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44화 (244/510)
  • 00244 던전의 주인  =========================================================================

    “……전하, 그것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침묵했다. 그것은, 하고 다음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상대방이 얼마나 뿌리 깊게 마왕을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다. <던전 어택>에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마계를 대표하는 마인 중 한 사람이었음에도 인류군에 들어갔다.

    마왕이 선천적으로 발휘하는 지배력에서 마인이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 즉, 강력한 노예각인을 걸어서 마왕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지배력을 넘겨주는 것.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스스로 용사의 노예가 되었다.

    그때는 아직 용사가 서열 제20위밖에 물리치지 못했을 때였다.

    아가레스는 물론이고 바르바토스도 건재했다. 한낱 인간 검사 나부랭이가 고위 서열의 마왕들을 떼로 몰살시키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인간 주제에 검을 제법 쓴다.” 그 정도 인식이었지.

    하지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수천 년 동안 마계에서 쌓아올린 커리어와 인맥을 버려가면서, 전재산을 처분하여 용사 일행에 합류했다. 도박을 건 것이었다.

    아주 약간의 확률에 불과할지라도 마왕들을 모조리 죽일 수만 있다면.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그렇게 생애를 불사지를 정도로 마왕이란 존재를 증오했다. 죽어도 본체를 보여주고 싶지 않겠지. 특히 나처럼 수상쩍은 구석이 넘쳐나는 마왕에게는 말이다.

    내가 물었다.

    “쿤쿠스카의 주인이여. 어떻게 해도 안 되겠는가?”

    책망하는 게 아니었다. 착잡한 어투였다.

    “우리 둘 사이에는 서로 쌓인 것이 많다. 헌데도 본인은 그대를 따로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그대가 알지 모르겠다만 본인의 인맥은 그리 얕지만도 않다. 원하기만 했다면 언제든지 바르바토스, 마르바스, 가미긴에게 말했을 터이다. 쿤쿠스카를 더 이상 믿지 말라고.”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얌전히 듣고 있었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글쎄, 마음속은 어떨련지.

    상인이란 신뢰로 먹고 산다. 마계의 상회에게 마왕이란 신뢰의 보증수표이다. 이 상회는 마왕 전하께 물품을 납입합니다, 라는 꼬리표는 상회의 자부심과 같다.

    그런 마왕들에게 버림받는다. 아무리 쿤쿠스카 상회가 잘 나간다 하더라도 크게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로서는 결단코 원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하지 않았다.”

    “…….”

    “왜인 줄 아는가? 본인이 그대에게 감사의 마음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월맹군에서 파이몬을 몰아넣었던 것 역시, 그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겠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황송하옵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군…….”

    내가 피곤한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겉치레로 감사하다는 말 따위를 듣고 싶어서 꺼낸 얘기가 아니었는데.

    “아직도 모르겠는가. 나는 그대를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고 있다.”

    “……!”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상대방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 이전에 무엇을 받았는가 고려하면서 상대방과 관계를 맺어간다. 그것이야말로 상대방을 나와 동등하게 여긴다는 증거이다. 눈앞의 상대를 똑바로 직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지.”

    내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본인은 예전부터 자네와 그렇게 관계를 이루어가고자 했다. 그렇지만 자네에게 나는 그저 여느 마왕들과 다를 바 없는 자로만 비추는 모양이군…….”

    연설전이 끝난 직후에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절규하듯이 한탄했다. 마왕에게 결국 마인이란 자기보다 덜떨어지는 애완동물 같은 것 아니냐고. 우리에겐 정녕 자유가 주어져 있지 않는 것이냐고…….

    “우리 중에서 정작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쪽은 그대이지 않는가? 자네는 제멋대로 나를 판단하고 있어. 나는 그것이 참을 수가 없군.”

    “전하.”

    “되었네. 쿤쿠스카 상회에 마법물품 일체의 중개권을 맡기지.”

    내가 일어서서 등을 돌렸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부디 좋은 장사를 하길 바라네, 쿤쿠스카의 상주여.”

    “…….”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등 뒤에서 곤혹스러운 감정,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도망치듯이 접견실에서 물러났다.

    접견실. 마왕성이 화려해지면서 이런 방까지 생겼다. 마계와 대륙의 유명한 예술작품이 벽지처럼 흔하게 걸려 있었다. 벽면에는, 내가 사냥해본 적도 없는 오우거 대가리가 뚝 잘려진 채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곳은 화려하지만 적막했다.

    *  *  *

    단탈리안의 마왕성에 대한 풍문은 금세 대륙 각지에 퍼졌다.

    피난민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곳에 몰려갔지만, 정반대로 확실하게 적의를 갖고 마왕성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었다.

    “단탈리안이라면 인류를 모욕하고 농락한 마왕이잖아. 어떻게 그런 마왕한테 살고자 손을 벌릴 수가 있는지, 하. 내가 마왕 단탈리안을 토벌하겠어!”

    보통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인간, 나이가 어린 자였다.

    그중에는 기사 지망생도 꽤 많았다. 대부분 열다섯 살에서 열여덟 살의 청년으로, 재능이 엿보여서 어린 시절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시간이 지남으로써 '불량품'으로 판명된 이들이었다.

    아카데미의 교육비용은 일개 평민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영주의 밑에 가신으로 들어가서 수십 년에 걸쳐 갚아야만 했다. 문제는 이런 불량품은 영주 입장에서도 써먹기 애매하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평범한 병졸보다는 쓸 만했다. 몇 년 동안이나 기사로 교육받았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자존심이 쓸데없이 너무 컸다.

    “자네들은 앞으로 우리 영주님, 우리 국왕 전하를 바로 옆에서 보필할 기사로 자라날 것이다. 기사라는 것에 긍지를 갖고 언제 어디서나 명예로운 전사로서 행동하도록.”

    기사 지망생들은 머리에 피가 마르지 않았을 때부터 그런 말을 들어왔다. 분수에 맞지 않는 교육이 뼛속까지 각인되어버린 것이었다. 평범한 군대에 넣어봤자 저 혼자 콧대가 높아서 분란밖에 일으키지 않았다.

    다행히 몇 명은 일찍부터 현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이 써먹을 구석이 있음을 교관에게 열심히 보여주었다. 그런 이들은 하사관이 되어 말단이나마 영주의 가신단에 소속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죽어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종자가 있는 법.

    청년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분기탱천했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교관에게 실망하면서, 자기보다 정의심도 떨어지고 기사답지도 않은 동급생들이 성공한 것에 질투하면서.

    “두고 봐라. 내가 영웅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면 그때 사정을 해도 기사가 되어주지 않을 테니까!”

    물론 평민인 청년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손에 휘황찬란한 졸업장이 들렸을 뿐. 달리 표현하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갚아나갈 빚문서였다.

    청년에게는 졸업장이 마냥 자랑스럽기만 했다.

    “나는 프리드리히 아카데미아를 졸업한 사람이라구.”

    사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정작 본인에게 아무것도 없기에, 그런 종이쪼가리에 무언가 대단한 가치라도 있는 것처럼 매달리는 것이었다.

    이런 부류의 청년이 선택할 길은 별로 많지 않았다. 물론 고개를 살짝 돌리기만 한다면 실로 엄청나게 많은 선택지가 보이리라. 그러나 본인이 고개를 돌릴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존심을 만족시키면서 더 나아가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길…….

    “마왕을 토벌한다.”

    그리하여 청년은 가볍게 행장을 챙기고 마왕성으로 향했다.

    마왕 단탈리안의 서열이 최하위였다는 것도 중요했다. 청년은 우둔했지만 자기가 서열이 높은 마왕을 토벌하리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서열 제71위의 마왕이라면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혼자서는 불가능해도 동료를 모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허황된 꿈을 안고 칼잡이들이 단탈리안 마왕성에 몰려들었다.

    “……깡촌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청년은 마왕성 부근에 제법 그럴듯한 도시가 들어선 것을 보고 놀랐다.

    인간들에게 검은 산맥은 대충 몬스터가 돌멩이처럼 많은 곳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검은 산맥 아래에 이런 도시가 있어서 우선 놀랐다.

    이제 청년은 정말로 무일푼이었다. 그나마 모아두었던 돈도 마왕성까지 여행오느라 전부 써버렸다. 청년은 급하게 도시의 모험자 길드로 들어갔다.

    모험자 길드가 번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다 낡아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이 아니었다. 제대로 벽돌로 지어서 길드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음.”

    청년이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되어야 자신의 영웅적인 일대기가 시작될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청년이 꿈에 부풀어오른 채로 길드에 들어갔다.

    길드 안쪽은 제법 시끌벅적했다.

    “고블린을 토벌하러 갈 사람 없습니까? 머리당 은화 두 푼만 받겠습니다.”

    “아니, 머리당 1골드라는 게 말이 돼!? 우리도 겨우 벌어먹고 살아!”

    “그러니까 거기 마탑보다는 헬레나 마탑이 값을 더 쳐주더라고. 지금까지 숫제 손해보고 살았다니까, 시발.”

    우락부락하게 생긴 모험자들이 사람을 구하거나, 고용비를 두고 교섭하거나, 유용한 정보를 나누었다. 청년보다 적어도 네 살은 더 먹은 사람밖에 없었다.

    청년은 약간 긴장했지만 그럴수록 자신만만하게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접수처에서 모험자 등록을 한 다음――등록비 1골드가 없어서 청년은 또 빚을 져야만 했다――, 청년은 건물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할 수 있다. 쉴러, 너는 할 수 있는 녀석이야.’

    청년이 숨을 한껏 들이켰다.

    ‘나는 이런 어중이떠중이와 달라. 어릴 때부터 검만 잡았다고. 마왕 따위 두려울까보냐. 성공해서 금의환향하고 말 테다. 자, 가자. 화끈하게 가는 거다.’

    청년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모험자들이여, 누구보다 전사의 삶에 가까운 자들이여!”

    목소리가 컸다. 모험자들이 시끄럽게 떠들던 것을 뚝 멈추고 청년을 바라보았다.

    깡패처럼 인상이 험악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쳐다보자 청년은 그만 위축될 뻔했다. 그러나 기껏해야 모험자가 아닌가. 청년이 계속해서 외쳤다.

    “그대들도 일찍이 마왕을 토벌하고자 열정을 품었을 것이다. 지금 그대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낱 고블린이나 잡으면서 하루벌이에 만족하고 있다. 그대들이 보기에 지금의 생활이 부끄럽지 않은가!”

    “…….”

    “그대들도 알다시피 마왕 단탈리안은 천인공노할 죄인, 인류인 우리가 그를 잡지 않는다면 여신들께서 용서하시지 않으리라!”

    모험자들은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단지 조용하게 청년을 쳐다보았다.

    청년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모험자들이 귀를 기울여주고 있었다. 역시 모험자들도 인간이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마왕을 토벌하자는 열의를 간직해온 게 틀림없었다.

    그가 기세 좋게 말했다.

    “나는 쉴러, 프리드리히 아카데미를 졸업한 기사이다. 마왕 단탈리안을 토벌하고자 여기까지 왔다. 나와 함께 인류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용자가 있다면, 자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히 앞으로 나와라. 우리 함께 마왕 단탈리안을 물리치자!”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청년은 그럭저럭 괜찮은 연설이었다고 자평했다. 목소리가 지나치게 과장되지도 허약하지도 않았다. 상대방을 너무 깔보지도 치켜세우지도 않았다. 청년이 생각하기에 연설에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모험자들이 돌려준 것은 호응이 아니었다.

    ““푸하하하하하!””

    웃음소리. 거대한 웃음소리였다.

    사십 명이 넘는 모험자가 입을 모아서 웃었다. 접수대의 사무원까지 낄낄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웃음소리가 그리 길지도 않았는데, 모험자들은 정확히 딱 오 초 동안만 신나게 웃어재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쓱 돌렸다.

    모험자들은 자기네가 하던 대화를 계속했다.

    “고블린을 머리당 은화 두 푼만 받습니다―.”

    “은화 다섯 푼으로 가자고. 이게 최저한이야. 안 그래? 댁도 양심이 있다면…….”

    “그래. 마인놈들이 운영하는 마탑이 의외로 더 믿음직스러워. 나도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익숙해지니까 별로, 뭐. 괜찮더라고.”

    한때의 소나기가 지나가고 모험자 길드는 바로 조금 전과 똑같이 시끌벅적해졌다.

    “…….”

    오로지 청년만이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대체 무슨 반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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