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41화 (241/510)

00241 모름지기 정치란 꼼수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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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팔라티노 언덕 꼭대기에 어린아이만한 돌덩어리가 우뚝 섰다.

돌덩어리는 희안하게도 고급스러운 비단을 걸치고 있었다. 왜 이런 바위에 값비싼 비단이 있는가, 하고 행인들이 한번씩은 쳐다보았다. 몇 명은 이게 보통 돌덩어리가 아니라 신령스러운 물건인가 싶어서 유심하게 살펴보기도 했다.

이리저리 뜯어보아도 평범하게 생긴 돌이었다.

사람들이 의아스러워 다함께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런 게 왜 대공회당(大公會堂) 앞에 놓였지?”

“누가 장난 삼아서 옮겨놓은 것 아니겠나. 으이그, 요새 젊은 것들이란.”

“어디 곳간이 남아돌아서 비단으로 장난질을 쳤으려구요. 괜히 주름살이 특권이라고 젊은이들 욕하지 마쇼, 아재.”

대공회당은 단탈리안의 명령에 따라 건설된 재판소를 가리켰다.

마왕 단탈리안은 이곳을 재판소라고 불렀지만, 마을들 사이에서 대소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이곳에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공회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원래 마을에서 공회당 구실을 하던 집과 구분 짓기 위해서 영지민들은 여기를 ‘큰 집’이라 불렀다.

“비단에 포고령이 적혔는데?”

영지민 중 소수가 문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인간이었다. 그들은 고급스러운 비단에 글자가 적힌 것을 알아보았다.

“돌덩어리를 언덕 아래까지 옮기라는군.”

“으응? 뭣하러 그걸 옮기라고 포고씩이나 붙고 그려.”

“나도 그건 모르겠는걸…….”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비단을 마저 읽었다.

“그런데 일단 옮겨놓으면 금화 일백을 수여한다는데.”

“금화 일백?”

영지민들이 잠시 침묵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역시 장난이구만. 거보게, 내 뭐라 그랬는지.”

“이거 걸려들었다가 된통 웃음바가지나 뒤집어쓰는 수법이네. 뻔하지.”

“어서 들어가세.”

비단에 적힌 말을 곧이곧대로 받들어서 낑낑거리며 바위를 옮기면, 어떻게 그런 헛소리에 진지하게 반응하느냐고 놀릴 게 분명했다. 체력은 체력대로 소모하고 한동안 마을사람들의 술안주로 전락하겠지.

영지민들은 자그마한 해프닝을 무시하고 대공회당에 들어갔다. 집회가 끝난 후, 사람들이 다시 출입구로 나왔다. 여전히 돌덩어리가 치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왕 전하께서 만드신 장소인데 웬 염병할 놈이 입구부터 장난질이야!”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이, 파르시 영감. 이거 진즉에 치울 것이지 왜 여태껏 내버려두었어?”

“영감이라고 부르지 마쇼, 이 영감탱이야. 열일곱 청춘보고 누가 영감이래.”

파르시가 대공회당에서 뒤따라 걸어나왔다. 사람들이 낄낄 웃었다.

“전하께 감투를 받았으면 나이랑 상관없이 영감님이지. 말이 열일곱이지 네 면상떼기가 어디 열일곱 먹은 상태이시냐. 너 벌써 인생 다 살았다, 애늙은아.”

“꺼지시구랴. 내 기필코 올해엔 참한 색시 얻을 테요.”

사람들이 더 크게 웃었다.

“얼씨구. 네놈처럼 곰탱이 아들처럼 생겨먹은 게 잘도 장가가겠다.”

“아, 꺼지라니까!”

파르시가 으르렁거렸다.

수가 틀리면 자그마치 마을의 촌장을 도끼로 찍어버리는 파르시였지만, 평소에는 그저 놀리기 좋은 총각에 불과했다. 게다가 사람들 대부분은 파르시가 어느 아가씨를 사모했는지, 그리고 총각의 연정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알고 있었다.

파르시는 바로 위대하신 마왕 전하의 아내,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좋아했다. 첫눈에 반한 것이었다.

외모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사랑이 이루어지기란 절대로 불가능했다. 금발의 아름다운 아가씨는 얼마 전 영지 전체에 새로운 법률을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농부의 아내처럼 단순히 밭을 가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영지민들에게도 명확했다.

영지민들이 웃음소리 뒤에 숨어서 속닥거렸다.

“저거 저게 진짜 병신이래두. 그리 아름다운 아가씨한테 마음을 뺏겼는데 다른 처녀들이 눈에 들어오겠어?”

“쯔쯧. 촌장에다 마왕 전하의 신임까지 받으니 눈만 좀 낮추면 다 골라서 잡아갈 수 있을 것인데. 지 복을 제 발로 차는 꼬락서니 보소…….”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한숨을 쉬었다. 저놈은 틀려먹었다.

“저번 날엔 우리 여편네가 글쎄, 마왕 전하와 그 금발 아가씨가 외딴 밀밭에서 떡치는 걸 보았다지 않는가! 궁합도 그런 찰떡궁합이 없다는데 글쎄, 아주 가망이 없지.”

“소문으론 몇 번 들었는데 설마 참말이려구.”

“아, 그거 진짜야. 나도 보았다네. 우리 전하께서는 퍽 남사스러우시지!”

영지민들이 키득거렸다. 그들은 과연 파르시가 5년 안에 장가갈지 7년 안에 장가갈지 내기를 걸었다. 파르시, 애늙은이 영주대리인에게 희망이란 요원했다…….

“파르시. 아무튼 거 보기 흉한 바윗덩어리 좀 치우게. 대공회당 정문에 이게 뭔가? 뭣하면 지금 우리들이 한손 거들어줄 테니.”

“아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소만.”

파르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 장난질로 모셔둔 게 아니오. 마왕 나리께서 정식으로 놓은 물건이라오.”

“에엥?”

영지민들이 한층 더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나라고 마왕 나리께서 생각하시는 걸 죄다 꿰고 있겠수?”

파르시가 하소연하는 투로 말했다.

“갖다 놓으라니까 시키는 대로 했지. 염병, 꼭두새벽부터 팔자에도 없는 돌덩어리 운반하느라 허리가 빠지는 줄 알았소.”

“써먹지도 못한 허리인데 조심히 관리해야지. 끌끌.”

“썅. 아재들, 나 놀려먹으면 재밌수?”

“꿀맛도 그런 꿀맛이 없더라.”

사람들이 웃는 가운데 몇몇 사람은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영지민인 그들이 바라보기에 마왕 단탈리안은 선군(善君)이 아닐지언정 현군(賢君)이었다. 가끔씩 밀밭에서 연인과 남사스러운 짓을 치르거나, 영주님이면서 손수 밭을 일구는 등, 여러모로 희안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영지 통치에 관련해서는 언제나 절도와 도의가 있었다. 절도란 영주가 한번 영지민 앞에서 입에 담은 말을 결코 번복하지 않음을 가리켰으며, 도의란 시기와 때를 간파할 줄 알아 통치에 융통성을 담아냄을 가리켰다.

예컨대 단탈리안은 세금을 걷지 않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수리세이니 특별세이니 하는 온갖 잡스러운 세금을 매겨도 '뭐, 다 그렇고 그런 거지' 하고 영지민들은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본래 다른 영지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의 아들딸이었다. 폭정이란 그들에게 더없이 익숙했다.

폭정이 문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로 폭정을 하느냐가 단지 문제인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단탈리안은 절도 있는 영주로서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각인되었다. 우리 영주님은 헛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영주님이 한다면 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되고 있었다.

‘이거, 아마도 영주님께서…….’

‘음. 무언가 생각을 담아두신 것 같은걸.’

노련한 장로들이 소리없이 눈으로 대화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 전하께서 뭔가를 의중에 두셨다. 그것만 알았으면 충분했다. 정확히 의중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것은 주제에 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은가?

장로처럼 인생에서 두 발자국쯤 물러서는 이들과 다르게, 어떤 젊은이는 성큼 앞으로 나갔다.

“전하께서 보증하시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지.”

젊은이는 야머라는 이름을 가졌다. 지주 집안의 차남이었다.

이 시대에 차남이 흔히 그러하듯이 야머도 부모에게 농토를 물려받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단탈리안이 3할의 세율을 매긴 소작지에 들어갔다.

‘다 전하 덕분이야.’

젊은이는 자신과 같은 차남들에게 기회를 마련해준 단탈리안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평소부터 그런 마음을 가진 터에 마왕 전하께서 친히 명령하신 바라고 하니, 제아무리 장난질로밖에 보이지 않더라도 나선 것이었다.

“비키시오. 내가 하겠소.”

“으응? 아니, 그래도 돌덩어리 하나 옮기는데 백금이 들 리가 없지 않은가.”

아직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머 역시 정말로 백금이 하사될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냥 단순하게, 마왕 전하께서 내붙인 포고이니 마땅히 따라야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렴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허언이겠나? 여기 바위에 둘러친 비단이라도 주시겠지. 나는 그것만 챙겨도 이득이거든.”

“뭐, 하긴…….”

“비단 정도라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욕심이 생긴 눈으로 바위를 바라보는 사람도 생겼다. 저 비단만 해도 값어치가 꽤 나갔기 때문에. 하지만 선수필승이라, 야머가 먼저 나선 탓에 사람들은 입맛만 다셨다.

“흐으으읍. 읏차아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야머가 돌덩어리를 힘차게 들어올렸다. 상당히 무거웠다.

“크흐흡……! 파르시. 언덕 아래면 아무데나 괜찮은가?”

“장소에 대해서는 딱히 말씀하신 바 없으니 마음대로 해.”

“좋아! 천하장사 야머 님께서 가신다아아아!”

야머가 성큼성큼 언덕 아래를 내려갔다.

사람들은 구경거리가 났다며 야머를 따라갔다. 어차피 공회가 끝나서 각자 마을로 돌아가야 했으며, 과연 마왕 전하께서 어떤 장난을 준비한 것인지 궁금했다. 야머는 중간중간에 팔다리를 후들거리며 간신히 걸었다.

“농사 짓는 놈이 힘이 그게 뭐냐!”

“우우우!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천하장사는 개뿔에 천하장사야!”

영지민들이 신나서 비아냥을 쏟아냈다. 야머는 이마에 힘줄이 돋았지만, 돌덩어리의 무게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사람들에게 불평을 돌려줄 여유가 없었다.

“크하아아! 아이고, 삭신이야!”

사 분 뒤에 야머가 언덕 아래에 도착했다. 그가 쿵, 하고 돌덩어리를 내려놓았다. 야머는 그 자리에서 땅바닥에 누웠다.

“그놈 한번 겁나게 무겁네!”

“저거 저, 쬐매한 돌멩이 하나 들었다고 엎어지는 거 보소.”

“저래 가지고 부인한테 제대로 힘이나 쓸련지 몰라.”

사람들이 큰소리로 웃던 그때였다.

언덕 위에 지어진 초소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치안대원. 즉, 제레미를 따라서 이곳까지 온 암살단원 두 명이 다가왔다. 마을사람들은 치안대원이 보통 무예가 출중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다소 긴장했다. 무슨 일인가?

엘프답게 귀가 뾰족한 치안대원이 겉보기에도 호화로운 상자를 꺼내들었다.

“바위를 옮긴 사람이 누구지요?”

“저, 저입니다만.”

야머가 화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치안대원이 소리쳤다.

“그대들은 들으라! 나 단탈리안의 이름으로 내걸린 포고에 충실히 따랐으니, 그대에게 약속한 바 그대로 이 자에게 금화 일백을 하사한다.”

“어, 예……?”

“마왕 전하께서 내리시는 포상입니다. 공손하게 받으시길.”

야머의 맹한 눈동자에 퍼득 정신이 돌아왔다.

그가 돌을 옮기느라 부어오른 손바닥을 내밀었다. 치안대원이 예의바르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가슴팍만한 상자였다. 이 상자만 팔아도 금화가 몇 개 떨어질 것임을, 이곳에 모인 영지민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그러니까.”

꿀꺽.

야머가 침을 삼켰다. 그가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결연하게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서는 정말로 금화더미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허어어억!?”

야머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영지민들도 야머를 따라서 마치 합창대가 된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온화하게 기다리던 장로들조차 나이를 잊어버린 채 높고 높은 비명소리를 질러댔다. 금화였다. 촌구석 농사꾼들이 본 적도 없는 금화가 언덕마냥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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