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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47화 (247/510)
  • 00247 던전의 주인  =========================================================================

    대공들은 처음에는 단탈리안과 가미긴을 함께 만났다는 것에 기뻐했다.

    아무튼 간에 두 마왕은 거물이었다. 친목이 목적인 자리에서 이만큼 호화로운 캐스팅도 달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 초라도 빨리 누군가가 날 이곳에서 꺼내달라고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왜 그 타이밍에서 바르바토스를 언급하는가!’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가미긴 전하를 칭찬할 차례이지!’

    ‘우리에게 물이라도 먹일 속셈인가…….’

    대공들은 단탈리안을 질타하면서도 필사적으로 평화로운 광경을 떠올렸다. 가령 파란 해안가에 조용히 세워진 공동묘지처럼…….

    어떻게든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마왕은 감정을 읽어낼 줄 알았다. 그렇기에 머리로는 불평불만을 쏟아낸다 할지라도 감정만큼은 애매모호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대공들은 이런 수법에 꽤나 익숙했다.

    상대방이 서열 제4위의 마왕이라면 그마저도 쓸모가 없었지만.

    “하아아아~.”

    가미긴은 마음속으로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렸지만 목소리가 쾌활했다. 쾌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기 속에서 어느 누가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주겠는가?

    “단탈리안도 차암, 너무한다니까. 내가 여기 있는데 꼭 다른 여자를 들먹여야겠어? 자꾸 그렇게 나오면 나 진짜 화낼 거다아?”

    자신이 나서야만 했다.

    입장이란 것이 그걸 강요하고 있었다. 여성으로서 더없이 무례한 모욕을 뒤집어썼는데도 도리어 자기가 중재해야 하는 것이었다. 가미긴은 기분이 더럽고 또 더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단탈리안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죄송합니다. 가미긴 님께서 저를 미워하시게 되면 저는 정말이지 외롭게 됩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지요.”

    “그래, 그래. 조심하라구.”

    전혀 분노하지 않은 척.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은 척.

    목소리가 꺾어지고 들어가는 음색에 눈짓 하나까지, 가미긴은 세밀하게 조종했다. 조종한다는 생각조차 희미할 정도로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대공들이 속아넘을 만큼 연기는 능수능란했다.

    “하하. 단탈리안 전하도 참으로 취향이 특이합니다.”

    “그렇습니다. 전하의 생각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바르바토스 전하께서는 적이 동안이시지 않습니까?”

    가미긴이 물꼬를 틀어주자 대공들이 얼른 흐름에 올라탔다. 그들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만 감사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연회 자체가 폭발할지도 몰랐기에.

    “공들, 너무 나를 탓하지는 말게나.”

    단탈리안이 멋쩍게 웃었다.

    “내가 여자아이를 좋아하기에 바르바토스 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세. 어쩌다 좋아하게 된 분이 하필이면 여자아이처럼 생겼을 따름이지.”

    “전하의 말씀을 듣다보면 진실로 그런 것 같아서 때때로 두렵습니다. 단탈리안 전하, 소인들은 무지몽매하니 되도록이면 봐주십시오. 정말로 착각해버립니다!”

    “거 사람이 능청을 떨기는.”

    단탈리안과 대공들이 껄껄 웃었다.

    그후로 연회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이번 연회는 미식회를 명목으로 삼고 있었다. 마계에서 내로라 하는 요리사들이 일종의 경연대회를 치르는 식으로 차례차례 산해진미를 진상했다.

    미식회의 장점은 대화거리가 결코 끊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화가 멎을 쯤이 되면 새로운 요리가 나온다.

    “호오. 이건 상당히 각별한 맛이…….”

    “가미긴 전하, 이 마무리 음식이 꽤 멋지군요.”

    “요리사. 자네는 어떤 생각에서 이걸 요리했는가?”

    그리하여 다시 대화거리가 충전된다.

    요리를 서빙하는 사람들은 물론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미동――일부 대공들은 '단탈리안 전하를 대접할 때는 앞으로 반드시 소녀 얼굴의 여자를 고용해야겠다'라고 다짐하고 있었다――으로 채워졌다.

    대화란 술과 같았다. 사람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대화를 하면 마치 취한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여기에 진짜 술까지 들어가면 사람들은 가벼운 기분이 되어 상대방과 웃고 떠들고 즐겼다.

    정신이 멍해짐으로써 말이 가볍게 튀어나가며, 말이 가볍게 튀어나감으로써 사람들이 서로 친해졌다고 착각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효과를 위하여 대공들은 마왕들에게 이른바 술맛 좋은 대화거리를 대접하고 있었다.

    “헤에. 나는 역시 하얀 포도주가 입맛에 맞는걸.”

    “그렇습니까? 하긴 무언가 다른 맛이 숨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미긴 전하께서 미각이 예리하시군요. 이 포도주는 화탕지옥(火湯地獄)의 용암백이 올 여름에 특별히 공개한 품목으로…….”

    사람들이 쉽게 웃었다.

    모두가 말과 술에 만취했다. 모든 것이 하나같이 몽롱했다. 마왕은 체질상 술에 취하지 않았지만, 가미긴이든 단탈리안이든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 웃음이 헤퍼졌다.

    “좋네. 아주 좋아.”

    가미긴이 빈 와인잔을 장난스레 흔들었다.

    “여기 포도주 하나 더 줘어.”

    그녀의 한 마디가 오늘 미식회를 잘 표현했다.

    대공 중 한 사람이 발개진 얼굴로 말했다.

    “가미긴 전하. 예전부터 궁금했습니다. 제가 질문을 하나 해도 될련지요?”

    “응. 아무거나 해봐. 이렇게 좋은 포도주가 있는데 질문 하나 없어서야 말도 안 되지~.”

    “혹시 단탈리안 전하와 특별한 관계에 있으십니까?”

    가미긴이 으응, 하고 살풋 웃었다.

    “글쎄에. 단탈리안? 우리한테 묻고 있는데. 자기랑 내가 특별한 관계냐고.”

    “물론이지. 우리는 예전부터 각별한 관계였다네.”

    단탈리안이 붉은 포도주를 원샷했다.

    대공들이 점잖게 호들갑을 떨었다.

    “사실 소문은 몇 년 전부터 무성했습니다! 두 분 전하께서 깊은 관계라고 말입니다. 소문이 정말이었군요. 헌데 단탈리안 전하, 모두가 알다시피……전하께서는 바르바토스 전하와도 관계를 맺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아. 그렇고말고.”

    여기 모인 대공들 중 몇몇은 단탈리안에게 협박당한 경험이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노예처럼 울며불며 알몸으로 단탈리안한테 들러붙은 광경은, 그들이 무덤까지 끌고 들어가야 할 비밀이었다.

    “거기에다 듣자하니 파이몬 전하, 시트리 전하까지 관계망에 포함되어 있다고…….”

    “아르테미스 여신에 맹세코 사실이라네.”

    “신이시여! 전하께서는 그러면 마왕군에서 미인으로 이름이 드높으신 분들과 전부 사귀시는 것입니다!”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하고 대공들이 입을 모아 성토했다.

    “자네들이 더 너무하군.”

    단탈리안이 키득거렸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리 탓하는가?”

    “미인을 독점하니 그게 잘못이 아니라면 뭐가 잘못이겠습니까. 어디 비법이라도 전수해주십시오. 어떻게 아름다운 전하들의 마음을 얻었습니까?”

    “중요한 건 마음일세. 자네들도 알겠지만 사람이란 다 어디 한구석이 병들어 있지. 그 부분을 상냥하게 감싸주면 되는 것일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대공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멋지군요. 가미긴 전하. 단탈리안 님이 저리 말씀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으응~.”

    가미긴이 헤벌레 웃었다.

    “그냥 길 걸어가다 누가 뒤통수라도 쳐줬으면 싶은걸.”

    “크하하하!”

    “여마왕들께서는 생각이 다르신 모양입니다, 단탈리안 전하!”

    단탈리안이 말없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밤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엉망이 되어갔다. 그중에는 여자 웨이터를 대놓고 희롱하는 대공도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흘러가도록 예정된 종류의 모임이었기에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

    “잠깐만 바람을 쐬고 오겠네. 오늘 너무 취하는군.”

    “아, 나도~. 바깥 공기 좀 내놓으라고 머리통이 아우성을 치고 있어.”

    그렇기에 단탈리안과 가미긴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도 대공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잘 다녀오시라고 배웅할 뿐이었다. 아직 알코올이 덜 들어간 대공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히죽 짓기도 했다.

    연회장 구석에는 소위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따로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탁자 하나에 의자와 소파가 놓였다. 둥근 탁자에는 막 준비된 것처럼 와인병이 얼음통에 담겨 있었다. 큼직한 창문 너머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베란다까지 있었다. 그야말로 연인을 위한 장소였다.

    “저는 정말로 바람만 쐴 생각이었는데요.”

    단탈리안이 방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그는 언제 취했냐는 듯 표정과 말투가 차분해졌다.

    “여기까지 어울려주었으니 대공들도 만족하겠지요. 슬슬 가미긴 님의 별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흐으응~.”

    가미긴이 단탈리안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녀는 얼음통에서 와인병을 꺼내어 유리잔에 콸콸 부었다. 힘조절이 어설퍼서 그만 포도주가 넘쳐흘렀다. 가미긴은 오른손이 포도주로 흥건하게 젖었는데, 개의치 않고 그대로 술을 들이켰다.

    “……가미긴 님, 설마하니 질문해봅니다만. 혹시 취했습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에.”

    “세상에.”

    단탈리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가미긴 님씩이나 되는 마왕분이 이 정도 술에 취할 리가 없습니다. 일부러 재생능력을 꺼두었군요.”

    “으응. 헤에.”

    “제정신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들은 지옥의 통치자들입니다. 방심한 순간에 늑대처럼 물어뜯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미긴이 포도주를 재차 따라서 원샷했다. 입가에 술이 흘러내렸다. 붉은 액체가 턱선을 따라 미끄러져 새하얀 쇄골에 뚝, 하고 떨어졌다.

    “나씩이나 되는 마왕이 뭐길래.”

    “예?”

    “어차피 바르바토스보다 못한 여자잖아. 안 그래? 아주 대단할 것도 없는걸.”

    “…….”

    단탈리안은 시선이 웬 정신병자를 보는 눈초리로 바뀌었다.

    “……정말로 만취했군요. 뭐, 사람은 누구나 취하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게 왜 하필 오늘과 같은 날이어야 하는지 약간 이해하기 힘듭니다만.”

    “너는 말이지, 으응. 정말로 개 같은 놈이야, 단탈리안.”

    단탈리안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주정뱅이와 상대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그 모습에 가미긴은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으로 남은 이성이 가미긴으로 하여금 방 전체에 방음마법을 걸치도록 도와주었다. 어떠한 장치도 숨겨져 있지 않음을 확인한 다음, 가미긴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더 이상 이딴 연극에 어울려주지 못하겠어. 신물이 나. 진절머리가 난다고.”

    “…….”

    “꼭 다른 마인이 보는 앞에서 나를 모욕해야겠어? 알아. 바르바토스가 너한테 중요하다는 거. 하지만, 뭐든지 때와 장소라는 게 있잖아.”

    단탈리안은 가만히 품속에서 담뱃대를 꺼내어 물었다. 곧이어 매캐한 약초 향기가 방안에 피어올랐다.

    “나에게도 마왕으로서 자존심이 있어. 너 같은 말종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가미긴 님. 방음마법은 걸었습니까?”

    “어어엄청 빨리도 지적하네, 우리의 현명하신 단탈리안 전하.”

    가미긴이 코웃음을 쳤다.

    “왜, 연기가 들통나는 게 두려워? 넌 겁쟁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겁쟁이 자식이야. 상대방을 협박하고 능욕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고, 술자리에서 취할 줄도 몰라. 내가 제정신이냐고? 웃기시네. 너는? 너는 얼마나 제정신인데?”

    “좋습니다.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십시오.”

    단탈리안이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혹시 잊으신 것은 없습니까? 애당초 가미긴 님께서 자초하셨습니다.”

    “네, 미안하네요. 아가레스랑 짜고 영지에 찝적거려서 정말로 미안하게 됐네요!”

    가미긴이 대리석 바닥에 와인잔을 내던졌다. 유리가 요란하게 깨졌다.

    “아예 앞으로 수십 년, 수백 년 그거 갖고 나를 속박해보시지 그래? 그거 알아? 나는 언제라도 다시 네 자식의 잘나신 연인을 공격할 수 있어. 세상에 바르바토스를 아니꼽게 여기는 마왕이 아가레스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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