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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32화 (232/510)
  • 00232 마왕결전(魔王決戰)  =========================================================================

    아가레스는 표정이 찌그러졌다.

    검은색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오러를 머금고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부유했다. 우지끈, 하고 아가레스가 두 발을 내딛고 서 있는 대지가 한층 무너졌다. 가뭄에 매마른 논밭마냥 땅에 틈새들이 벌어지더니, 거미줄 모양으로 삽시간에 퍼졌다.

    “산악파, 이 원숭이 자식들.”

    미모의 여마왕은 사라졌다. 그곳에 남은 것은 분노한 악귀였다.

    “감히 끼어들 곳과 끼어들지 말아야 할 곳을, 헷갈리다니.”

    아가레스가 품어내는 오러에 주위를 포위한 마왕들마저 헛숨을 들이켰다. 몸이 저릿저릿하게 마비되었다. 모두 삼백 년이 넘도록 전쟁터에서 삶을 경작한 마왕이었다. 그들조차 숨이 막혔다.

    지나치게 압도적이지 않은가. 눈앞의 여마왕이 자신들과 동족이라고 차마 믿기 어려웠다. 저것은 우리와 다른 종족, 무언가 차원이 다른 존재로 비추었다. 어째서 그녀가 오직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마왕이라고 오연하게 선언했는가 이해되었다.

    바로 그런 압도적인 무력을 향해서 달려드는 자가 한 명 있었다.

    “――거신(巨神)이 바로 선 앞에서, 나 맹세하노라.”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 그녀가 한 줄기 섬광이 되어 질주했다.

    대낫이 검은색 마나를 흩뿌리며 아가레스의 미간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바로 이 센티미터 앞에서 대낫이 무언가에 강하게 걸려서 정지했다. 아가레스의 전신을 뒤덮은 오러에 가로막힌 것이었다.

    아무런 기교도 없이 순수한 오러로 공격을 막아내다니. 그 무지막지함에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바르바토스는 계속해서 마법을 영창했다.

    “하나의 충성을, 하나의 피를, 하나의 전쟁을 시리게 맹세하리니.”

    “버러지 파리 새끼!”

    아가레스가 분노하며 할버드를 내리쳤다.

    까앙, 하고 할버드가 막혔다.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에서 일곱 개의 대검이 솟구쳐서 할버드를 방어했다. 그중 여섯 개의 대검이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졌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대검이 기어코 공격을 막아냈다.

    바르바토스의 작은 입에서 주문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유일무이한 왕국에 사냥개로서 봉사하리니. 뇌우를 벗삼아 비행하는 독수리로서 예언하며 비상할지니.”

    “바르바토스!”

    아가레스는 폭풍처럼 쉬지 않고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때마다 그림자에서 검은빛 대검들이 용솟음쳤다.

    만약 어느 안식이 높은 자가 싸움을 목격했다면, 지극히 차원이 높은 결투에 감탄하고 또 경악했으리라.

    한쪽은 압도적인 무력. 만물을 으깨어버릴 기세로 내리친다. 아무런 기교도 필요없이 단지 태풍이 되어 몰아치는 그것은 자연의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일인군단(一人軍團)이란 그녀를 위한 단어였다.

    반면에 다른 한쪽은――순전한 기교.

    일찍이 바르바토스는 전사였다. 검 한 자루에 의지하여 전장을 누비었다. 그녀는 부하들을 되살리기 위해 흑마법에 입문했으며, 그렇기에 전사인 동시에 흑마법사라는, 세계에 단 하나뿐인 유형이 되었다.

    전투 대낫을 치켜들고 상대와 몸소 맞부닥친다.

    팔다리가 쉴 새 없이 무기를 놀린다. 그 와중에 입술의 틈새에는 끊임없이 마법주문이 영창된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고, 시각을 어지럽히고, 균형을 착각시키고, 환상을 보여주는 마법이 펼쳐진다.

    그런 흑마법사-전사를 호위하는 것은 수백의 사역마. 하나하나가 최고급 전력으로 취급받는 죽음의 기사였다.

    흑기사들은 주군을 노리고 날아오는 창격을 저지했다. 아가레스의 공격은 대지를 뒤엎었으나 흑기사들은 무너지지 않은 성벽이 되어 막아냈다. 그곳에는 전사와 마법사 그리고 기사들이 사수하는, 한 명의 거대한 요새가 있었다.

    일인군단과 일인요새의 결투는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강자에 적합한지 가려내기 위해 격화하였으며――.

    두 명의 마왕은 결투를 전투의 영역으로. 더 나아가, 전쟁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

    “날파리 년! 네 힘만으로 싸워라!”

    “이것이 ‘나’이다, 아가레스.”

    바르바토스는 전신이 땀에 젖었다.

    이마에 백발이 땀으로 눌러붙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남은 마나를 모조리 불태우고 있었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마나가 타오르자 심장이,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바르바토스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단탈리안 새끼!’

    전투에 들어서기 직전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과 통신했다. 단탈리안은 수정구에 비추는 영상을 통해 ‘이번에 이길 수 있도록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단탈리안은 정직했다.

    녀석은 거짓말을 할지언정 허언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작은 선물이 아니잖아, 개새끼야!’

    어떤 수법을 동원했는지 몰라도 산악파를 원군으로 끌어들였다. 더군다나 원군을 이끄는 장본인은 서열 제12위의 마왕 시트리, 산악파에서 제일 강력한 무장이었다. 시트리가 이끄는 군세는 틀림없이 아가레스의 군대를 협공으로 압살하겠지.

    자신은 그때까지 시간을 벌어주어야 했다.

    바르바토스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여태까지 그녀는 마력을 아껴두었다. 절대로 절반 이상을 소모하지 않았다. 바르바토스가 내다보기에 이번 내전은 장기전으로 끌고가야만 승산이 있었다. 여섯 번, 일곱 번의 전투를 거치면서 아가레스군을 서서히 소모시킬 작정이었다.

    그러나 시트리의 깃발을 발견한 그 순간부터, 바르바토스는 모든 마력을 불사질렀다. 장기전 계획 따위는 바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지금이야말로 승부의 순간이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때임을 그녀는 직감했다.

    “날파리 같은 잡종년, 발악하는 방법마저 불쾌하구나!”

    아가레스가 포효했다.

    “부하들에 둘러싸여 목숨과 안전을 보존하다니! 그것이 네 년의 왕도(王道)이냐! 그것이 만마(萬魔)의 주인 된 모습이냐!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수치스러운지도 모르고 칼을 휘두르는구나! 바르바토스, 네 년이 마왕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어!”

    태풍과 같은 공격이 쏟아져내렸다. 일격만으로 검의 주인마저 사살시킬 공격이 연달아 수십수백 번 휘몰아쳤다.

    그 태풍 한가운데로 바르바토스가 한 발자국 내딛었다.

    “너의 착각을 수정해주지, 아가레스.”

    대검들이 아가레스의 공격에 무참히 부서졌다.

    쨍그랑, 쨍그랑, 쇳소리와 쇳소리가 폭풍우처럼 울려퍼졌다. 대검이 부서지며 튄 쇳조각에 바르바토스의 뺨이 찢어졌다. 핏물이 튀었다. 그렇지만 바르바토스가 입가에 띄운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부하들에게 둘러싸인 것이 아니다.”

    바르바토스가 대낫을 올려쳤다. 필사의 타이밍을 포착하여 전력으로 공격한 그것을, 아가레스는 너무도 손쉽게 막았다. 대낫이 오러에 튕겨졌다. 그럼에도 바르바토스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한 발자국을 더 내딛었다.

    “부하들이 나를 ‘뒤따라오는 것’이지.”

    아가레스가 할버드를 휘둘렀다.

    “하, 애들을 돌본다는 말이냐! 기가 차는구나. 대저 마왕이란 멸망을 불러일으키는 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함으로, 누구도 반항할 수 없는 공포를 대지에서 수확하는 자이다! 마왕에게 부하 따윈 필요없어. 압도적인 강함이 필요할 뿐이다!”

    “아니.”

    여섯 자루의 대검이 앞을 가로막았다. 대검들은 할버드를 미처 다 막지 못했다. 그러나 여섯 개의 대검을 부서트리며 전진하는 바람에 위력이 줄어든 공격을, 바르바토스가 대낫으로 저지해냈다.

    바르바토스가 마지막으로 남은 마력을 불태웠다.

    한 발자국. 그녀가 더 내딛었다.

    “왕이란 다만, 다른 이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자.”

    그림자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죽음의 기사들은 모두 동료였다. 그들은 죽고 나서도 자신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상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영원토록 전쟁을 멈추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바르바토스와 그들은 한몸이었다.

    그렇기에 바르바토스가 내딛은 한 걸음은 단지 한 걸음에 불과하지 않았다.

    언젠가 마인들이 평화를 노래하며 살 수 있기를. 언젠가 아비가 아들을, 어미가 딸을 팔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나라가 도래하기를.――바르바토스라는 소녀에게 생명과 죽음 그 이후를 맡긴, 모든 이들이 내딛는 발걸음이었다.

    “길은 한낱 오솔길로 남지 않으며, 이윽고 만인이 나아가는 대로가 될지어니. 나는 유일하되 한 명이 아니다.”

    바르바토스가 대낫을 올려쳤다.

    “그것이 왕이 나아가는 길이다, 아가레스!”

    할버드가 그것을 막아세우려는 순간, 시종일관 방어에 임하던 그림자의 대검들이 처음으로 공격적으로 달려들었다. 열여덟 개의 대검이 한꺼번에 아가레스를 향해 검끝을 찔러넣었다.

    아가레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할버드를 풍차처럼 돌려 단숨에 열 개의 검격을 튕겨냈다. 팔꿈치로 한 대검의 옆구리를 쳐내서 막았으며, 두 개의 대검은 몸을 비틀어서 피했다. 나머지 다섯 개의 검격은 풍압에 밀려나서 방향이 꺾였다.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이었다.

    그러나 대검들은 주군을 위하여 길을 터주었을 뿐이다.

    흑빛의 대낫이 공기를 가파르게 갈랐다. 대낫은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아래에서 위쪽으로 내달렸다. 열여덟 개의 대검이 간신히 만들어준 단 하나의 통로를 질주했다.

    쉬익, 하고.

    핏물이 공중에 퍼졌다. 무언가가 몸체에서 잘라져 잠시간 허공을 부유하더니 힘을 잃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

    아가레스가 얼굴을 찡그리고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아가레스의 왼쪽 귀가 빨갛게 피에 젖어 있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누구도 아가레스의 몸을 해치지 못했다. 검끝이 살갗을 스친 적조차 없었다.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입은 상처를 눈앞에 두고 아가레스는 낯설어서 견딜 수 없었다.

    서서히.

    이것이 상처를 입은 감각이라는 것을 떠올리면서, 아가레스의 표정히 천천히 일그러졌다.

    “너, 이 잡종 새끼가.”

    “이제야 얼굴이 조금 볼 만하군.”

    바르바토스가 힘들게 숨을 몰아쉬며 씨익 웃었다. 그녀가 중지와 약지를 벌렸다. 엿이나 처먹으라는 제스처였다.

    “너한테는 패배한 개새끼의 얼굴이 어울린다고, 짝귀 년아.”

    “――――!”

    아가레스가 소리를 질렀다.

    어느 맹수도 따라하지 못할 포효였다. 그녀는 신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인간한테 그러하듯이 맹렬하게 진노했다. 대지와 공기가 떨렸다. 어찌나 소리가 격렬했는지, 저 멀리서 한참 전투를 벌이던 몬스터들조차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검붉은 오러가 화산마냥 터졌다.

    오라가 폭발시키면서 펼쳐낸 풍압이 전쟁터를 가볍게 휩쓸었다. 고블린은 풍압에 발이 떠밀렸으며, 오크는 팔뚝을 들어 바람을 피해야만 했다. 아가레스는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바르바토스에게 뛰어들었다.

    그때 벨레드를 비롯하여 여덟 명의 평원파 마왕이 끼어들었다. 마왕들은 익숙하게 보조를 맞추면서 아가레스의 공격을 버텼다. 조금만 잘못해도 목이 날아갈 공격의 홍수 속에서, 벨레드가 겁없이 웃었다.

    “나와 놀아주셔야겠수다, 아가레스.”

    “크아아아악! 애송이는 비켜!”

    “그렇게는 안 되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빚진 것은 확실하게 갚는 성격이거든. 댁이 나한테서 팔뚝을 세 번이나 가져갔으니, 댁도 세 번은 팔뚝을 헌납하쇼!”

    그날 평원파는 아가레스라는 일인군단을 마지막까지 저지했다.

    아홉 명의 마왕이 달라붙어서야 간신히 저지된 아가레스는 과연 가공스러웠다. 하지만 아가레스가 발이 묶인 사이, 평원파의 마왕 제파르와 산악파의 마왕 시트리는 적군에 협공을 퍼부었다.

    아가레스와 마왕들의 전쟁은 무승부로 결착이 지어졌으나, 군대와 군대 간의 전쟁은 아가레스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아가레스는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했다. 반드시 바르바토스, 네 년의 목을 분질러버리겠노라고 울부짖으면서.

    가장 강대한 마왕이라 불리는 이는 그렇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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