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49화 (249/510)
  • 00249 던전의 주인  =========================================================================

    *  *  *

    아, 생각보다 연기하는 게 어려웠다―.

    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옆에서 가미긴이 소리를 줄여가며 울고 있었다. 흐윽, 흑, 하고 차마 견디지 못하고 울음이 흘러나오는 느낌이었다. 비유하건대 멋진 자장가였다.

    이쪽이 깨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겠지.

    사실 처음부터 정신 따위는 잃지 않았지만. 가미긴에게 부축되어서 오는 것이 참 편해서 기분이 좋았다.

    야아, 최근 들어서 가미긴의 스트레스가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공평하게 거래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최대한 존중 받기를, 적어도 타인 앞에서 깎아내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설령 자기가 선택한 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공평하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을까……가미긴은 서열 제4위이다. 나 같은 놈과 공평하게 거래했다는 것이 도리어 불공평하다고, 부당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람이란 간단하게 자신이 약자였던 시절을 잊어버렸다. 가미긴도 한때 최하위 서열이었겠지. 그렇지만, 권력자가 되고 수백 년이 흐르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무시당할 정도로 하찮지 않다, 나는 조금 더 대접받아 마땅하다…….

    어리석다고 비웃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수백 년이 흘러본들 뭐가 달라지는가?

    이백 년, 삼백 년이 지나면 내가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우스운 일이다. 삼백 년이 흐르든 말든 머리통이 뽑히면 나는 죽는다. 어차피 그 정도 목숨이라는 거다.

    머리통이 뽑히는 것을 언제나 항상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마저, 어리석어지면 간단하게 망각한다. 간단하다. 자기가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리석어야 괴롭히는 재미조차 적어진다…….

    가미긴은 자기 스스로 생존이야말로 유일무이한 가치이니 뭐니 떠들었다. 그런 주제에 자존심에 연연했다. 안이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겠지.

    만약 내가 가미긴이었다면 철저하게 복종했을 것이다.

    당신에게 전부 마음이 빼앗긴 척 연기하면서 언젠가 약점을 드러내기를 기다렸으리라. 서열 제4위에게 온갖 아첨을 듣는 것이다. 상대방이 제아무리 냉혈한이라 해도 해벌쭉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가미긴은 어수룩하게 나왔다. 나에게 완전히 협력하지도, 완전히 대적하지도 않았다. 어중지간했다.

    ‘상태창.’

    내가 슬쩍 눈을 떠서 가미긴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

    이름: 가미긴

    종족: 마왕   소속: 가미긴 마왕군

    속성: 악(-55)

    레벨: 396   악명: 5233100

    직업: 대마법사(SSS), 마왕(SS), 던전운영자(S)

    통솔: 295  무력: 320  지력: 353

    정치: 371  매력: 449  기술: 446

    호감도: 22

    현재심리: ‘전부, 지긋지긋해……. 전부…….’

    ━━━━━━━━━━━━━━━━━━━━

    가미긴의 호감도가 최초로 20을 넘긴 것이 딱 일 년 전이었다.

    당시에 나는 가미긴과 상당히 잘 지내고 있었다. 안 좋게 시작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은, 이른바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여기에 몸까지 빈번하게 섞다보면 약간이나마 정이 붙을 수밖에.

    내 입장에서야 서열 제4위가 아군이 되어주면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자연스레 상냥하게 대접했고,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을 골라서 했다. 그러다보니 호감도가 달마다 2씩, 3씩 올라서 겨우 일 년 만에 20을 넘어섰다.

    느릿느릿해도 착실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사브나크와 어울리지 마.’

    격렬하게 섹스하고 침대에 누워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예?’

    사브나크는 서열 제43위의 여마왕이자 무소속 마왕이었다. 내전이 일어났을 때 아가레스한테 합류했던 터라 평원파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제발 좀 용서해주세요, 하고 은근슬쩍 제스처를 취해오는 것이 재밌어서 몇 번 어울려준 적이 있었다.

    ‘딱히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울릴 테면 어울려. 아가레스가 불리해지자 제일 먼저 이탈한 게 녀석이니까.’

    ‘아하.’

    내가 피식 웃었다.

    ‘혹시 지금 걱정해주시는 것…….’

    잠깐, 하고 내가 생각했다.

    가미긴은 나에게 등을 돌리고 누웠기에 표정이 어떤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가미긴의 새하얗고 날렵한 등을 바라보면서 정체모를 오한에 휩싸였다.

    방금 가미긴이 무엇을 말한 것인가?

    그녀는 일찍이 아군이었던 자의 정보를 나에게 팔아넘긴 것이었다. 단지 나의 아주 자그마한 호감을 얻기 위해서. 왜? 어째서?

    다른 사람이라면 눈치 채지 못했겠지. 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가미긴은 나에게 빚을 만들어두려고 하고 있었다!

    모든 관계가 파탄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빚 때문이었다. 내가 상대방에게 뭘 더 해주었는데, 내가 상대방에게 이만큼이나 선의를 베풀었는데. 그런데도 보답을 받지 못했다. 당신은 나에게 보답해주어야만 한다……비즈니스적인 관계가 한번 깨지기 시작할 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망가져버린다.

    바르바토스와 나는 서로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절대로,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정도에 넘는 배려를 베풀어지도 않고 입지도 않는다. 이것이 상대방한테 쓸데없는 원한――나는 이만큼이나 해주었는데! 너는 왜 이것밖에!――을 품지 않는 방법이기에.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지만 기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녹이 슨다. 나는 가미긴이 언뜻 보여준 태도에서 숨길 수 없이 비릿한 철 냄새를 맡았다.

    ‘……걱정해주신 거로군요. 감사합니다.’

    ‘…….’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하고 요란한 효과음이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지날수록 사태는 급격하게 한쪽 방향으로 쏠렸다.

    ‘가미긴 님.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읏……!’

    ‘왜 그러십니까? 젠장, 바르바토스가 제일이라고 말해서 신경이 거슬린 겁니까? 애당초 그걸 용납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저리 가……저리 가라고!’

    틀림없이 가미긴은 울음을 참고 있었다. 나한테 등을 돌리고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이 아마도 마왕으로서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겠지.

    나는 그제서야 가미긴이라는 마왕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겼음을 통감했다.

    생각해보면, 가미긴은 나와 만나기 전까지 한번도 가면이 깨지지 않았다. 무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면을 유지한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상태일지 추측하기 쉬웠다.

    요컨대 가미긴은 연애에 있어서 쌩초보였다.

    사람이야 많이 사귀어보고 많이 자보았을지 모르나, 서로 진심을 부딪히며 적절한 관계라는 것을 터득할 겨를이 없었겠지. 가면을 벗은 채로 사귀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그런 여인이 '너는 언제나 두 번째에 불과하다'라는 사실을 견딜 리 없었다.

    내가 잘못 판단했다. 서열 제4위이니까, 바르바토스도 시트리도 파이몬도 전부 이런 방면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하니까, 당연히 가미긴도 능숙할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조금만 더 숙고했으면 간단히 알아냈을 텐데!

    그래서.

    초강수를 두기로 결심했다.

    ‘상대방이 나에게 빚을 만들자는 생각을 할 수도 없게.’

    ‘내가 먼저 상대방을 거대한 빚으로 억눌러버린다……!’

    대공들에게 연회를 주선하라고 눈치를 준 것은 나였다.

    우선 마왕 중에서 초대장이 가미긴과 나한테만 온 것부터 노림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안 그래도 염문에 휩싸여 있는데다 각종 스캔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마치 파트너처럼 연회에 참석한 것이었다.

    대공들은 우리에게 아첨하고 싶어했고.

    마침 눈앞에 엮기 좋은 커플 한쌍이 놓였다.

    그들이 질문할 거리는 뻔하게 예정되어 있었다.

    ‘허면……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여마왕들 중에 어느 분이 특히나 아름다우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아. 그야 바르바토스 님께서 제일 아름다우시지.’

    일부러 모욕했다.

    ‘오. 포도주가 상당히 고급스럽군.’

    천연덕스럽게 와인 맛을 품평함으로써 가미긴의 분노를 더더욱 부채질했다. 가미긴은 그런 모욕을 견디지 못하리라.

    ‘잠깐만 바람을 쐬고 오겠네. 오늘 너무 취하는군.’

    적당히 시간이 되었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예상한 대로 가미긴의 감정이 움직이고 있다면 십중팔구 따라오겠지.

    ‘아, 나도~. 바깥 공기 좀 내놓으라고 머리통이 아우성을 치고 있어.’

    실제로 가미긴은 밀실까지 얌전히 따라왔다. 어찌나 계획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지 하마터면 웃어버릴 뻔했다.

    방에 들어와서 나는 담뱃대를 꺼내들었다.

    파이프에 구겨넣은 연초잎은 평범한 담배가 아니었다. 일종의 마취제였다. 처음부터 나는 배를 쨀 생각이었다.

    미쳤다고 내가 배를 째는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겠는가? 이래봬도 섬세한 남자이다.

    특별히 몸체의 통각을 무뎌지게 해주는 향초였다. 부작용이라고 할지, 얼굴도 엄청나게 무표정하게 변해버리지만 상관없었다. 표정 연기가 따로 필요없는 상황이었다.

    몸이 어느 정도 둔해지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단검을 배에 꽂아 넣었다. 마취가 되어 있다 해도 과연 고통이 아예 사라지진 않았다.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고 할까.

    ‘무, 무슨 짓을!?’

    내 상태를 알 리가 없는 가미긴은 경악했다.

    정신없이 달려와서 치유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어차피 가미긴이 대마법사에다 치유마법에 능숙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할복한 것이었다. 생명에 지장이 갈 위험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계획대로.

    “으, 으으윽……윽.”

    “……단탈리안? 단탈리안, 정신이 들었어?”

    가미긴이 내게로 다가왔다. 헐레벌떡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이 살짝 보였다. 당연하지만, 나는 그딴 것은 전혀 모른다는 듯이, 매우 괴롭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여기는……?”

    “내 별장이야.”

    가미긴이 우는 것인지 분노하는 것인지 모를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사람은 보통 누군가에게 미안하지만 사과하고 싶지 않을 때 그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자주 그랬지.

    “도대체 어쩌자고 그딴 짓거리를! 내가 얼마나……!”

    “……사죄를.”

    내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참고로 정말로 힘겨웠다. 힘든 척 생생하게 연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데.

    가미긴의 붉은색 눈동자를 일직선으로 바라보면서 얘기했다.

    “가미긴에게, 사죄를 하려면……으윽, 이제 이 방법밖에…….”

    “……!”

    가미긴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바로 그거였다. 죄책감, 부디 더 질척거리는 죄책감에 휩싸이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죄책감만큼 사람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것이 없다. 이제부터 가미긴은 내 앞에서 절대로 연인이기를 주장하지 않겠지. 이쪽을 상처입게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다.

    “……저는, 입장상……바르바토스와 맹세를 했으니까…….”

    여기서 추가타를 날려준다.

    “가미긴이라면……이해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

    가미긴의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때가 타이밍이었다. 나는 피로에 지친 것처럼 서서히 눈을 감았다.

    상대방이 눈물을 흘릴 때 봐주면 안 된다. 피해자는 어디까지나 나 혼자여야만 한다. 눈물로 피해자인 척 시늉하는 것을 놔둘까보냐.

    “조금, 피곤하군요……미안해요……미안해요, 가미긴……미안해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고 가미긴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백히 자기 자신을 질책하는 울음소리였다.

    물론, 내가 가미긴의 외로움을 오롯하게 전부 받아주는 선택지도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며, 함께 나아가는 길도 있겠지.

    하지만 왜 구태여 그런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인가?

    바르바토스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누구 한 명한테 붙잡힐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다. 가미긴이야 이대로 평생 죄책감에 빠져 살든 말든 아무쪼록 마음 편한 대로 살라고 그래라. 원래 자신의 멍에는 자기가 짊어가는 것이지. 그렇고 말고.

    “윽……으읏, 흐으윽……으으읏…….”

    가미긴의 울음소리를 아름다운 자장가로 삼아 나는 이번에 정말로 잠들었다.

    음,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께선 부디 나쁜 남자를 만나지 않으시기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