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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40화 (240/510)

00240 모름지기 정치란 꼼수이니  =========================================================================

마왕방 구석에 짐을 내려놓았다. 각종 물약과 필기구가 담긴 배낭이 풀썩, 소리를 내며 침대에 안착했다.

“오늘은 자체 휴일이다!”

나는 가방과 더불어 침대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수영이라도 치는 것처럼 팔다리를 놀렸다. 침대가 온수처럼 따뜻하게 내 몸을 받아주었다.

“예의에 어긋납니다, 단탈리안 님.”

라피스는 나 대신에 배낭을 정리해주었다. 물품이 어지럽게 섞인 배낭을 능수능란하게 정리했고, 마왕방 곳곳에 물건을 가져다 놓았다. 어디에 어떤 물건이 위치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침대에서 자유영을 선보이며 말했다.

“라피스를 보면 꼭 누나 같단 말이지~.”

“예. 단탈리안 님은 꼭 손이 많이 가는 동생 같습니다.”

“요컨대 치명적인 매력덩어리이자 귀염둥이라는 얘기로군. 알고 있어.”

라피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괜시리 키득거렸다.

침대에 팔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하아아.”

천장에 고급스러운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저런 고급스러운 사치품이 없었다. 그러나 라피스가 어마어마한 자본금을 운용하면서, 내 재산은 마르지 않는 바닷물처럼 든든하게 되었다.

샹들리에에서 희미하게 품어져나오는 빛을 보면서 나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드디어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다고.

불합리하게 사고로 죽어나가고, 이상한 세계에 떨어지고……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했지만 어떻게든 발버둥쳤다. 나 나름대로 극복해서 여기까지 왔다. 솔직히 잘도 버텼다.

“…….”

안락한 침대에 누워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마치 조심스럽게 문을 두들기듯이 짧은 꿈이 의식에 찾아들었다.

꿈속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아들을 걱정하는 낯빛이었는데 왜인지 오늘은 웃었다.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라피스, 라우라, 바르바토스, 파이몬에 엘리자베트까지 거실에 앉아서 화목하게 웃었다.

안개와 같이 희뿌연 햇살이 그 모습을 감싸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광경이었다. 어찌나 허무맹랑한지 그만 웃어버렸다.

꿈속에서 나는 두 명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명은 저편, 저 안개의 햇살에 잠긴 채로 다른 이들과 함께 떠들고 웃었다. 웃음이 성스러운 공기가 되어 그들 가장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다른 한편은 이쪽.

안개와 완전히 분리되어, 모든 것이 명확하며 모든 것이 뚜렷한 세계였다.

사방이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였다. 이곳에서는 공기의 흐름마저 죽어버린 것 같았다. 정신병환자에게나 어울릴 법한 공간이겠지.

여기에도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한 명씩 무미건조한 나무의자에 앉았다. 잭, 리프, 호크……이들은 의자에 앉아서 단지 내 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조용하게.

그저 가만히 이곳을 쳐다보며 침묵했다.

벌써 수십 번은 더 꾼 꿈이었다. 패턴이 똑같았다. 처음에 나는 그들과 대화하려고 별에 별 방법을 다 썼지만, 그들은 시체마냥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결국 포기하고 똑같이 침묵했다.

그러다 잠이 깼다.

“…….”

이마가 서늘했다. 젠장, 기분이 더러웠다.

나는 몸을 반쯤 일으켜서 서둘러 품속을 뒤졌다. 없었다. 마약이 없었다. 외투에 넣어 두었던가. 내가 한손으로 머리를 박박 긁으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라피스? 라피스. 미안한데 외투 좀 갖다줘.”

“……아직 침상에 드신 지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라피스는 근처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조금 더 주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충분히 잤어. 알잖아. 마왕은 잠을 많이 잘 필요가 없어. 외투 좀 갖다주라.”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마약을 찾으시는 일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포도주도 지나치게 자주 드시고 계십니다. 최근 들어서는 미약과 같은 약물까지 남용하시지 않습니까. 제레미 경에게 들었습니다. 단탈리안 님께서 시도때도 없이 약물 제조를 의뢰하신다고.”

“알았어, 알았어. 잘못했어.”

내가 초조하게 대꾸했다. 몸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무심코 화를 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라피스에게 화를 내지르는 것만큼은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다. 라피스는 현재 내가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도와주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난 아무것도 못했다.

<던전 어택>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액스트라였지만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다. 그녀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젠장할! 정말이었다. 라피스에게 화를 내기란 불가능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성난 목소리가 튀어나갈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아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상냥하게 다듬었다.

“잔소리는 언제라도 들어줄게, 응? 라피스. 외투 좀 가져다줘.”

“……단탈리안 님.”

“알잖아. 잠자고 깨어난 직후만 이렇게 심한 거야……응? 한 모금만 피우면 나아질 테니까. 한 모금이면 전부 평소대로 돌아오니까……마약도 약이잖아. 적절하게 복용하면 괜찮다고. 그러니까.”

빌어먹을, 두개골이 빠개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예전에는 조울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계의 유수한 의원들에게 물어보니 아무래도 조울증 따위와 거리가 멀었다. 이건 조금 더 악질적인 정신병이었다. 의원들도 원인을 모르겠다며 백기를 들어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증세가 심해졌다.

처음에는 술을 마시는 것으로 해결했다. 고급스러운 포도주를 자주 마셨다. 그 다음에는 섹스였다. 라우라와 진탕 몸을 섞을 때만큼은 머리가 아프지도, 기분이 급격하게 뒤바뀌지도 않았다.

다음에는 담배. 그 다음에는 담배에서 조금 더 독한 마약류……요즘에는 약물까지 이따금 사용했다. 괜히 미약을 열세 병이나 들고다닌 게 아니었다. 정말로 지랄맞은 일이 아니고 뭔가.

“미안하지만, 라피스……얼른…….”

미약을 나눠 마시고 질펀하게 섹스를 겪으면 한동안 두통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건 최후의 수단이었다. 약물중독자라도 되어버리면 그날로 인생이 끝장나겠지. 게다가 라우라한테 약물같이 몹쓸 물건을 사용할 순 없었다…….

바르바토스처럼 갈 때까지 가본 녀석. 아니면 부담없는 창녀. 그러나 바르바토스도 창녀도 언제나 내 주위에 있어주지는 못했다. 그럴 때는 제레미와 몸을 섞었다…….

“여기 있습니다.”

라피스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라피스가 두 손으로 담뱃대를 건네주고 있었다. 파이프에 말린 약초가 꾹꾹 눌러담겼다. 머리가 아픈 나를 대신해서 약초까지 대신 담아준 것이었다.

“고마워.”

서둘러 담뱃대를 받았다. 라피스가 마법을 사용해서 불을 지펴주었다.

담뱃대 끄트머리를 한입 물고 후우, 하고 길게 마셔냈다. 해안가 모래사장에서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서서히 두통이 사라졌다. 온몸을 조여오던 압박감과 초조함도 사그라들었다.

“…….”

“…….”

나는 말없이 담뱃대를 뻐끔거렸다.

지금처럼 특히나 잠에서 깨어난 직후가 문제였다. 나는 언제나 이상하게 생겨먹은 악몽을 꾸었고, 꿈 때문에 기분이 꽤나 더러워졌다. 이런 때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데이지의 암살실패건이 좋은 사례였다.

누구든 작은 단탈리안을 건드리면 아주 새되는 거예요.

음, 농담을 할 정도로 정신이 안정되었군.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라피스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이야 라피스답게 없었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쯤은 쉽게 느꼈다. 내가 밝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제 고생할 일은 거진 다 해결됐다고?”

“하지만…….”

“인간계든 마왕군이든 피해를 입었어. 적어도 십 년은 세력을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거야. 내 마왕성을 공격할 만한 세력도 주변에서 일소되었지. 나는 평원파와 산악파, 중립파까지 모든 파벌의 지지와 후원을 얻었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날개를 잃어버린 새가 되었으며, 용사 남매는 나에게 발이 묶였다. 최악의 변수들마저 없앤 것이었다.

“이제 모든 위협이 사라졌어. 라피스. 네가 도와준 덕분에 이루어낸 쾌거야. 물론 그 과정에서 내가 조금 맛이 가버리긴 했지만 세상만사, 아무런 대가 없이 굴러가는 일이 없지.”

“……그렇군요.”

라피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단탈리안 님이 말씀하는 그대로입니다. 분명히, 위험요소는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그렇지?”

내가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돈도 겁나게 쌓였겠다. 우리는 이제 십 년이고 백 년이고 느긋하게 삶을 즐기면 되는 거야.”

세월이 흐르면 두통이든 악몽이든 전부 흐려지겠지. 틀림없다. 시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는 마약을 피며 희뿌옇게 빛나는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  *  *

지난 번에 합의했듯이 내 영지에는 새로운 법률이 들어섰다.

문제는 이게 아직 영지민들에게 낯설다는 것. 여태껏 관습법만으로 문제를 해결해왔는데, 모든 마을에 통용되는 법률을 공지하자니 사람들이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래도 익숙해지기 힘든 모양이었다.

“혹시 새로운 법체계에 영지민이 반발하는 거 아니냐?”

“아니요. 익숙해지느냐 마느냐의 문제요외다, 마왕 나리.”

파르시가 말했다.

파르시는 본격적으로 영주대리인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영지 정중앙에 해당하는 팔라티노 언덕에 어수룩하지만 돌벽으로 사무실을 건설했는데, 이게 대충 관청과 같았다. 아직 관리라고 해봤자 파르시밖에 없었지만.

“평생 살아온 습관이 어디 쉽게 바뀌겠수?”

“쯧. 아직 어리구나, 파르시. 그렇게 사는 방식을 바꾸지 못하다가 개혁이 유야무야 증발해버리는 거다. 바꿀 때는 과감하게 바꿔야지.”

파르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찌하겠소, 그만 깜빡하고 새로운 법률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벌금이라도 매기면 좋겠수까?”

“백성에게 새 법률을 강압하는 것은 하책이지. 제아무리 좋은 법률이라도 강압이 섞여들면 일단 반발하고 보는 것이 백성이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들어야 해.”

내가 고개를 돌려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얌전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데이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더냐?”

데이지는 파르시를 따라다니며 마을의 대소사를 견학했다. 내 시녀로서 견식을 붙이기 위해서였다. 영지 업무를 익히기엔 나이가 한참 어렸지만 데이지에 관해서 나는 너그러워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자새끼는 절벽에 밀어넣어야 제맛이라지. 데이지는 사자새끼는커녕 공룡새끼였다. 절벽에 밀어넣은 다음 바위까지 굴러 떨어트려야 마땅했다.

데이지가 차분하게 말했다.

“우선 기다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기다려? 무엇을?”

“영지민 중에 누군가가 큰 실책을 범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한 명이 법률을 중대하게 여겼을 때, 그를 본보기로 삼아 처형합니다. 일벌백계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모범답안지와 같은 대답이었다.

자고로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었다. 파르시에게도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흐음, 하고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나는 코웃음을 쳤다.

“멍청하기는. 배운 것이 책밖에 없어서 해결책이랍시고 내놓는 것도 우둔하기 짝이 없구나. 뭐, 처형해? 며칠이나 파르시를 따라다녔으면서 뭘 배운 거냐. 네 눈에는 영지민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보이더냐.”

데이지가 멈칫했다.

“자기 마을사람들 목숨을 제발 살려달라며 내 앞에 나서던 여자애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원. 지 마을사람이 아니면 죽든 살리든 상관없다는 얘기로군. 위선자 녀석아, 네 오래비를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느냐.”

“……아버님께서는 무엇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선호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크흐. 제멋대로 망상까지 전개하니 별 도리가 없군.”

내가 비웃었다.

“나는 분명히 강압적인 수단을 쓰지 말라고 언급했다. 몸속에서 슬라임이 빠졌나 싶었더니 이제보니 귓속에다 옮겨 심었구나. 그래, 너에게는 일벌백계로 백성을 처형하는 것이 별로 강압적이지 않다고 느껴지는 모양이지.”

“…….”

“대단한 명군(名君)께서 나시지 않았는가! 이렇게 현명한 여아를 양녀로 두게 되어 참으로 황공무지하다.”

소녀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파르시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거 어린애한테 너무 박하시구랴. 아직 얼라 아니오까?”

“파르시. 내 양녀를 양육하는 방법 정도는 내가 알아서 결정한다.”

“쩌업. 뭐, 소인이 책임질 일이 아니긴 하외다만…….”

파르시가 뻘쭘한지 입맛을 다셨다. 그 이상으로 파르시는 간섭해오지 않았다. 저래 보여도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마왕 나리께는 어떤 기발한 책략이 있소?”

“간단하다. 큼직한 돌덩어리 세 개만 준비해라.”

“웬 돌덩어리요? 돌덩어리를 무에 쓰려고 그러시오?”

파르시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가만히 구경하도록. 농삿일에서야 자네가 선배이지만 이쪽 분야는 내 전문이니까. 정치가 무엇인지 보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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