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45화 (245/510)
  • 00245 던전의 주인  =========================================================================

    “어, 이봐. 나와 같이 마왕을……!”

    청년이 당황하면서 말을 재차 꺼내려 들었다.

    그때였다. 음식과 술을 서빙하는 여종업원이 청년의 발을 뒤에서 걸었다. 부지불식간에 기습을 받아버린 청년은 어, 어, 하다가 꼴사납게 넘어졌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그만 앞을 보지 못하고.”

    청년은 연달아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직면했다. 그럴 때는 정신머리가 없어져 상대방이 하는 대로 맞추어가기 마련이었다. 여종업원이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왔고, 청년은 맹하게 그 손을 잡았다.

    청년이 부축되어서 일어서려는 순간, 여종업원이 손을 놓았다. 청년이 속절없이 균형을 잃고 엉덩이부터 쓰러졌다. 쿵, 하고 청년이 넘어지자 사태를 예의주시하던 모험자들이 키득거렸다.

    “에구. 이거 어쩌나. 제가 여자라서 힘이 많이 약하네요.”

    종업원이 허리를 굽혀서 청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자칭 기사 지망생 씨. 저는 응원한답니다. 당신이 마왕을 토벌해야지 제가 자그마치 용사를 쓰러트린 여자가 되지 않겠어요?”

    주변에서 모험자들이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청년도 눈치챌 수가 있었다. 청년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이리 무례할 수가……!”

    “먼저 무례를 범한 사람은 그쪽이에요, 애송이 양반. 잘 들어.”

    여종업원 말했다.

    “여기는 잘나신 기사 나으리들한테 배워먹은 것을 써먹는 연습장이 아니야. 알겠어요? 여기는 우리 일터라고. 밥벌어서 먹는 장소. 알아들었어? 빌어먹을 세상이라지만 적어도 남 밥그릇을 대놓고 깨부수면 안 되지. 기본적인 예의야.”

    “마왕을, 밥벌이 도구로 생각하다니!”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물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훨씬 더 많아! 대륙을 비탄으로 몰아넣은 마왕을 토벌한다. 이것이 바로 그 중요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애송이 씨. 당신이 어떤 윤리관을 갖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없어. 당장 당신이 죽어 나자빠져도 그런 시시한 얘기를 대신해서 들려줄 사람은 넘치거든.”

    여종업원이 청년의 손가락을 꾸욱 잡았다.

    “마왕성 하나만 바라보면서 천의 모험자가 살아가고 있어. 이 도시에만 마왕성으로 밥 벌어먹는 인간이 수천 명이야. 당신이 그 대단하신 정의감으로 마왕을 토벌하고 나면 여기 모인 우리들 죄다 실업자 되는 거야.――수천 명의 인생, 책임질 수 있어?”

    “…….”

    청년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자기 한 몸도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에 수천 명을 등에 업겠다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주홍색 머리카락이 예쁜 종업원이 코웃음을 쳤다.

    “물렁자지 새끼야, 일하러 온 거 아니면 꺼져. 보다시피 여기가 항상 붐벼서 말이야. 댁 같은 사람이 멀뚱멀뚱 서 있으면 나도 모르게 몸이 부딪히거든.”

    청년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길드 청사에서 쫓겨났다.

    청년이 허둥지둥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모험자들이 다시 한번 웃었다. 그들에게 악의는 거의 전혀 없었다. 모험자들은 그저 끔찍하게 심심한 와중에 재미난 녀석이 와주었다고 여기고 말았다.

    고단한 삶에 웃음꽃이 피게 해주어서 고맙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험자도 꽤 있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인생이란 진지해지면 진지해질수록 손해보는 물건이었다. 어떻게 모험자와 같은 인생을 버텨내면서 또한 인생에 진지해질 수 있겠는가?

    “하여간 플뢰르 양은 너무 신입생한테 친절해.”

    한 모험자가 테이블에서 보리맥주를 마시며 얘기했다.

    “내가 누누이 말하잖아. 그럴 필요없다고. 내버려둬! 어차피 머구리들은 앞이 새까매서 누가 도와줘도 몰라. 의미가 없어, 의미가.”

    맞다, 옳은 소리다, 하고 여기저기서 맞장구를 쳤다.

    여종업원이 허리에 양팔을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대단한 꼰대 나셨네요. 어디 제가 그러고 싶다고 해서 세상만사 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요? 자기 성깔을 이기지 못해서 튀어나가는 거지. 이게 제 성질머리니까 관심 끄세요, 천치 양반아.”

    “우리 아가씨는 입도 험하다니까.”

    모험자가 맥주를 들이켰다.

    “크흐. 난 예전부터 궁금했어. 플뢰르 양, 왜 신입생들한테 만날 친절하게 굴어? 성질머리다 뭐다 말하긴 하는데 솔직히 변명으로만 들리거든. 아무래도 플뢰르 양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참견이라 이 말이야.”

    “…….”

    여종업원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되도록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저 마왕성에서는…….”

    모험자들이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이야기였다. 아마 마왕성에서 소중한 사람이 죽었겠지. 부모라든지, 연인이라든지, 오빠나 동생이라든지. 이쪽 세계에선 별다른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모험자들은 더 이상 캐묻고 들어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질문받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질문하지 마라.

    이 바닥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다면 불문율처럼 지켜야 할 명제 중 하나였다. 모험자가 보리맥주를 마저 마시면서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저 아가씨 애비가 유명한 모험자였지.’

    자그마치 붉은색 급의 모험자라고 했던가.

    틀림없이 자랑스러운 아버지였으리라. 자식을 키워냈다는 것 자체가 모험자에게 있어서는 세계를 구한 것만큼이나 대단한 과업이었다. 아비의 연줄 덕분에 플뢰르는 이쪽 도시로 이사오기 이전에도 옆 도시의 길드에서 일했다고 들었다.

    ‘단탈리안 마왕성에서 붉은색 급 모험자가 죽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는데…….’

    모험자는 의문이 생겨났지만 자연스럽게 생각하길 멈추었다.

    ‘뭐, 상관없나.’

    모험자는 올해로 모험자가 된 지 칠 년이 넘은 베테랑이었다. 여기 동네에서는 생각하는 것보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얼, 하고 그가 생각했다. 모름지기 세상과 여자란 비밀이 많을수록 아름답다…….

    *  *  *

    길드에서 쫓겨난 청년은 그날밤 길거리에서 노숙했다.

    돈이 없었다.

    “……그나마 춥지 않아서 다행이군.”

    청년이 건물과 건물 틈새로 비집고 들어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몸이 굳을까봐 걱정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약탈자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좁다란 통로에서 노숙하면 혹시라도 자신을 노리고 도둑들이 다가와도 대적할 수 있었다.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혹시나 해서 숙박비를 알아보았다. 역시 무리였다. 여관비가 문제가 아니라, 가정집의 마굿간을 빌려서 하룻밤 묵을 돈조차 없었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들어가면 염치가 없긴 하나 공짜로 잘 수도 있었겠지. 도시 인심이 야박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청년은 바로 그 염치가 마음에 걸렸다. 구걸하는 데 익숙하기에는 청년의 삶이 아직까지 평탄했다…….

    이제 전재산이 겨우 은화 한푼이었다. 이걸로는 빵을 네 덩어리 사먹으면 끝이었다.

    물론 며칠은 버틸 수 있다. 그렇지만 며칠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될까…….

    “아니,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지.”

    청년이 마음을 다잡았다.

    “뭐하는 거냐, 프리드리히 쉴러! 결심은 나약하고 현실은 냉엄하구나. 냉엄한 현실이란 높은 산맥과 같아서 그곳을 정복하는 자만이 영웅이 될 수 있다지 않는가!”

    청년은 수업시간에 배운 시조를 인용하면서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아카데미에서 꿈을 품으며 바라보았던 바로 그 밤하늘과 똑같았다. 청년은 이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즉,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든지, 귀족으로 태어났든 노예로 태어났든, 기사로 생활하든 모험자로 생활하든, 사람이 나아가야 할 길은 똑같았다. 그것이 정의였다.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느냐와 상관없다. 분명히 지금의 나는 비루하다. 너무나 비루한 나머지 더러운 골목길에 기대어서 잠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음날.

    “나와 함께 마왕의 조무래기들을 물리칠 용자는 없는가!”

    청년은 길드 청사에 들어가서 우렁차게 외쳤다.

    하룻밤이 지나자 아르테미스 여신께서 자신에게 자신감을 다시 불어넣어주신 것 같았다. 단지 마왕을 토벌하러 갈 용자, 라는 단어가 마왕의 조무래기를 토벌하러 갈 용자, 로 소소하게 바뀌었지만.

    “…….”

    여종업원이 청년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초리는 오히려 어제보다 싸늘해졌다. 그녀는 청년을 무시하고 모험자들에게 보리맥주를 날랐다. 모험자가 맥주잔을 넘겨받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정신을 못 차린대두.”

    “앞으로 한번만 더 내 앞에서 꼰대질하면 거시기를 아작낼 테니 그런 줄 알아요.”

    “흐이익!”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청년의 호기로운 외침에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청년은 이날도 아무런 소득이 없이 골목길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날.

    “나와 함께 사악한 마물을 물리칠 용자는 없는가!”

    청년은 여전히 자신만만하게, 그러나 약간 얼굴이 핼쑥해진 채로 소리쳤다. 모험자들은 벌써 익숙해져서 청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저놈이 언제까지 저럴지 보자며 내기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도, 다음날의 다음날도…….

    연속으로 사흘.

    청년은 굶고 있었다.

    “…….”

    배가 고팠다.

    안 그래도 먼길을 여행오느라 심신이 지쳐 있었다. 그 상태에서 며칠을 굶으니 제아무리 기사 지망생으로서 단련한 젊은이라 할지라도 버티기가 어려웠다.

    천만다행으로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사람들은 월요일마다 스프를 새롭게 끓였다. 그리하여 요일이 지날수록 스프가 물처럼 맹해졌다. 일요일은 스프가 가장 맹국인 날. 거지가 스프 한 모금만 적선해달라고 구걸해올 때, 월요일이라면 가차없이 내쫓지만 일요일이라면 선뜻 한 사발쯤은 내줄 수가 있었다.

    “국물 한 사발만 적선해주십시오…….”

    청년은 여섯 언덕의 마을을 하루종일 돌아다녔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 마을에서만 적선을 구하면 구걸스럽게 보일까봐 두려웠으므로.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면서 스프를 대접했다.

    “아니. 사지가 멀쩡한 젊은이가……쯧쯧.”

    본래 이런 맹국에도 임자가 있었다. 여느 마을에나 고아들이 살고 있었다. 고아원 같은 게 없는 이상에야 고아들은 가장 밑바닥 거지가 되어 생활했는데, 바로 이런 고아들에게 '일요일의 은혜'가 준비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고아도 아닌데다 몸까지 건실해보이는 청년이 스프를 나눠달라니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청년은 더 이상 모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동료를 구하지 못했지만 홀홀단신으로 마왕성에 들어갔다. 고블린 두 마리가 청년을 덮쳤다. 아카데미아에서 가장 약한 마물로 가르쳐준 짐승들. 그러나 청년은 고블린 두 마리를 해치우다가 그만 팔 한짝을 잃어버릴 뻔했다.

    “헉, 흐억……허억.”

    수업과 현실은 달랐다.

    고블린 두 마리도 이렇게 어렵거늘 만약 세 마리가 뭉쳐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두려움이 엄습했다. 마왕성은 도저히 혼자서 다닐 곳이 못 되었다. 청년은 고블린의 시체를 들쳐매고 헐레벌떡 빠져나왔다.

    몬스터를 도축하는 방법도 몰라서 무식하게 아예 시체 한 구를 매고 도망친 것이었다.

    청년은 백정에게 도축을 맡기고 은화 한푼을 벌었다. 바가지를 쓴 것이지만 시세를 모르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은화 한푼으로 빵 한덩어리와 치즈 한덩어리, 그리고 스프를 구해다가 먹었다.

    어찌나 맛있는지 눈물이 흘렀다.

    다음날.

    청년은 모험자 길드 청사에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블린 머리당 은화 한푼 받습니다. 고블린 한 마리당, 은화 한푼 받습니다……!”

    그 목소리는 약간 어색하지만 그럴저럭 건물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고블린 토벌하러 갈 사람 없습니까? 머리당 은화 두 푼이요. 도축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머리당 금화 하나는 말도 안 된다고!”

    “야. 내가 알아보니까 마족놈들 마탑이나 인간놈들 마탑이나 그게 그거야. 세상에 믿을 새끼 한 명 없어!”

    사람들이 여느 때처럼 웅성거리며 일거리를 찾아나서고 있었다.

    청년을 멀리서 지켜보며 여종업원이 피식 웃었다.

    “이제야 제대로 말하는 방법을 배웠네.”

    ============================ 작품 후기 ============================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플뢰르는 '대머리 애꾸눈 모험자' 파비안이 사랑했던 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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