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42화 (242/510)

00242 모름지기 정치란 꼼수이니  =========================================================================

돌덩어리를 하나 옮겼더니 백금이 주어졌다.

소식이 금방 마을들에 퍼졌다. 사람들은 마왕 전하가 혹시 해괴망측하게 장난하신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사흘 뒤, 다시금 대공회당 정문에 포고령이 붙었다. 터무니없는 명령이 붙어 있었다.

─ 사흘 전에 야머가 옮긴 돌덩어리를 도로 이곳에 옮기는 자한테 금화 삼백을 하사한다.

이번에 영지민들은 군말을 꺼내지 않았다. 당장 언덕 아래로 질주했다.

“노인네들은 비키쇼! 거 무리하다가 허리만 아작날라!”

“꺼져라, 애송이들아! 내가 팔팔할 때는 바위 두세 개 거뜬하게 들었던 양반이야!”

사람들이 툭탁거리며 돌덩어리를 향해 질주했다. 한 청년이 먼저 도착하였으나, 영지민들은 청년에게 양보하지 않고 득달같이 돌덩어리에 달라붙었다.

“아니, 내가 맨 먼저 도착했는데 다들 왜 이럽니까! 이거 내 껍니다, 내 꺼!”

“네것내것 좋아하네. 흐흐, 포고령에서 한 사람만 옮기라도 말한 적 없다.”

“아이고, 세상에 이런 순 날강도들을 봤나!”

청년은 억울하여 분기탱천했다. 이제 예순 살이 넘은 장로마저 콧김을 드세게 몰아쉬며 바위에 찰싹 들러붙었다.

“욘석아. 네놈이 겨울에 쫄쫄 굶어디질 판에 군식구 보살펴준 은혜를 잊었느냐?”

“아, 아니. 그 이야기는 또 왜 지금 꺼내요?”

“예끼! 지금 날 내쫓으면 그놈 참 후레자식이라며 여신들께서 진노하실 거다!”

청년이 주춤하자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달려들었다.

“야! 우리집 대장간인 거 알지? 너 새끼, 이거 혼자서 먹으려고 그러기만 해봐. 앞으로 농기구고 뭐고 절대로 안 빌려줄 테다.”

“마을에서 왕따 당하고 싶으면 어디 혼자 드셔보시든지. 아님 고향 떠나서 지 혼자 잘 살아보든가!”

청년이 울상을 지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졸지에 열네 명이서 돌덩어리를 운반하게 되었다.

바위를 대공회당 정문에 다시 갖다두자, 아니나 다를까 치안대원이 달려와서 하사금을 선물했다. 상자에는 정말로 금화 삼백 개가 들어 있었다. 열네 명의 영지민은 환호성을 지르며 금화를 평등하게 나눠가졌다.

이렇게 되자 묘한 일이 생겼다. 사람들이 이제나 저제나 대공회당 앞에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머릿수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백 명이 넘었다.

안타깝게도 돌덩어리를 옮기라는 포고령은 결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탄했다.

“으으, 역시 마왕 전하의 심심풀이였나…….”

“내가 그때 거기 있어야 했는데!”

그런데 얼마 후, 난쟁이들이 와서 돌덩어리를 조각하기 시작했다.

영지민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난쟁이가 조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위에 문자가 새겨지고 있었다. 난쟁이들은 뚝딱 글자를 새겨넣은 다음에 떠났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제1조. 영지는 영원불멸의 주권자인 영주가 통치한다.」

「제2조. 영지민은 영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평등하게 위임받는다. 영주의 통치권이 침해받지 않는 이상, 영지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지켜진다.」

「제3조. 단체나 개인은 위임된 권리에 따라서 반드시 영지민의 자유, 영지민의 재산, 영지민의 안전, 그리고 세계의 발전과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

세 개의 조항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지난 번에 새로이 만들어진 법률임을 알았다. 그리고 마왕 전하가 벌인 것이 해괴망측한 농짓거리가 아니며, 자신들한테 명명백백하게 포고문을 내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이해했다.

소위 새로운 법률에는 사실 조항이 더 많았다. 그러나 단탈리안은 일단 가장 중요한 조항만을 영지민들 머릿속에 각인시키고자 했다.

돌덩어리는 <야머의 바위>라고 불렸다.

단탈리안이 직접 붙인 이름이었다. 그는 곧이어 열린 대공회(大公會)에서 영지민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이제부터 본인이 그대들에게 명령하거나 협조를 구할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야머의 바위 앞에 포고문을 붙일 것이다. 문자를 읽을 줄 모르는 영지민을 위해서 본인은 대리인에게 명령하여 포고문을 낭독하도록 배려하겠다.”

“그러나 어째서 야머의 바위인가?”

“법률을 만들어낸 사람은 분명히 본인이다. 차라리 단탈리안의 바위라고 이름하지 않고 영지민의 이름을 이 상징적인 바위에 붙인 까닭은 무엇인가?”

“영지민들이여. 왜냐하면 법률을 실행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그대들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권리는 틀림없이 나 단탈리안으로부터 비롯한다. 허나 그대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명심하라.”

“오로지 그대들만이 그대들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영주는 결코, 절대로 그대들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주지 않는다! 이것은 여신들께서 우리에게 삶을 선물하셨으나 정작 삶을 경작해야 하는 장본인은 그대들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영주는 여신과 그대를 중개해주는 사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은 저 바위를 야머의 것이라고 부르노라. 바로 그대들의 법률이라는 뜻이다. 영지민들이여, 이 점을 명심하고 살아갈지어다.”

여기에는 물론 속임수가 숨겨져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속임수는 주권자가 영지민 전원이 아니라 단 한 명, 마왕 단탈리안으로 정해진 것이었다.

영지민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간다. 단지 영주에게 '은혜롭게' 권리를 내려받은 한에서만. 이는 영지민들이 언제나 영주한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으며, 당연하지만 단탈리안을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여기게끔 유도했다.

……우리가 잘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우리가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애당초 노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단탈리안 전하께서 우리에게 자유롭게 살 권리를 하사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되어도, 평화를 만끽해도, 자유를 누려도, 모두 근본적으로는 단탈리안 전하 덕분이다…….

이것은 기괴하고 위험한 논리였다.

“단탈리안 전하 만세!”

그러나 영지민들은 환호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차피 영지민에게 주권과 같은 개념은 낯설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 즉 영주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실이었다. 영지에 귀족도 노예도 없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얘기 아닌가!

귀족의 폭정에 시달린 사람들은 ‘앞으로 영지에는 어떠한 귀족도, 어떠한 노예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단탈리안을 열렬하게 지지할 따름이었다.

*  *  *

내가 대공회당에서 연설을 끝내고 마왕방에 돌아왔다. 사람들이 내 뒤를 배웅하면서 한참 동안 만세를 연창하는 바람에 서둘러 자리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데이지는 시중을 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 곁에 있었다. 마왕방에 돌아오자――마왕방으로 통하는 순간이동 장치를 드디어 완성하여 빨리 돌아왔다――데이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흑발의 소녀는 냉랭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지?”

“전부요.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것 전부가 기만이고 허위예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내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데이지가 말했다.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면, 그 사람이 살아갈 권리 또한 당연히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인생을 살아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들이 살아갈 권리를 나눠준다는 말이죠?”

데이지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아버님은 자기 말을 스스로 위반하고 있어요. 모순입니다.”

“호오.”

“그저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을 주워모아서 사람들을 속였을 뿐이에요.”

내가 침대에 누워 시원하게 기지개를 폈다.

“으으음.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

“우리 데이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화주의의 투사가 되었구나. 루크에게 전염되기라도 했느냐? 어차피 나의 영지이고 나의 소유물이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는데 무슨 모순이 있다는 말인지, 원. 내 것을 빼앗아서 영지민 모두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글쎄.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니라 영지민들이 알아서 일어나야 할 일 아니겠느냐?”

애초부터 민주주의적인 영지 따위 만들 생각이 없다. 뭣하러 그러겠는가.

그때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마법수정구가 번쩍거렸다.

수정구는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파이몬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수정구였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수정구를 활성화시켰다.

─ 잘 지내나요, 단탈리안?

적발의 아름다운 마왕이 허공에 투영되었다.

“예. 덕분에 편안하게 쉬고 있습니다.”

파이몬은 때때로 이렇게 통신을 걸어왔다. 별 대단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신변잡기이며 최근에 혁명투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평범한 얘기를 나누었다.

곧잘 파이몬은 혁명이 성공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때마다 나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파이몬을 위로했다.

“파이몬 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본래 사람이란 인습에 젖어서 사실 자신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합니다. 그런 망각의 힘을 이겨내고 모든 대륙에 진정한 이상사회를 펼치는 것……이것이 쉬울 리가 없지 않습니까.”

파이몬이 한숨을 쉬었다.

─ 물론 그렇사와요. 하지만, 아무래도 불평할 수밖에 없네요…….

“파이몬 님께서 지금 인내하시는 고난은 말하자면 파이몬 님 개인을 위한 고뇌가 아니요, 인류와 마인 전체를 대신해서 떠맡는 고뇌입니다. 그 고뇌의 무게는 당연히 무겁습니다.”

─ …….

“파이몬 님, 힘내십시오. 다른 모든 사람이 파이몬 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매도할지라도 저만큼은 당신을 지지하겠습니다. 공화주의가 승리하는 그날까지.”

대체로 통신은 이렇게 끝났다.

파이몬도 괴롭겠지.

해방동맹의 동지들이 있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평등한 동지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파이몬이 그들의 대장이었다. 대장이 된 자로서 섣불리 부하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과 입장이 대등한 마왕들 중에서 공화주의를 이해해주는 자도 없었다. 오직 나만이 파이몬의 이야기를 들어줄 입장이 되었다.

뭐, 개인적으로 나는 일종의 카운셀링이라고 생각한다. 몇 분 잡담하는 것만으로 파이몬과 친분을 유지할 수 있다. 이득을 보면 봤지 손해는 전혀 없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데이지가 어째서인지 맹한 눈초리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음?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아버님께서 영지민들에게 자유권을 인정하실 생각이 없다는 것까지요.”

“그래. 자기 권리를 얻고 싶다면 혁명이든 뭐든 일으키라고 그러려무나. 뭐 아쉬운 게 있어서 내가 그들에게 권리를 선뜻 넘겨주겠는가? 어차피 세상 일이란 그런 거다.”

데이지가 갑자기 한숨을 거하게 쉬었다.

“응? 사람이 말을 하는데 한숨을 쉬는 건 어디서 배운 예절이냐.”

“아뇨. 그냥, 아버님께 이런 말을 꺼낸 제가 멍청했다 싶어서요.”

데이지가 꼭 예순 살 먹은 노인처럼 자조했다.

“아버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빤히 알고 있는데 말이지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아무튼, 네가 멍청하다는 건 사실이지만.”

“예. 전부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로.”

헤에. 웬일로 데이지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본래 죽어도 자기가 못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센 녀석인데 말이야. 그 때문인지 얘가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예뻐보였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그날밤은 데이지를 괴롭하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진실해지니 얼마나 보기가 좋은가?

============================ 작품 후기 ============================

참고로 작중에는 묘사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단탈리안은 데이지를 매일 조교하고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