똑같았다. 그러나 게임 일러스트에서 묘사된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눈동자 색깔은……자수정처럼 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눈앞에 선 소녀는 검은색 눈동자.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본체가 아니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다. 본인을 시험하려 들지 마라.”

    “…….”

    소리없이.

    거대 상회를 이끄는 괴물의 얼굴에 금이 갔다.

    “……어떻게, 그것을.”

    여자아이가 입가를 부들거리며 말했다.

    “제 본체는……아무도, 정말 아무도 보지 못했을 텐데! 어찌하여 단탈리안 전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세상에는 완벽한 비밀이란 없다. 그뿐이다.”

    상대방이 울분을 꾹 참고서 등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이 나왔던 관으로 도로 들어갔다. 그러자 또 다른 관이 열리면서 무엇인가가 일어섰다. 끼이익, 하고 관짝이 열리면서 안개와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소녀가 새하얀 나신으로 일어섰다.

    “…….”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보랏빛 눈동자였다.

    “단탈리안 전하를 뵙습니다.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으리라 결심했기에 미처 의복을 차려입지 못한 점,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흡혈귀 진조(眞祖). 가장 위대한 인형술사. 천의 신체를 다스리는 자. 마왕군을 배신하고 용사 일행에 붙은 매국노 중 매국노이며, <던전 어택>에서는 특별히 자기 전용 루트까지 보유한 히로인.

    소녀를 눈앞에 두고 나는 활짝 웃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이제야 그대와 만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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