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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33화 (233/510)
  • 00233 마왕결전(魔王決戰)  =========================================================================

    *  *  *

    나는 초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발을 덜덜 떨면서 방바닥을 두들겼다. 꼴불견스러운 습관이었지만 어쩌겠는가? 평원파의 명운이 이번 일전에 달려 있었다.

    밤새도록 구부정하게 앉아서 연락을 기다렸다. 탁자에 올려둔 수정구를 가만히 노려보면서.

    ‘벌써부터 바르바토스가 몰락해서는 안 된다.’

    합스부르크 중북부는 지리적으로 무척이나 중요하다.

    마왕들은 절대다수가 이른바 마왕의 성역으로 불리우는 일대……검은 산맥에 둘러싸인 지형에 둥지를 틀었다. 나의 마왕성은 그중에서도 서쪽. 최서단(最南端) 파게기아이, 라는 곳에 위치했다.

    이름은 중요치 않다. 문제는 이곳이 위험천만한 위치라는 사실이다.

    서쪽으로는 튜튼 왕국이 자리 잡았으며, 남쪽으로는 합스부르크가 버티고 있었다. 인간종에게 노출되기 십상이겠지. 바로 이 지역을 바르바토스의 세력이 관장해주어야만 했다.

    인간계 군주들에게 엄청나게 미움을 사버린 나로서는……예컨대 엘리자베트 총통이 빡 돌아서 군대라도 보내오면 그날로 끝장이었다. 그들이 도저히 군대를 통과시킬 수 없게끔, 나한테 우호적인 세력이 방파제가 되어 버텨줄 필요가 있었다.

    아가레스나 가미긴이 이곳 지역을 점거해버리면 곤란하다. 그들은 결코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어이쿠, 적국이 병력을 보내는 것을 그만 놓쳐버렸네! 미안!’ 하고 내 던전으로 원정오는 군대를 눈 감아줄지 모른다.

    기사들이 이끄는 병력이 오백 명쯤 들이닥친다고 상상해봐라. 끔찍하지 않은가.

    ‘비록 던전을 방비하고 있다 해도 군대를 막을 수는 없어.’

    적어도 7층. 아니, 5층. 그 정도 규모의 던전이 완성될 때까지 바르바토스가 방패막이가 되어주어야 한다.

    ……시트리를 꺼내든 것은 비장의 패였다. 시트리는 벨레드 형님보다 한수 높은 무장으로 인정받았다. 그녀가 원군을 이끌고 합류한다면 승산이 높아지겠지. 물론 패배할 가능성도 있었다.

    승리인가, 아니면 패배인가. 경우에 따라서 당장이라도 가미긴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가락을 핥아야 할지도 모른다. 농담이 아니다. 미래에 생존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발가락 정도야 수십 번이고 청소해줄 수 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가 패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 단탈리안.

    수정구에서 푸르게 빛이 새어나왔다. 제파르 대장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드디어 연락이 왔는가!

    ─ 단탈리안, 그곳에 있는가.

    “예, 제파르 형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파르 대장은 척 봐도 피로에 절어 있었다. 아직 갑주도 벗지 않았는데 이제 막 전투가 끝난 모양이었다. 내가 서둘러 수정구 가까이로 몸을 숙였다. 내심 초조했다. 어째서 바르바토스가 직접 연락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통신은 전부 바르바토스가 넣어주었다. 그녀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통신을 맡겼을 것 같지 않았다. 즉, 바르바토스 본인은 현재 통신 따위를 할 여력이 없다는 의미였다. 부상, 패배, 패퇴……절망적인 단어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투는. 전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아아. 승리했다.

    승리! 바르바토스가 승리했다!

    내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요 사흘 동안 날밤을 새우면서 온몸에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바르바토스가 승리했다!

    “아군의 피해는 어떻습니까? 바르바토스 각하의 상태는요? 통신을 하지 못할 정도로 중상을 입은 것은 아니겠지요? 아가레스는 붙잡았습니까? 무소속 마왕들의 현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 단탈리안, 자네 너무 서두르는군.

    제파르 대장이 작게 너털웃음을 흘렸다.

    ─ 그렇게 많은 질문을 동시에 대답해줄 수는 없네. 흥분하지 말게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요 며칠, 신경이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 아군은 승리했다. 이 사실은 이제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네. 지금 와서 다급해질 필요는 어디에도 없지. 이제 광란의 전투는 끝났으며, 차분한 이성이 되돌아올 때라네. 자네에게 주어진 역할은 흥분이라는 것과 거리가 멀어……안 그런가?

    “아니요.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번 내전에서 나는 장군이 아니고 외교관이다. 누구보다 냉철하게 있어야 한다. 하물며 상대해야 할 적은 위장에 너구리를 이백 마리쯤 키우는 능구렁이, 마왕 가미긴이다. 결코 만만하지 않다.

    “제파르 형님. 아군과 적군이 입은 피해규모를 먼저 말씀해주십시오.”

    제파르 대장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 아군 일만팔천육백에서 피해는 사천. 부상자가 삼천이며, 사망자가 일천이다. 아직 정확한 수효를 헤아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적군……이만일천에서 사상자가 약 일만.

    내 얼굴이 밝아졌다.

    이만일천 중에서 사상자가 무려 일만.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압승! 사실상 전멸이라 표현해도 좋을 만큼 압승을 거두었다. 가슴이 가빠졌다. 그것을 겨우 참아내며 침착하게 되물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 각하께선 용태가 어떠신지요?”

    ─ 자네가 불안해 하는 것도 이해하네. 하지만 걱정을 접어두도록. 각하께서는 아가레스와 일전을 겨루느라 마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셨을 뿐이다. 자칫 잘못하면 마나 역류가 일어날 판국이라 각하께서는 요양하고 계시네.

    “상처는 없다는 말씀입니까?”

    ─ 솔직히 고백하네마는, 아주 팔팔하시다네. 끝까지 아가레스를 추격하겠다고 고레고레 소리 지르시는 것을 벨레드와 내가 간신히 침대에 눕혔지.

    천만다행이었다. 다시 한 번 한숨이 나왔다. 꼭 내가 근심걱정이 많은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었다. 젠장, 한숨이 많아질수록 빨리 늙는다는데.

    ─ 안타깝게도 아가레스를 생포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긴, 아가레스를 생포하는 일 자체가 가능한지 의문스럽지만 말이야. 대신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으나, 무소속 마왕 세 명을 포로로 잡았다.

    제파르 대장이 설명한 바에 따르자면, 평원파가 적군을 붙잡아둔 사이에 시트리의 군대가 후방에서 급습. 그 결과 고전적인 망치-모루의 형태가 재현되어 적군이 괴멸했다.

    제파르 대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 산악파에게 도움을 받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단탈리안, 우리 평원파는 매우 놀라고 있네. 단탈리안이 또 어떤 마술을 부린 것이냐면서. 정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 제1공훈자가 되는 수법은 여전하군.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럼 오늘 바로 협상에 들어가도 괜찮을지요?”

    ─ 아아. 군단장 각하께서 윤허하셨다. 사막여우를 철저하게 사냥하게나.

    사막여우는 가미긴을 부르는 별명이었다. 아름다운 금색털을 가졌지만 한없이 교활한 여우. 이제는 그 여우를 마음껏 사냥할 때가 다가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단탈리안은 강자에게 한없이 나약하되 약자에게 한없이 강했다. 눈에서 물이 쏙 나올 때까지 괴롭혀주지, 가미긴. 기대해도 좋다. 지금까지 농락당한 것에 이자를 붙여주지…….

    *  *  *

    가미긴은 니블헤임에 거대한 별장을 갖고 있었다.

    이 시대에 최신식이라 불리는 건축양식이라고 할까. 땅 대부분을 정원으로 채워넣고, 한가운데에 물길이 흐르게 만든 다음에 별장은 맨 깊숙한 곳에 자그맣게 만들어두었다. 건물이 작지만 화려했다. 최고위 서열이라면 마계의 대도시에 별장 한 채씩은 있는 모양이지.

    아름다운 분수를 지나치며 내가 미소를 지었다. 이토록 화려한 별장에 틀어박혀서 가미긴은 우중충하게 인상이나 찡그리고 있겠지. 무척 기분이 좋았다.

    “부디 이쪽으로.”

    시녀에게 안내받아 정원 한쪽으로 갔다. 수풀들이 세심하게 가지치기 되어 있었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마치 한평생 미소로써 타인을 속여온 가미긴과 같았다. 취향부터 썩어빠졌으니 인성까지 구린 것이었다. 하하.

    정원의 흙길을 한동안 밟자, 수풀 사이, 마치 감추어진 것처럼 야트막하게 자리 난 잔디밭에 가미긴이 앉아 있었다.

    “어서와, 단탈리안.”

    가미긴이 미소를 지으며 환영했다. 아직도 미소를 지을 여력이 있었다. 훌륭하군.

    “남자가 내 정원에 발을 들인 건 처음인걸.”

    “그 말씀을 지금까지 몇 명의 남자에게 속삭였습니까?”

    “으응, 아마도 대충해서 이백 명~?”

    그럴 줄 알았다. 내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상당히 여유로우시군요. 조금 더 초조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래 봬도 마음속은 어어엄청 초조하고 있어.”

    가미긴이 웃었다. 그녀에게 미소란 이미 살갗에 눌러붙어서 떨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문득, 눈앞의 여인이 인상을 구기면 어떨까 궁금해졌다. 고통과 쾌락에 물들여서 표정이 형편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도저히 미소를 지을 틈도 없이.

    아마도 극락과 같은 쾌감이 아닐까.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여기에는 저희 둘밖에 없습니다. 서로 겉치레할 필요가 없겠지요.”

    “어머. 설마 우리 둘이 특별한 관계라는 얘기야아?”

    “글쎄……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일부러 말끝에 여운을 남겼다.

    흐응, 하고 가미긴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녀는 평소보다 한층 더 노출이 많은 천옷을 입었다. 잠옷인 것일까. 천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허벅지며 가슴골이며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천옷은 얇아서 가미긴의 새하얀 살결이 언뜻언뜻 비추었다.

    이제 노을이 저물어가니 잠옷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님을 맞이하면서 저런 잠옷을 입다니 너무나 불성실했다.

    저 잠옷차림은 명백한 도발……내지는 유혹. 그런 의미를 품고 있겠지.

    가미긴의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유혹일까. 미인계로 나를 끌어들이겠다는 것인가? 재미있군. 어디 얼마나 나를 능숙하게 유혹할지 지켜볼까.

    “단도직입해서 말하겠습니다. 우리 평원파에선 영토분배를 일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헤에, 엄청 강하게 나오네?”

    “지난 번 협상에서 말씀드렸지요. 분명히 경고했다고.”

    내가 입가에서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그때가 사실상 가미긴 님, 당신께서 '좋은' 타협안을 제시하실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우리 평원파는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승리할 것입니다. 아가레스 님과 무소속 마왕들에게 더 이상 기회란 없습니다.”

    “왜? 승패란 병가지상사인걸.”

    가미긴이 자신의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아가레스가 패배했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아가레스에겐 역전을 이루어낼 만한 힘이 있어. 그걸 부정할 수는 없을 거야.”

    “물론입니다. 인정합니다. 아가레스 님은 가히 세계 최강의 무인. 당대에 그분한테 대적할 사람 따위는 마계와 대륙을 통틀어서 전무하겠지요.”

    하지만,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기에 저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제거하고자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응?”

    “내일모레. 마르바스 님이 중립파를 이끌고 합스부르크의 국경을 넘을 것입니다.”

    “…….”

    가미긴이 일순 멈칫했다.

    “그건 거짓말이야. 마르바스는 세력 다툼에 군사적으로 절대 개입하지 않아.”

    “맞습니다. 만약에 지금 내전이 '세력' 간의 다툼이었다면 말입니다. 이번 사태는 어디까지나 아가레스 님이 단독으로 벌인 사건. 그쪽 편에 엮인 마왕들은 전원 무소속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마르바스 님 입장에선 아무런 세력에도 편입되지 않은 무리가 난동을 부린 것이지요. 천 년이 넘게 대립해온 평원파와 산악파가 간신히 공존하는 시대가 다가오려 하고 있습니다. 헌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공존의 시대에 훼방을 놓는 무리가 있다…….”

    나는 가미긴의 손에서 유리잔을 가볍게 낚아챘다. 한모금 술을 마시면서 말했다. 달콤하며 깊이가 있었다. 최고급 미주였다. 기분이 점점 좋아지는군.

    “아마 불쾌하기 짝이 없겠지요. 세력들의 화합을 방해하는 원숭이 새끼들 따위 신경에 거슬릴 뿐입니다. 이참에 밟아버리자. 그렇게 생각해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분 탓일까. 가미긴의 붉은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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