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1 마왕결전(魔王決戰) =========================================================================
전체 영지에서 육 할을 떼어달라니!
머리통에 나사가 빠져도 치즈구멍처럼 빠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평원파, 아가레스, 가미긴이 제각기 4:3:3의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만한 협상안이 아니었다. 상대는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며 아주 우쭐해져 있었다!
“…….”
내가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바르바토스에게 중지와 약지를 선물해버린 이후, 나는 손가락이 잘려나가 뭉퉁해진 부분을 꼼지락거리곤 했다. 마왕의 재생력을 사용해서 치유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방심하면 언제든지 훅 가버릴지 모른다. 상처는 그것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마계에서 갑작스럽게 습격을 받아 혼란과 공포에 잠겼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런 사태에 비하자면, 지금 이곳에는 암살자도 없었고 칼날과 마법이 오가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가자.
“……현재 아가레스 님의 군세를 이루는 것은 일부 무소속 마왕입니다. 월맹군을 계기로 해서 모여든 무소속 마왕들은 아무 구심점도 연고도 없이, 그저 아가레스 님 본연의 카리스마로 인해 묶여 있지요.”
“으응?”
가미긴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무슨 얘기야?”
“집단으로서 지극히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일개 부랑자 집단조차 잘 나갈 때는 괜찮다.
어느 집단이 견고한가 허술한가는 위험에 마주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반란군이 기세 좋게 봉기하여 나라를 뒤엎을 듯이 전진하다가, 한번 반격당하자 내부에서 배신자들이 속출하여 무너진 사례쯤은 무수히 많다.
“아가레스 님의 무력은 가히 마왕 중 마왕이라 천지를 떨게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군세 자체가 일신의 무력에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승리했으니 좋겠지요. 서로 나눠가질 보상품에 흥이 겨워 떠들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어찌될지요.”
이런 측면에서 평원파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비록 초전에서 패배했지만 바르바토스는 퇴각하여 즉각 부대를 재편했다. 열아홉 명의 평원파 마왕 중에서 적한테 항복하거나 이탈해버린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벨레드 형님은 내게 전황을 설명하면서 “다음엔 내가 아가레스의 오른팔을 분질러버리고 말겠다!” 하고 으르렁거렸다. 패배한 군대가 무사하게 새로이 편성했다는 것만도 놀라웠는데, 전의가 꺾이기는커녕 불타오르고 있었다.
“가미긴 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군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미긴이 금발을 손가락으로 꼬면서 대답했다.
“그야 짓밟고 또 짓밟아도 바퀴벌레처럼 반격하는 군대이지.”
“실로 그렇습니다.”
사령관 정도의 위치에서 군대를 실제로 지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패배해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공격해오는 군대라고. 장담하건대 그보다 끔찍한 적군은 없다.
평원파는 그런 군대였다.
바르바토스는 이념적 지도자이자 군사적 지휘관, 즉 모든 유형의 지도자를 통틀어서 가장 흉악한 부류이다. 그 주변에는 광신도만이 모여 있다. 이들은 머리와 가슴을 이념으로 물들인 채 한 덩어리의 살육기계가 되어 움직인다.
“평원파는 몇 번이나 패배해도 끈즐기게 다시 일어나겠지요. 평원파를 최종적으로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을 문자 그대로 전멸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흐응. 아가레스한테 그게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솔직히 모릅니다.”
내가 두 손을 내보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장담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소속 마왕들이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미긴이 대답하지 않고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지만 다만 침묵하기 위한 미소였다.
“평원파와 달리 무소속 마왕들은 고작 한 번의 패배로 인해 동요하겠지요. 바르바토스가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바르바토스는 마왕군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의 전술가이다. 상대방이 허약해진 지점을 늑대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다.
“가미긴 님, 본질적으로 이번 내전은 평원파가 아니라 아가레스 님에게 불리합니다.”
“아가레스가 불리하다구?”
“예. 아가레스 님은 한번의 패배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위험천만한 도박이지요.”
가미긴이 다리를 꼬았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인처럼 흰색 천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천옷이 흘러내려 허벅지가 훤하게 노출되었다.
“그래서? 판돈이 높을수록 위험부담이 큰 거야 당연해.”
“가미긴 님에게는 지금이 가장 몸값이 비싼 때라는 얘기입니다.”
내가 여유를 가장하여 미소를 지었다.
“평원파가 승리해버린 다음에는 지금처럼 값비싸게 협상해올 기회가 영영 사라질 겁니다. 가미긴 님, 내전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중북부의 2할을 당신께 약속드리겠습니다. 저희 평원파와 힘을 합쳐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걸.”
가미긴이 소리 높여 웃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별로 설득력이 강하지 않아. 아가레스가 자신의 카리스마만으로 군세를 유지시키고 있다구? 좋아. 하지만 정반대로 말하면, 바로 그 한 사람에게 평원파는 패배한 거잖아~.”
“…….”
가미긴에게는 협상에 응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적당히 영토를 떼어주겠다고 하면 협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마는, 아마도 아가레스와 가미긴 사이에는 내 생각보다 단단한 협조가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마법을 사용해서 서로 배신할 수 없게 만들어놨을지도 모른다.
내가 말했다.
“저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가미긴 님.”
“나야말로 분명히 협상을 제시했어. 단탈리안.”
우리 두 사람은 웃는 낯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번째 협상이 아무런 소득없이 끝났다.
나는 지금까지 아껴둔, 비장의 한수를 동원하기로 결심했다.
* * *
협상 결렬!
아가레스는 즉각 군대를 움직였다. 내심 그녀는 협상 따위를 마뜩치 않게 여겼으므로, 가미긴이 소식을 전해주자 크게 기뻤다. 아가레스는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평원파는 빛살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지.”
애당초 그녀는 마왕군에서 대표적인 전쟁꾼으로 바르바토스가 손꼽히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예전부터 아가레스가 생각하기에, 전술이란 인간종의 놀이에 불과했다. 마인에게 전쟁이란 압도적인 무력으로 쓸어버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면에, 바르바토스는 이번에도 최대한 지형적인 이점을 살리고자 했다.
먼저 고지를 점령하여 적군으로 하여금 돌격할 때 쉽게 지치도록 만들었다.
앞선 전투의 교훈을 받아들여 바르바토스는 아예 아가레스만 전담할 부대를 따로 짜두었다. 다름 아니라 바르바토스와 벨레드 등, 아홉 명의 마왕과 사백 명의 흑기사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전대륙을 통틀어서 이보다 더 호화로울 수 없는 정예부대였다.
제파르가 걱정스럽게 지적했다.
“각하께서 아가레스를 전담하면 누가 전군을 지휘하겠습니까?”
“네가 지휘하면 되잖아, 제파르.”
그리하여 양군의 총사령관이 지휘권을 내팽개치고 직접 맞부닥친다는, 전무후무한 전투가 일어났다.
지난 패배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음에도 평원파는 접전을 이루어냈다. 평원파가 이끄는 군대 자체가 수백 년 동안 쉬지 않고 실전을 거듭해온 부대들이었다. 질적인 측면에서 아가레스의 군세를 넘어서고 있었다.
“애송이들아! 오늘도 한판 놀아보자꾸나!”
그러나 마왕 아가레스에게는 군대의 질을 무마하고도 남는 강력함이 있었다.
아가레스가 붉은 늑대를 몰면서 쉴 새 없이 종횡무진했다. 바르바토스는 전력을 다해서 아가레스에게 맞섰으나, 서열 제2위라는 직함을 노름으로 따낸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듯이 아가레스는 아홉 명의 마왕과 사백 명의 흑기사를 상대해냈다.
“저 무식한 년은……지치지도 않나!”
바르바토스가 숨을 헐떡이며 쏘아붙였다.
전투는 벌써 여섯 시간 지속되고 있었다. 그동안 바르바토스는 자신이 가진 마력의 절반 이상을 쏟아부었다. 체내에서 마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가자 현기증과 구토가 유발되었으며, 이윽고 내장이 베베 꼬이는 통증에 시달렸다.
상태가 나쁜 것은 바르바토스뿐만이 아니었다.
벨레드는 지난 번 전투에서 팔 한쪽을 상납했건만 오늘도 왼팔을 두 번이나 잘렸다. 어마어마한 재생력으로 다친 부위를 회복했지만, 그만큼 피로가 가중되었다. 바르바토스와 벨레드가 서서히 지치기 시작하자 아가레스는 더더욱 날뛰었다.
“벌써 끝이냐! 마계의 염원이라느니 뭐라느니 잘난 척하며 떠들 때는 언제이고, 겨우 이 정도로 지쳐 나가떨어질 정도였냐! 한심하구나, 평원파 년놈들아!”
아가레스가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웃었다.
“삶이란 상대적이다! 강자 위에는 더한 강자가 있으며, 약자 아래에 더한 약자가 있지! 그런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조차 몰라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강자이다 싶으면 사람은 강자인 척 가장하지!”
아가레스가 할버드를 휘둘렀다.
“그리하여 누구나 강자인양 가장할 수 있다! 강자처럼 말하고, 강자처럼 생각하며, 강자처럼 몸짓과 손짓을 꾸며낼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강자란 차원이 달라!”
광풍에 휩쓸려 죽음의 기사 세 기가 단숨에 절명했다. 바르바토스와 벨레드가 다루지 못해 생겨난 틈새를 죽음의 기사들이 막고 있었으나,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전력이 소모되었다.
아가레스가 오러를 피어내며 파안대소했다.
“나는 너희처럼 강자인 척 살아가는 벌래 새끼들을 조질 때 살아 있는 보람을 느끼지! 바르바토스! 네 년의 무력함을 절감해라.”
“아랫입만큼 윗입도 아주 헐렁하게 뚫렸군, 시발 년.”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갈며 재차 전투 대낫을 바로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
아가레스가 할버드를 놀리면서 힐끔 시선을 돌렸다. 일부러 빈틈을 보여서 유인해내려는 속셈인가, 하고 바르바토스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가레스는 그런 '꼼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실제로 아가레스의 얼굴이 점점 더 구겨지고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일단 안전거리를 확보해놓은 다음, 아가레스의 눈길이 향한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덕 저편에서 수백 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최고위 마왕의 우월한 신체능력이 한없이 멀리 떨어진 거리임에도 깃발 문양을 알아보게 해주었다. 아가레스의 깃발이 아니었다. 여느 무소속 마왕의 상징도 아니었다. 바르바토스는 곧장 문양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아가레스처럼 표정을 와락 찡그렸다.
“……시트리?”
뿔이 세 개 달린 염소.
그것은 서열 제12위. 파이몬이 몰락한 이후 현재 산악파를 통솔하는 장본인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 * *
시트리는 대여섯 명의 산악파 마왕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녀는 산양에 올라탄 채로 언덕 아래,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쓰윽 내려다보았다. 어느 쪽이 아군이고 어느 쪽이 적군인지 가늠하는 눈초리였다.
“헤에. 아가레스가 엉덩이를 훤히 드러내고 있네.”
그녀는 일찍이 단탈리안에게 약속했다. 파이몬을 살려주는 대가로 자신이 어느 소원이든지 두 가지를 들어주겠노라고.
첫 번째 소원은 자금을 원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단탈리안은 자신에게 두 번재 소원을 비밀리에 말해주었다.
소원이란 바로 합스부르크의 내전에 참전하여 바르바토스를 도와줄 것.
평생의 숙적이자 정적인 바르바토스를 도와주라는 얘기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고민했겠지. 하지만 시트리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승락했다. 산악파 마왕들이 반발했는데도 시트리는 독단적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매우 단순한 이유였다.
그것이 약속이었으니까.
마왕 시트리에게는 단지 그 정도 이유만으로 충분했다.
시트리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전군, 예의 바르고 상냥하게 아가레스를 강간해주자.”
그녀는 단탈리안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즐겁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뒷구멍을 범하는 건 내 특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