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34화 (234/510)
  • 00234 마왕결전(魔王決戰)  =========================================================================

    중립파는 나에게 거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월맹군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당초, 바르바토스는 자신을 함정으로 몰아넣은 파이몬을 용서하지 않고 깔아뭉개려 했다. 정식으로 청문회를 열어서. 그런데 중립파의 마르바스가 회합을 개최하여 화해하라고 종용한 것이었다.

    그때 마르바스는 말했다.

    ‘날개를 한쪽 잃어버린 새는 결국 날지 못한다. 산악파가 평원파를 공격한 것은 잘못이다. 허나, 지금에 와서 평원파가 산악파를 모조리 없애려 한다면 그 또한 잘못이지 않은가?’

    하고 그가 분명히 덧붙였다.

    ‘우리 중립파는 적절한 타협안을 바라고 있다. 물론, 평원파가 관용을 베풀 경우, 중립파에서는 평원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것이다.’

    마지막에 언급한 '적극적인 지원.'

    평원파가 산악파를 너그러이 용서해준 대신, 중립파가 우리에게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나는 그 패를 꺼내들었다. 아가레스라는 최악의 무신(武神)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전혀 아깝지 않았다.

    마르바스군은 한참 국경을 넘어오고 있었다. 병력은 팔천.

    현재 중립파는 폴리투니아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폴리투니아와 국경을 마주한 합스부르크의 영지는 다름 아니라――.

    “가미긴 님. 당신께서 무단으로 점거하고 계신 영지입니다.”

    중립파의 군대는 곧바로 가미긴의 영지를 급습하게 되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지금은 아가레스 님이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영지이겠지만요. 무엇보다 가미긴 님께서 주장하시는 바에 따르자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만…….”

    “…….”

    “평원파와 산악파, 중립파가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군요. 마계가 들썩거리겠지요.”

    바르바토스가 군단장으로서 선봉에 서고, 그 뒤를 중립파와 산악파가 받쳐준다. 이 진용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이미 역사가 증명한다. 제2차 월맹군 원정에서 이들은 국가를 두 개나 멸망시켰다.

    제8차 월맹군에서 내가 그렇게 날고 뛰었는데도 결국 합스부르크 제국 하나를 완전히 무너트리지 못했다. 그것에 비교하자면 평원파-산악파-중립파의 동맹군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이제 과거, 파벌끼리 다툼을 일삼았던 시대는 지나가고 바야흐로 조화와 화합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마인들은 그렇게 받아들일 게 분명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희생양으로 아가레스 님과 가미긴 님이 선택되는 것입니다. 충분히 화려하고 호화로운 축제이지요.”

    가미긴, 당신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하나였다.

    당신은 산악파와 중립파가 바르바토스를 도우리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 곁에는 내가 있었다. 나에게는 시트리와 마르바스를 움직일 패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당신은 그걸 몰랐다.

    “그렇구나. 이제야 알겠어.”

    가미긴이 말했다.

    “그게 너의 전형적인 수법이야. 절대로 자기 자신이 나서는 법 없이,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서 문제를 해결해. 월맹군 때도 그랬어. 파이몬이 함정을 만들자 너는 온갖 군단들을 불러들였지. 이제는 아가레스와 나를 파멸시키려고 산악파와 중립파를 끌어들였고.”

    그녀가 실눈으로 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웃음 지은 눈가의 저편에서 빨간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기생충이 살아가는 방식과 닮았구나, 단탈리안. 나는 말이지. 여태까지 네가 왜 아직도 서열 제71위에 머무르는가 궁금했어. 바알이랑 바싸고가 진즉에 서열을 올려줘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이제 분명해졌어.”

    가미긴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내 손에 들린 유리잔이 째앵, 하고 부서졌다. 유리조각이 흩어지면서 내 오른손에 가라앉았다.

    “단탈리안, 너에게는 서열 제71위가 제일 잘 어울려. 오히려 서열을 한 단계 낮추어야 할 판이야. 기나긴 마왕군의 역사상 너처럼 염치없이 남들에게 기생한 자는 없었어. 마르바스가 우리를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고? 마르바스의 이념에 비추어서, 우리가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미긴이 웃었다. 그녀가 평소에 짓던 웃음과 질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태양빛처럼 부드러웠던 웃음기가 사라지고 싸늘함만이 남았다.

    “불쾌해. 정말로 불쾌해. 너는 애시당초 마르바스의 이념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단지 아름다울 뿐이라고 생각하지. 한낱 구경거리로 여긴다고. 무슨 뜻인지 알겠어, 단탈리안? 그건 상대방의 이상을 '가장 불쾌하게 짓밟는 방식'이야.”

    “만약에 저를 개 같은 쓰레기라고 욕하실 참이라면.”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로 쓸모가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벌써 진부해진 사실이거든요.”

    “너는 우리 마왕들 전체를 모욕하고 있어. 바르바토스도, 마르바스도, 결코 너의 관상용 예술작품으로 전시되기 위해서 살아온 게 아니야. 적어도 그 사실만큼은 내가 너보다 잘 알아.”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손에 묻은 유리조각을 털어냈다. 까끌까끌해서 조금 거슬렸다.

    “바알은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안목을 갖고 있어. 너는 마왕 같은 것이 아니야. 가짜이지. 자기 자신의 신념 따위는 아무것도 없이, 그냥 기생충처럼 살아갈 뿐이야.”

    “그건 조금 참신한 비난이군요. 마음에 듭니다.”

    “너는 영원히 최하위로 머물 거야. 바알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는 한.”

    음. 왠지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나를 욕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실로 억울하다. 항상 먼저 잘못하는 것은 너희이지 않는가? 너희가 먼저 공격해오고 먼저 시비를 걸어온다. 나는 성실하게 너희를 대접할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보고 빌어먹을 쓰레기라느니 가짜라느니 욕한다. 물론 나는 빌어먹을 쓰레기이긴 하나 그건 예의범절이 아니다. 서글프다. 세상은 도대체 언제부터 타락했는가…….

    “뭐, 가미긴 님께서 분노하시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만. 저한테 그렇게 화풀이를 쏟아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요?”

    가미긴이 조용히 나를 쳐다보았다. 뚜렷하게 살기가 느껴졌다. 저런, 이것도 네가 나한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을 따름인데……그렇게 질색할 거라면 애당초 다른 사람한테 하지를 말던가. 윤리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도 지키지 못하다니 실망스럽다.

    흐음. 이쯤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볼까. 너무 긴장을 조이기만 해도 협상에선 못 쓸 일이다.

    “물론 저는 제 분수를 알고 있습니다. 가미긴 님께서 지적하셨다시피 기껏해야 서열 제71위에나 어울릴 놈이지요. 제가 다소 유리해졌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가미긴 님을 겁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흐응. 그러면?”

    “협상을 시작하지요.”

    내가 말했다.

    “아가레스 님을 배신하십시오. 아니, 배신이라는 표현이 거슬리신다면, 좋습니다. 아가레스 님에게 보복해주십시오. 가미긴 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다가 뜬금없이 아가레스 님한테 기습을 받았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당신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자면 말이다.

    나는 예의 바른 신사이다. 숙녀가 그렇다고 주장하는데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이 없다. 어디까지나 레이디의 의견을 존중해주겠다.

    “그래주신다면 가미긴 님께서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던 영지를 대체로 인정해드리겠습니다. 조금은 떼어주셔야겠습니다만, 그 정도는 포기하실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4할만 거둘 테니까요.”

    내가 빙그레 웃었다.

    “참고로 이거 대박 할인입니다. 가미긴 님께서 부당하게 빼앗긴 영토를 우리 평원파가 대신해서 수복해드리고, 거기에다 고작 4할만 의뢰비로 먹겠다는 것이니까요. 꽤나 양심적이지 않습니까?”

    “…….”

    가미긴이 침묵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대가로 4할의 영토를 빼앗긴다. 커다란 손실이다. 지금 가진 영토가 비좁은 것이 불만스러워서 전쟁을 일으킨 가미긴으로서는, 그다지 달가운 제안이 아니다.

    내가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4할을 2할 정도로 줄여들이는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만…….”

    가미긴이 의문 어린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손을 뻗어서 그녀의 턱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내 손가락을 훑었다. 노골적인 손짓이었다.

    가미긴이 코웃음을 쳤다.

    “내 몸을 바치라고? 수준이 알 만하네. 너는 역시 삼류배우야.”

    “그게 당신의 진짜 얼굴이군요. 가미긴 님.”

    세상을 쓰레기더미, 오물 덩어리로 바라보는 것처럼 모욕적으로 비틀어진 얼굴.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지자 가미긴의 표정에는 냉소와 조소밖에 남지 않았다. 마치 현명하지만 지나치게 세상에 튕겨져 나와 그대로 늙어버린 노인이 그러하듯이, 가미긴은 얼굴 표정 하나로 세상 전체를 모욕하고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나는 가미긴이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제가 삼류배우라면 가미긴 님, 당신은 무엇입니까? 삼류배우 앞에서 맨얼굴을 드러내고 말았군요. 시골에서 자신만만하게 상경했다가 처참하게 실패해버린 여배우에 비유할 법하지 않은지?”

    “단순히 내 몸을 원하는 게 아니겠지. 너는 나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한번도 없어.”

    사람의 시선에도 민감했는가. 어쩌면 가미긴은 모든 것에 지나치게 예민하여, 이윽고 세상에는 저열한 욕정 따위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일지 모르겠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가미긴을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예. 안타깝지만 제가 새삼스레 당신에게 매혹된 것은 아닙니다. 뭐, 앞으로 매혹될지는 또 모르겠지만요.”

    “사설은 집어치워. 원하는 게 뭐야?”

    “바르바토스와 한 가지 약속했습니다. 세간에 아름답다고 알려진 여마왕들과 전부 한 번씩 잔 다음에 말이지요, 그래도 바르바토스가 최고이더라, 하고 공언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가미긴이 어이없는 눈초리로 날 쳐다보았다.

    “뭐어?”

    “우리 꼬마 마왕님께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섬세하신 분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제가 내거는 조건은 그겁니다. 저와 애인 관계가 되십시오. 그리고 애인 관계가 되었다고 소문을 퍼트려주십시오.”

    가미긴의 표정이 한층 더 어이없게 변했다.

    “결국 이 말이잖아. 나를 따먹고 버리겠다는 거.”

    “우아하게 표현하자면 그렇습니다.”

    “그걸로 내가 가진 영지를 보존해주시겠다? 과연 너그럽기도 하네.”

    가미긴이 입가를 비틀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내 영지의 8할을 보존해주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어. 내가 점유한 영지 전체를 인정해.”

    “좋습니다.”

    선뜻 대답했다. 바르바토스가 뭐라고 불평할 수 있겠지만 변명할 거리가 무한했다. 아가레스를 더욱 더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어쩔 수 없다, 적을 많이 만드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여하간 얼마든지.

    내전에서 바르바토스한테 승리를 쥐어주려고 내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투자했는가? 시트리에게 남겨둔 소원을 다 써버렸고, 마르바스한테 꽂아넣은 빚까지 탕감해주었다.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니었다. 내 안전한 성생활을 마련한다는 이득쯤은 챙겨도 좋겠지.

    “이제 이야기가 간단해졌군요.”

    내가 느긋하게 앉은 채로 말했다.

    “벗으세요.”

    가미긴이 물끄러미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가지에 손을 가져다댔다. 하얀 천옷이 천천히 살결에서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풀썩, 하고 옷가지가 잔디밭에 떨어졌다.

    저녁이었다. 샛노란 노을이 가미긴의 육체를 윤곽에 따라서 하얗게 비추었다. 가미긴이 언뜻 굴욕적인 눈빛으로, 그 굴욕을 숨기려고 애쓰느라 더더욱 굴욕적으로 비틀어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짓기만 했다.

    장담하건대, 세상의 그 어떤 명화(名畵)보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작품 후기 ============================

    마르바스가 약조했던 말은 113화에 등장합니다. 단탈리안의 기억력이 정확하지 않아서 단어는 약간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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