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38화 (238/510)
  • 00238 마왕결전(魔王決戰)  =========================================================================

    마침내 협상할 시간이 다 되었다.

    내 맞은편에 마련된 의자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가미긴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강해졌다. 마왕들이 쑥덕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왜 가미긴이 오지 않는 것이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서 흥미로워하는 사람도, 이때가 기회라며 가미긴을 비웃는 마왕도 있었다.

    예상대로인가……숙녀 아가씨에게 어젯밤은 다소 과격했나보다.

    하긴, 그녀는 한번 찌를 때마다 한번씩 가버렸다. 자그마치 한번에 한번씩이었다. 밤새도록 수천 번은 절정에 달했겠지. 안 그래도 성적인 쾌감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강렬했다. 수천 번이나 가버린 것이 어떤 느낌일지 꽤나 궁금했다.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에 들리도록 말했다.

    “가미긴 님께서 저에게 불만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아무리 싫어하셔도 그렇지, 이런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하시다니……저는 상당히 얕보이는 것 같습니다. 서열이 낮은 자는 서럽군요.”

    이런 절호의 기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지 않으면 바보였다. 가미긴은 내가 서열이 낮아서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 같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협상에서 실제로 도움되는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이곳의 분위기를 내 쪽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어찌할 것인가.”

    그동안 중재석에 앉아 침묵하던 바알이 조용히 말했다.

    “그대가 동의한다면 자리를 파하겠다.”

    “아니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제 개인적인 의사로 그만두고 말고 할 자리가 아니니 말입니다. 평원파에서는 평화적인 해결을 강력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가미긴이 무시한 것은 비단 나 개인뿐만이 아니라 평원파라는 집단 자체이다. 그런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을 마무리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바알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요 아저씨는 속으로 뭘 생각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렇지만……서열 제1위 대마왕 바알인가.

    나는 바알에 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알의 던전은 한 번밖에 클리어하지 못했다. <던전 어택>에서 다른 마왕들은 몇 번씩, 심하면 백 번이 넘게 깨보았지만 바알만큼은 딱 한 번 물리쳤다.

    평원파가 서열 제2위인 아가레스를 물리친 지금, 더 이상 평원파를 함부로 건드릴 세력은 없어졌다. 유일한 걱정거리라면 대마왕 바알이었다.

    아가레스마저 가공스러운 위력을 보여주었다. 하물며 바알은 어떻겠는가?

    이번 기회에 바알의 속내를 찔러볼 필요가 있다. 괜찮다. 지금 나는 평원파의 대표자. 제아무리 바알이래도 함부로 대할 수 없으리라.

    어디 보자, 바알의 성향은……음. 게임 속 대화를 고려하자면 자신만만하고 명예로운 전사를 좋아한다. 바르바토스를 귀여워하는 걸 보아도 그렇다.

    대충 그런 이미지로 가볼까.

    “가미긴 님이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있어서야 심심하겠지요. 어떻습니까, 바알 님? 변변찮은 놈입니다만 저와 잠시 동안 어울려주시겠습니까.”

    “…….”

    바알이 눈을 뜨고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주변의 다른 마왕들도 쑥덕거리는 걸 멈추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열 제71위 따위가 서열 제1위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전무후무한 무례였다. 하지만 내가 올바르게 예상했다면, 바알은 그런 예의를 누구보다 싫어했다.

    “바알 전하께서는 아주 오래 전에 평범한 마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흡혈귀였다.”

    바알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선뜻 대답했다. 내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뜻했다.

    “단지 오늘을 기준으로 돌이켜보건대 썩 평범하지는 않았군.”

    “어째서입니까?”

    “그때 당시에 흡혈귀는 진조(眞祖)뿐이었노라. 이제는 열 명도 채 남지 않았다만.”

    헤에, 진조였구나.

    진조는 순혈 흡혈귀를 가리켰다. 다른 종족끼리 교배가 가능하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순혈 뱀파이어는 적어졌다. <던전 어택>에도 진조는 이바르 로드브로크, 쿤쿠스카 상회의 주인밖에 등장하지 않았다.

    “제가 소문으로 듣던 것과 약간 다르군요. 바알 전하께서는 가장 밑바닥인 병졸에서 시작하여 현재 자리에 이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진조라면 마계에서도 귀족으로 대접받지 않습니까?”

    “상상력을 발휘해보아라. 그 옛날에 지고지순했던 종족이 어디 흡혈귀뿐이었겠는가.”

    “아아, 다른 종족도 똑같았겠군요. 과연…….”

    주위에서 놀라운 시선으로 이곳을 쳐다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제1위 마왕에게 ‘당신 옛날에는 별 볼 일 없는 일개 마인이었지?’ 하고 묻는 것은 미친 짓거리였다. 그런데도 나는 마치 친구라도 된 것처럼 편안한 말투로 바알과 대화하고 있었다.

    더 질러볼까.

    “실례합니다만, 바알 전하.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아가레스 님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거기에 대해 아가레스 님이 변명할 거리도 있지요. 하지만, 바알 전하께서 따로 생각하시는 바가 없으신지요?”

    바알이 내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가 입끝을 올렸다.

    “세상천지가 연극 무대라서 재미있는가?”

    “예?”

    “내 앞에서 연기하지 마라.”

    바알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나는 당황해서 잠시간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방금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가? 자기 앞에서 연기하지 말라고? 그게 무슨 의도인가.

    가미긴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기생충이라고 매도했다. 설마 바알도 똑같은 생각을 품은 것인가? 속에서 서서히 열이 뻗쳐왔다. 나는 그러나 눈앞의 상대방이 마계 최고 권력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철저하게 분노를 숨겼다.

    “알겠습니다. 그럼 느긋하게 가미긴 님이 오기를 기다리지요.”

    삼십 분이 흘러도 가미긴이 출석하지 않았다.

    이제 마왕들은 대놓고 불평불만을 표시했다. 저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마왕 전하들이었다. 가미긴은 저들 모두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볼멘소리가 터지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했다.

    “지금 장난하는 것인가!”

    “최고위 마왕이라고 해서 이런 무례를 범할 수는 없어요. 언제부터 마왕군의 기강이 이렇게 해이해졌는지 끔찍하군요.”

    몇몇 마왕이 화를 내며 바깥으로 떠나갔다.

    가미긴이 도착한 것은 원래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그녀가 차분한 걸음걸이로 회장 가운데로 걸어나왔다.

    “모두를 기다리게 한 점, 진심으로 사과할게.”

    가미긴이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그녀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평소에 헐렁헐렁한 천옷을 걸치고 돌아다니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녀치고 매우 두터운 옷차림이었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깨달았다.

    아직도 미친 듯이 땀이랑 애액이 흐르고 있구나!

    바알 때문에 상한 기분이 순식간에 상쾌해졌다. 그랬다. 가미긴은 마왕의 재생력으로도 몸안에 남은 약기운을 전부 몰아내지 못했다.

    만약 가미긴이 평소대로 천옷을 입었다면, 땀 때문에 옷이 살에 들러붙어 안쪽이 적나라하게 비출 것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몸이 보이지 않도록 두껍게 입었다. 옷 안쪽에는 아마도 모종의 마법을 걸어두어 체액과 체취를 제거하고 있겠지.

    마왕들이 매몰차게 비아냥거렸다.

    “가미긴 님! 아무리 그래도 너무 늦으신 것 아닙니까!”

    “응,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진심으로 사죄할게.”

    “하. 사과에 성의가 느껴지지 않는군요……!”

    가미긴은 기계적으로, 계속해서 무표정하게 대답하기만 했다. 당연히 성의라고는 눈꼽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왕들이 분노했으나 이곳에서 나만은 가미긴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었다.

    현재 그녀는 말투와 표정을 유지하는 것조차 애먹고 있었다.

    자칫 방심하기라도 하면 즉각 표정이 무너지겠지. 색기에 쩌든 신음이 나올 것이다. 자기 몸이 쾌감에 미쳐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가미긴은 철두철미하게 무표정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

    내가 손뼉을 쳤다.

    “자자. 마왕 여러분께서 화내시는 것도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가미긴 님께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관대하게 용서해주시지요.”

    누구보다 분노해야 할 당사자인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마왕들이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가미긴은 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너그러이 이해해줘서, 고마워.”

    “별 말씀을.”

    내가 시원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도 때때로 몸이 나빠져서 약속에 늦고는 합니다. 삶에는 도저히 예상하지 못할 일들이 가끔씩 일어나니까요. 뭐, 그런 예상치 못하는 일을 어디까지 제어해내느냐가 사람의 품격을 결정하겠습니다만……누구인들 항상 완벽하겠습니까?”

    “…….”

    “저는 가미긴 님을 이해합니다.”

    순간적으로, 가미긴이 이빨을 꽉 물었다.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으나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탓에 적어도 나한테는 훤하게 보였다.

    이런, 그렇게 감정을 쉽게 드러내면 곤란했다. 아직 즐거운 일이 많이 남았다.

    “자아, 가미긴 님. 어서오십시오. 협상을 시작해야지요.”

    “…….”

    가미긴이 무척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협상석에 앉았는데, 엉덩이가 의자에 앉는 순간, 아주 조금이지만 입끝이 부르르 떨렸다. 의자에 닿은 것만으로 살짝 가버린 것이 분명했다.

    멋졌다.

    나는 왜 가미긴이 한 시간이나 늦었는지 알았다. 저 상태로 회의장까지 걸어올 수는 없었겠지. 니블헤임 안에서는 개인적인 순간이동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즉, 가미긴에겐 마차를 타고 오는 방법만 남아 있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가미긴이 몇 번이나 절정에 달했을까? 마부에게 수차례, 수십차례 잠깐만 멈춰달라고 부탁해야만 했으리라. 그녀는 마차 안에서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대며, 외로이 홀로 절정을 참아냈다…….

    “가미긴 님께서도 회의가 길어지기를 원하시진 않을 테지요. 단도직입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평원파에서는 이번 내전이 발발하는 데 가미긴 님께서 피해자 입장임을 인정합니다.”

    마왕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뭐,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방금 전에 가미긴 님께서 숨겨두신 병력이 우리군에 합류했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가미긴 님과 아가레스 님은 전적으로 무관하다……그렇게 판단해도 좋겠지요.”

    “응. 정말이야.”

    가미긴이 어디까지나 기계적인 어투로 말했다.

    “이미 말했지만 아가레스가 어떻게 행동할지 나로서는 아는 바가 없었어.”

    “가미긴 님의 군사적인 협력에 평원파를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이번 협력에 대한 자그마한 성의로써 가미긴 님께 모라비아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이양하는 바입니다.”

    “너그러운 제안에 고마워.”

    내가 박수를 보냈다.

    “훌륭하군요.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를 오해하고 있었으나, 오해는 풀리었고, 이제 화합의 길만이 저편까지 빛나고 있습니다!”

    마왕들이 어리둥절하게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에 몇 명은 오늘 새벽에 내가 가미긴의 별장에서 나왔다는 소문을 들먹이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아마 다음날쯤엔 가미긴과 단탈리안이 열애한다는 소문이 쫘악 퍼질 것이다. 그것 역시 내가 바라는 바이다. 가미긴이 나와 엮이면 엮일수록, 사람들이 가미긴과 내 사이를 착각하면 착각할수록, 그녀는 나를 배신하기 힘들어진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배신했다, 라는 평판을 얻기 싫다면 말이지.

    과연 순진무구한 여인을 흉내 내는 가미긴이 그런 평판을 무릅쓸 수 있을까.

    내가 일어나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자아, 가미긴 님. 우리 서로 화합한다는 의미에서 포옹합시다!”

    “읏……잠깐…….”

    가미긴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나는 덥썩 가미긴을 포옹했다. 팔뚝으로 꾸욱 그녀의 몸을 안았다. 내 품에서 가미긴이 “흐윽……!” 하고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그녀의 몸이 자그마한 동물처럼 경련했다.

    내가 말했다.

    “오늘밤, 가미긴 님을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평원파와 가미긴 님의 영원한 우호를 다짐하자는 의미에서요. 설마 거절하시지는 않겠지요? 우리 둘 사이에 말입니다.”

    “……, …….”

    가미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하지만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멀리서 지켜보며, 다른 마왕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는 뻔했다. 사교계 아가씨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벌써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리하여 모든 일이 평화롭게 해결되었다.

    경사로세, 경사로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