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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46화 (246/510)

00246 던전의 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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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편지를 보내왔다.

「다음주 월요일. 니블헤임 쿤쿠스카 상회 본부에서 전하의 뜻을 받들고자 합니다.」

간략하게 한두 문장만 적혀 있었다. 매우 정제된 필기체로.

다른 사람이 훔쳐보았다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드디어 자신의 진짜 신체를 보여주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글씨가 예쁘군.”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은지라 대륙이고 마계고 필기체가 상당히 중요했다. 당사자가 교양이 얼마나 뛰어난지 드러낼 뿐더러, 자기 자신이 어떤 인물입니다 하고 알려주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마왕들은 절대다수 필기체가 구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지나치게 달필이지.

붓글씨가 너무 멋들어지면 되려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똑같다. 예컨대 시트리는 글씨체가 아주 스케이트 피겨 선수가 얼음판을 쌩쌩 달리듯이 날아다닌다. 이게 글씨인지 예술작품인지 원.

언젠가 시트리한테 연애편지를 한통 받은 적이 있었다.

‘요새 잠들기 전마다 단탈리안을 생각해.’

‘보름에 한 번 만나는 게 너무 힘들어. 더 자주 보면 안 될까?’

‘물론 바쁘면 괜찮아. 미안해. 단탈리안은 항상 바쁘니까…….’

정말 여중생이 쓴 것처럼 풋풋하지 않은가.

문제는 글씨를 해석하느라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는 것이다. 어찌나 고생고생해서 읽었는지, 편지 내용이 가진 싱그러움이 죄다 증발해버렸다! 나에겐 지끈거리는 두통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고야…….

반면에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인쇄기가 찍어낸 것마냥 글자가 똑바랐다.

이런 곳에서 상대방의 성격이 드러나고 있었다. 우선 실용적인 사고관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되도록 남한테 자기 성격을 숨기고자 했으며, 자신을 과시하는 걸 극단적으로 꺼려했다.

너무나 이바르 로드브로크다운 글씨체였다.

“데이지. 다음주 월요일 부근에 내 예정이 어떻게 되어 있냐?”

“아버님께서는 이번 주 금요일에 파이몬 전하와 만나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데이지가 내 옥좌 옆에 서서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토요일에는 니블헤임으로 가셔서 마계의 대공들과 무도회에 참석하시며, 일요일에는 그대로 니블헤임에서 가미긴 전하와 하루를 보내시기로 했습니다. 월요일에 돌아오셔서 영지를 비밀리에 순회하시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음.”

내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데이지는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예정을 줄줄이 암송했다. 데이지는 이제 열세 살이 넘어 제법 시녀로서 관록이 붙었다. 언제나 내가 질문한 것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화요일에는?”

“만하임에 방문하시어 파이몬 전하와 시트리 전하를 뵙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아, 기억났다. 주말엔 바르바토스를 만나러 가야 하잖아…….”

무심코 약한 소리가 기어나왔다. 상큼하리 만치 끔찍한 스케줄이로군.

“어쩌다 예정이 이리 꼬인 거지? 세상이 원망스럽구나.”

“자업자득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군요, 아버님. 그러길래 제가 말했지요. 나중에 만나자, 나중에 만나자, 하고 차일피일 변명하다가는 결국 한꺼번에 몰아서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고.”

데이지가 비웃었다.

“아버님께서는 시트리 전하와 한 약속을 21일 전에 한 번, 12일 전에 한 번, 벌써 두 번이나 미루셨습니다. 파이몬 전하와는 16일 전에 약속 날짜를 어기셨지요. 그러다보니 다음주처럼 되어버린 거예요.”

데이지의 말투는 어디까지나 정중했다. 말투만 정중했다. 마치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상담원한테 상냥한 목소리로 '예, 고객님. 무슨 시발스러운 일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들어버린 기분이었다.

“……네 년, 기억력이 쓸데없이 좋구나.”

“감사합니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밤마다 고문하는 분께서 곁에 계시기에.”

데이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빌어먹을 년.

“하아. 예전에는 슬라임 하나로 부들부들 떨어내는, 귀여운 녀석이었는데……어쩌다 이렇게 재미없는 녀석으로 자랐을꼬.”

저절로 한탄이 나왔다.

“글쎄요. 지금도 제 몸속에 슬라임을 두 개나 집어넣은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네요.”

“끄응. 루크는 요새 자위를 통 안 하더냐?”

“제 오라비는 드디어 자위 생활에서 탈출하고 여자들을 찾은 것 같습니다.”

데이지가 눈썹 한번 까딱거리지 않고 대꾸했다.

“최근 들어서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애인을 바꾸고 있더군요. 여섯 마을의 처녀란 처녀는 전부 꼬셔보았다고 합니다. 슬라임과 장난칠 시간 따위는 없겠네요.”

“제기랄……! 여동생이 최고라는 사실을 망각해버렸는가, 그 애송이 자식!”

내가 머리를 잡고 신음했다.

왠지 요즘 데이지를 조교하는데도 레벨이 잘 안 오른다 싶었다. 가슴이라든지 뒷구멍이라든지, 성감대의 감도를 전부 레벨 5까지 올렸는데도 수치각인이 안 뜨지 뭔가. 이제보니 루크가 트롤짓을 하고 있었다.

기껏 여동생이 여자의 맛을 알려주었더니, 배은망덕한 놈! 머리가 조금 굵어졌다고 여동생을 내팽개치고 다른 여자들을 후려치고 다니는 거냐! 이래서 인간종이 은혜를 모른다는 거다.

소녀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포기하시는 게 어떨까요.”

“입 다물어라. 승리의 기분을 만끽하기에는 아직 백 년은 이르니까.”

내가 으르렁거렸다. 데이지에게 끝없는 수치심과 굴욕감을 심어줌으로써 심리적으로 나보다 약한 위치로 몰아넣겠다는 전략은 유효했다.

참고로 당연하지만 데이지는 아직 처녀였다. 나 때문인지 몰라도 남성혐오증에 걸려버렸다나 뭐라나.

최근 들어서 라우라한테 은근슬쩍 달라붙으며 추파를 던지는데 이게 꽤나 우스웠다. <던전 어택>에서 서로 원수였던 영웅과 재상이 만약 연인이 된다면 참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뭐, 개인적으로 나는 가신들에게 성적으로 무한하게 관대했다.

내 파트너들을 성적으로 구속하고 싶은 생각일랑 눈꼽만치도 없었다. 알아서들 하라지. 단, 라우라는 데이지보다 바르바토스――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라우라는 바르바토스의 애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마는.

“다음주 월요일에 예정되어 있던 순회를 취소한다. 월요일, 가미긴의 별장에서 나와 곧바로 니블헤임 본부로 향하도록 하지.”

“알겠어요. 순회를 호위하시기로 한 제레미 경에게 말씀드릴게요.”

*  *  *

대륙에는 여전히 내전이 한창이었으나, 마족이 황금으로 쌓아올린 도시, 니블헤임에서 전쟁이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마계대공들은 전쟁의 불꽃이 행여라도 자신에게 튀지 않도록 로비를 거듭했다. 보름에 한 번씩 최고급 연회가 열렸다. 니블헤임에서 가장 값비싼 기녀와 미동이 동원되었다. 한 방울이 황금과 맞먹는 술들도 아낌없이 진상되었다.

“하하. 가미긴 님께서는 가히 마왕군 제일미이십니다.”

서열 제4위의 마왕 가미긴은 물론 로비 목록에 들어 있었다.

“다른 마인들은 바르바토스 님과 파이몬 님을 더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런 평가에는 약간 주관적인 숭배심이 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두 분 전하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인기가 많지 않습니까?”

한 대공이 공손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객관성이 떨어지지요. 저는 가미긴 님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습니다.”

“헤에. 고마워.”

가미긴이 오른손에 포도주잔을 들고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나두 바르바토스나 파이몬한테는 조금 쑥스러운걸. 두 사람에겐 정말로 신비스러운 매력이 있는 것 같다고 할까아.”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순수하게 외모의 아름다움을 꼽자면…….”

대공들이 가미긴을 둘러싼 채 화기애애하게 얘기했다.

활짝 웃은 겉모습과 다르게 가미긴은 마음속으로 따분해하고 있었다.

‘어차피 바르바토스 앞에서는 바르바토스가, 파이몬 앞에서는 파이몬이 제일 아름답다고 말할 거면서. 뻔한 입발림에도 정도가 있어.’

가미긴이 능숙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포도주를 머금었다.

대공들 중에 몇 명이 슬쩍 곁눈질로 자신의 가슴골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노출이 심한 천옷을 즐겨 입었는데, 그것이 대공들의 음심을 자극한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재밌었다.

‘감정을 제어해봤자 나 정도 마왕이 되면 전부 알아차린다구, 머저리들아.’

가미긴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혹시라도 그런 대공과 시선이 마주치면, 장난스럽게 윙크를 보내서 대공들에게 의미심장한 제스처를 보내었다. 이럴 경우 대공들은 십중팔구 황공해하면서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최상위의 여자 마왕을 침대에서 쓰러트린다. 그것이 지옥대공들에게는 일종의 꿈이겠지.

‘그래, 더 구경해봐. 아예 대놓고 구경해도 좋아. 어서.’

대공들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가미긴은 은밀하게 매혹의 마법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녀가 능수능란하게 대공들을 휘어잡을 때였다.

연회장 정문에서 대기하는 시종이 큰 목소리로 알렸다.

“서열 제71위, 이면의 마왕! 단탈리안 전하 납시오――!”

연회장이 순간 조용해졌다.

가미긴의 가슴을 훔쳐보는 데 열중하던 대공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제법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누구보다 먼저 가미긴이 고개를 돌려버렸으므로 질책할 수가 없었다.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문 근처에서 멈추어섰다. 왼쪽과 오른쪽을 돌아보더니, 마치 샹들리에에서 내리쬐는 빛을 느껴보려는 듯 잠시간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남자가 연회장의 사람들에게 인사하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꺽다리에 몸집이 말랐다. 살집이 볼품없게 적었다. 얼굴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련지 모르겠지만, 가미긴에는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결코 미남이라고 부를 인물상이 아니었다.

“귀하신 분들께서 모여 계시군. 가미긴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단지 목소리만은 특별했다.

톤이 높지 않은데도 뚜렷하게 들렸다.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알아서 찾아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 목소리만큼은 가미긴도 내심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응, 단탈리안. 오랜만이야.”

“진즉에 찾아뵈려 했는데 제 몸이 형편없이 게으름을 피우는군요. 다 제 몸의 잘못이니, 부디 저를 질책하지 마시고 몸을 혼내주십시오.”

“단탈리안이 게으른 건 이미 모든 마왕이 알고 있는걸. 너그럽게 이해해줄게.”

가미긴이 미소를 지었다.

‘발칙한 새끼.’

단탈리안은 방금 우회적으로 섹스 어필을 했다. 가미긴과 나는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었다. 더없이 불쾌했지만 가미긴 입장에선 뭐라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가미긴 전하와 친하시지요!”

아니나 다를까. 대공 중 한 명이 떡밥을 물었다.

단탈리안은 시종이 날라준 포도주잔을 집어들고 대답했다.

“음. 본인이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분일세.”

“그리고, 혹시 실례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묻는 말씀입니다만……바르바토스 전하, 파이몬 전하, 거기에 시트리 전하와도 사이가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단탈리안이 웃었다.

“어디 실례될 것이 있겠는가? 그대가 옳게 말했네.”

“허면……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여마왕들 중에 어느 분이 특히나 아름다우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공들이 흥미진진하게 단탈리안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들도 알고 있었다. 가미긴이 이 자리에 있는 이상, 예의상이라도 가미긴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음을. 그것은 기본적인 예의이자 대화법이었다. 하지만 여자 마왕들과 두루 사귀는 단탈리안이기에 저절로 관심이 가는 것이었다.

단탈리안이 주저없이 말했다.

“아아. 그야 바르바토스 님께서 제일 아름다우시지.”

“…….”

대공들이 얼어붙었다.

그들은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단탈리안을 쳐다보았다. 정작 당사자인 단탈리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오. 포도주가 상당히 고급스럽군.”

정말로 아무런 생각이 없어보였다.

공기가 더더욱 싸늘해졌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대공들이 어쩔 줄 몰라했다. 똑같은 마족이라면 뭐라 불평이라도 해주겠지만 상대는 마왕. 단탈리안에게 뭐라 할 만큼 배짱이 좋은 대공은 아무도 없었다. 대공들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가미긴의 눈치를 살폈다.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가미긴이 생각했다.

‘진짜, 개새끼.’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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