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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50화 (250/510)
  • 00250 던전의 주인  =========================================================================

    가미긴을 솎아낸 것은 어디까지나 겸사겸사 처리한 일에 불과했다.

    사실 별로 대단한 뭣도 아니었다. 연애 초짜에게 이른바 좋은 경험을 시켜주었을 따름이다. 가미긴에게는 내가 복부를 찌른 광경이 트라우마로 남았겠지. 붉은 핏물, 방바닥에 깨진 유리잔, 신음…….

    앞으로 다른 사람이랑 사귈 때도 트라우마 때문에 절대로 파트너를 지배하려 들지 못할 터.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미긴과 사귀게 될 미래의 사람들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정말이지, 착한 짓도 지나치면 폐가 된다는데 내가 꼭 그 짝이었다.

    “일어났어?”

    내가 깨어나자 가미긴은 평소처럼 태연하게 행동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과연 가미긴이라고 할까, 심리가 극도로 불안정할 텐데도 잘 숨기고 있었다. 표정 연기가 완벽했다.

    나 역시 평소처럼 대해주었다.

    “윽……!

    그렇지만 아침식사 때, 스프를 먹다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것처럼 복부를 붙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가미긴이 깜짝 놀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은제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그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억지로 지은 듯이.

    “저는 괜찮습니다, 가미긴 님.”

    끝이었다.

    그날 하루 온종일, 가미긴은 결코 가면을 다시 쓰지 못했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만들어낸 가면은 간단하게 부서졌다.

    점심식사에는 놀랍게도 식용 나이프가 식탁에 올라오지 않았다. 이건 꽤나 재미난 부분이었다. 단칼 같은 물건 자체에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나중에 혹시 전쟁터에라도 나가면 고생하겠네. 하하하.

    나중에 이 일에 대해서 바르바토스한테 얘기해주었다.

    바르바토스는 내 성격을 모조리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딱히 숨길 게 없었다. 바르바토스도 인간들이 귀찮게 굴어서 자식의 손으로 부모를 몰살시켰느니 뭐니 뒤숭숭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고는 했다. 피차일반이라고 할까.

    “쯧쯧.”

    바르바토스가 마법수정구 너머에서 혀를 찼다.

    “설마 내 생애 가미긴을 가엽게 여기는 날이 올 줄이야.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렇지? 그 나이가 되도록 진심 어린 연애 한번 해보질 않았다니, 참 나.”

    “……뭐, 그래. 내가 동정심을 느끼는 부분은 그쪽이 아니지만.”

    바르바토스가 장죽으로 길게 연초를 빨았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가미긴을 속인 거 찔리지 않냐?”

    “응? 왜? 속는 사람이 잘못이잖아.”

    “…….”

    그때 바르바토스가 지은 표정은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게 구렸다.

    나는 진심으로 말한 것이었다. 가미긴이 평생 동안 참살한 인간 숫자만 해도 만 명이 가볍게 뛰어넘을 텐데, 그런 악인한테 트라우마 조금 심어주었다는 것에 뭐 잘잘못을 따지겠는가.

    속는 사람이 나쁜 거다.

    *  *  *

    쿤쿠스카 상회 총본부.

    마계에서 대륙에 이르기까지 취급하지 않는 상품이 없으며, 거래하지 않는 고객이 없다는 이곳에는 항상 손님이 넘쳐났다. 소상인들은 상회의 담당자들과 옥신각신 흥정을 벌이면서 소란을 자아내고 있었다.

    입구는 고대공화국 양식에 따라 대리석 회랑이 지어져 있었다. 그 너머에는, 최근에 건축한 것인지 고딕 양식으로 건물이 높게 자리잡고 있었다. 마계 최고를 자처할 만큼 충분히 화려했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니블에임에 방문한 주요 목적.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만나고 그녀의 본모습과 대면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기분 좋게 가미긴의 별장에서 나와 여기에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떻게 하면 이바르 로드브로크와 만날 수 있는지 몰랐다. 녀석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마법수정구를 내가 깜빡하고 마왕성에다 두고 와버린 것이었다.

    “아, 이제 와서 마왕성에 다녀오기는 너무 귀찮은데…….”

    난감했다.

    어디 안내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내 눈앞에는 인산인해를 이룬 상인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리 자체가 너무 생소했다. 그동안 쿤쿠스카 상회와 수백 번을 거래했는데 정작 그쪽의 본부가 낯설다니 우스웠다.

    별 수 있겠는가.

    지나가던 아무 상회원이나 붙잡고 물어보았다.

    “저기, 자네. 말 좀 물어보지.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예?”

    상회원이 이상한 사람 쳐다보는 눈초리로 이쪽을 훑어보았다.

    “……하, 정신병자를 다 봤네.”

    그가 콧방귀를 뀌면서 가던 길을 걸어갔다.

    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마왕이라는 사실을 몰랐겠지. 바르바토스나 파이몬과 다르게 나는 대중들에게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여마왕 전하들에게 양다리를 걸치는 양반이 있다고 한다.' 기껏해야 그 정도 인식밖에 없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다른 사람을 잡아서 질문했다.

    “자네. 내가 길을 잘 몰라서 묻는 거네만, 혹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어디 있는지 아는가?”

    “출구는 저쪽입니다.”

    상회원이 손가락으로 건물 바깥을 정중하게 가리켰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갔다.

    음.

    “이바르 로드브로크? 설마 우리 회장님을 말한 거요?”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멀쩡하게 생긴 양반이. 끌끌.”

    “안 그래도 바쁜데 뭔 개소리야!”

    똑같은 짓이 수십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상회원은 나에게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대놓고 무시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이바르 로드브로크란 단순히 상회의 최고경영자가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상계에 군림한 신이었다.

    어디 관광객이 바티칸 성당에 가서 '죄송한데, 교황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라고 물어보았다고 생각해봐라. 사람들이 썩은 눈동자로 바라보겠지. 마찬가지였다. 다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상황이 진전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통 한가운데 외딴 섬처럼 서 있었다.

    “……이걸 어쩐다냐.”

    뒤통수에 달린 뿔이라도 보여줘서 내가 마왕이라는 걸 알려줘야 할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조금 마왕으로서 체면이란 것이……게다가 나는 마왕치고 뿔이 외뿔인데다 크기도 엄청나게 작았다.

    뿔이란 마왕들 사이에선 마치 남자의 거시기 크기와 같았다. 크면 클수록 경외를 받았고 작으면 작을수록 알게모르게 무시당했다. 나는 뿔이 어찌나 작은지 머리카락에 덮혀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보여주기는 또 싫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운 좋게 친절한 사람이 걸리기를 빌면서, 상회원들을 붙잡아 계속해서 길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친절한 사람은커녕 성격이 더러운 놈밖에 없었다. 그중 한 명이 아예 미친놈을 쫓아내라며 경비원을 불러버린 것이었다.

    오크 경비원 세 명이 우락부락하게 다가섰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중 직위가 높아보이는 오크가 생긴 것과 다르게 멋진 억양으로 으르렁거렸다. 떡대가 아름답게 벌어진 것이 척 봐도 건드리면 위험해보였다.

    “이보게들. 나는 정말로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초대를 받았다니까? 나 마왕일세.”

    “이거, 말로 해서는 정신을 못 차릴 진상이로군. 바깥으로 안내해.”

    “어…….”

    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 말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지만, 자네 곧 있다가 후회할걸. 진짜야.”

    “흐흐.”

    오크 경비원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댁 같은 진상손님을 몰아내지 않으면 후회하겠지. 무얼, 폭력은 좋아하지 않소. 서로가 악감정 쌓이지 않게 얌전히 갑시다.”

    “으음.”

    마음만 먹으면 마왕의 강제력을 발휘해서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소란을 일으키는 게 싫었다. 바르바토스가 툭하면 나한테 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제발 체통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홀몸이 아니다. 웃긴 말이지만 진실이다. 나는 바르바토스, 시트리, 가미긴의 애인……내 평판이 떨어지면 그녀들의 평판까지 나빠진다.

    시장바닥에서 마왕이 난데없이 선량한 시민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했다고 소문이 나봐라. 니블헤임의 시민들은 이성이 희박한 몬스터가 아니라 엄연히 사회를 이루는 마인이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전쟁터에서라면 또 모를까, 이런 곳에서 함부로 대해서야 마왕의 이름에 먹통을 칠해버린다.

    “알겠네. 내 두 발로 직접 나갈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다시는 오지 마시오.”

    나는 상회 총본부 앞에 세워진 분수대에 대책없이 주저앉게 되었다.

    멍하게 도시에 노을이 지는 광경을 구경했다.

    바람이 도시에 가볍게 불었다. 건물 사이사이에 거미줄처럼 쳐진 빨랫줄이 들썩였다.

    옷가지와 담요가 어디를 한참 날아다니다 우연히 여기 걸렸다는 듯이 나풀거렸다. 나뭇잎처럼 다리 한쪽을 공중에 두고 사는 것들은 모두 한쪽으로 날렸다.

    공중에 발을 대보지 못하고 설령 대보더라도 단지 또 다른 땅을 밟기 위해 잠시간만 발바닥을 들어볼 뿐인 것들은, 서로 말하고 일하고 귀가했다. 어디선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과입니다! 막 딴 사과 사세요!”

    또 다른 목소리가 외쳤다.

    “아니 정말로 커다랬대도.”

    도시의 위로 구름이 지나갔다. 건물의 첨탑, 너른 지붕, 길바닥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곧이어 구름이 도시를 지나쳤다. 사람들은 시원한 그늘이 사라진 걸 아쉬워했다. 그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주위를 끄는 것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분수대에 조용히 앉아 있는 내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세 시간쯤 지나자, 별안간 호화로운 마차 한 대가 내 앞에서 멈추었다.

    마차에서 남자가 허겁지겁 내렸다.

    “이거, 단탈리안 님 아니십니까!”

    남자는 내 손을 덥썩 잡으면서 친밀감을 드러냈다.

    서열 제68위의 마왕 벨리알. 자기 마왕성이 인간군의 침략에 함락될 뻔한 것을 바르바토스가 구해주었는데, 그 때문인지 바르바토스의 연인인 나에게 항상 저자세로 나왔다.

    “아, 벨리알 님. 오랜만입니다.”

    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참고로 옛날 내 던전에다 리프 모험대를 밀어넣은 배후의 인물이 이 녀석이 아닐까, 하고 나는 의심하고 있었다. 증거가 없어서 그냥 잊어버리고 있지만.

    “이런 저잣거리에서 단탈리안 님을 뵈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니, 어쩐 일로 시장바닥에 이리 차분하게 앉아 계시는 것입니까?”

    “하하. 사실 상회에서 쫓겨난 참입니다.”

    “네?”

    벨리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쫓겨나다니요?”

    “쿤쿠스카의 회장과 약속이 있어 왔습니다만, 제가 마왕인 줄 몰라보고 저기 상회원들이 들여주지를 않는군요. 곤란한 일입니다. 저녁까지는 가겠노라고 말해놨는데…….”

    벨리알이 에엑,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아니. 강제력을 쓰시면 될 것을.”

    “보는 눈이 많지 않습니까? 행여라도 소문이 나쁜 방향으로 흐를까 두렵군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허어. 이상한 일도 다 있군요.”

    결국 나는 벨리알의 도움을 빌어서 접수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소위 VIP 고객을 전용으로 모시는 곳이었다. 내가 있던 곳과 완전히 반대방향에 자리하고 있어서 찾지 못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벨리알 님.”

    “뭘 이런 것 갖고……하하.”

    나를 데려다주고 벨리알이 떠났다.

    안내원에게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호출해달라 말하니 금세 노인이 내려왔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분신이었다. 녀석은 마치 마피아 패거리처럼 양옆으로 하수인들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극진하게 허리를 숙였다.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내가 손을 내저었다.

    “그래, 그래. 수고들이 많구나. 이만 예를 생략하는 것을 허하마.”

    “황공하옵니다. 헌데 전하. 조금 더 빨리 오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비록 정확하게 약속 시간을 정해둔 바가 없었지만 아무튼 오늘 만나기로 해두었다. 상대방은 하루종일 꼼짝없이 발이 묶인 채 기다리고 있었겠지. 확실히 예의가 아니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쿤쿠스카의 최고경영자여서야.

    내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사실 도착하기는 서너 시간 전에 도착했네만.”

    “예? 왜 올라오지 않으셨습니까?”

    “쫓겨났네.”

    아까 전에 벨리알이 지었던 것과 똑같은 표정을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지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으로서는 대체 무슨 말씀이온지……?”

    “본인이 마왕인 걸 몰라보고 경비원들이 내쫓았다네.”

    “…….”

    주변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졌다.

    “마왕이라고 밝혔더니 나보고 진상손님이라며 욕하더군.”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얼굴이 마치 세계의 종말을 본 것처럼 사색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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