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9 마녀의 예언 =========================================================================
나는 곧바로 옷을 챙겨입었다.
침대에 어젯밤 불러들인 묘족(猫族) 창녀가 나뒹굴고 있었는데, 그녀는 바르바토스가 누구인지 알아봤는지 비명을 질렀다. 이불로 알몸을 대충 가린 다음――감춰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은 것을 가렸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허겁지겁 방바닥에 꿇어앉았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도 나도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아무 돈주머니나 꺼내서 창녀에게 던져주고,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사실 의복조차 제대로 차려입지 못하여 엉망진창이었다.
“선전포고는? 선전포고가 있었어?”
“있었지. 공격하기 오 분 전에 경고하는 버르장머리를 선전포고라고 부른다면.”
내가 이를 물었다.
서열 제2위의 마왕 아가레스가 기습적으로 침공했다. 하필 평원파 대다수가 마계에 모인 지금! 속임수, 함정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왠지 가미긴이 쉽게 쉽게 나온다 했어. 처음부터 이걸 노렸군!”
“일단 벨레드와 제파르를 급파했지만 현지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그녀는 일부러 화를 죽이고 있었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이상했다. 어째서 가미긴 홀로 협상대표로 참석했는가? 단순히 가미긴의 교섭능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오판이었다……아가레스와 가미긴은 서로 협조하여 교묘하게 공동전선을 펼치고 있었다.
“단탈리안, 잘 들어. 나는 곧바로 합스부르크로 향할 거야. 아가레스 년이 직접 나선 이상 내가 아니면 조금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나에게 전권이 떨어지는 것이로군…….”
“일단 바알 아저씨한테 말해서 자리를 마련했어.”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행운을 빌어주지. 가미긴 따위한테 당하지 마.”
“아아. 바르바토스, 너에게도 무운을.”
내가 허리를 숙였다. 우리는 짧게 입맞춤을 나누었다.
바르바토스가 마법을 써서 곧장 사라졌다. 나는 니블헤임 궁전으로 향했다.
궁전에는 이미 열댓 명의 마왕이 모여 있었다. 어디선가 소식을 빠르게 접하고 앞으로 일어날 진풍경을 가장 가까이서 관람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다.
그중에 평원파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마 나를 제외하고 전원 합스부르크로 재빨리 귀환한 것 같았다.
“어머, 단탈리안. 조금 늦었네~?”
가미긴이 협상석에 앉아 느긋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어제와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뻔뻔하기는……!
화가 날수록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이 내 장점이었다. 나는 상석에 앉은 바알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바알은 이번 협상의 자리를 마련해준 장본인. 아가레스와 가미긴이 협약을 일방적으로 깨트린 이상, 바알은 이제 평원파의 손을 들어줄 것이었다.
“간밤에 아주 멋진 소식을 들어서 그만 잠을 설쳤지 뭡니까. 가미긴 님,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군요.”
내가 협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공식적으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데 교섭자의 영토를 침범하다니요? 소인이 고작 서열 제71위라서 생소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최고위 마왕 여러분의 예의범절입니까?”
“이런. 화가 잔뜩 났네. 하지만 한 군데 잘못된 점이 있어.”
좋다, 가미긴. 어떤 방식으로 변명할지 한번 들어보도록 하자.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가미긴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설령 가미긴이 아니라 다른 누가 오더라도 결코 변명하지 못하리라.
“잘못된 지점이라고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부디 최고위 마왕께서 최하위 마왕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가미긴이 미소를 지었다.
“응. 최고위 마왕 '여러분'이 아니야. 복수가 아니라 단수를 써야 돼.”
“……?”
“정보통이 느리구나. 아가레스는 평원파만 공격하지 않았어.”
다음에 이어진 말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내가 점유하고 있는 영토도 공격받았다는 얘기야, 단탈리안.”
* * *
당했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레스는 애초부터 가미긴을 대표로 내세운 것이 아니었다. 전권을 넘겨주는 척하며 실제로는 뒤에서 바르바토스와 가미긴,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사냥했다. 주인들이 사라진 영지는 서열 제2위의 마왕군 앞에서 손쉽게 점령되겠지.
“솔직히 말해서 나도 화가 난다고 할까~. 이렇게 멋들어지게 뒤통수를 후려맞으면 오히려 상쾌하다고 해야 할까아.”
“가미긴 님도, 이번 사태의 피해자라는 말씀입니까?”
가미긴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에.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
“…….”
그렇다면 아가레스가 독단적으로 모든 일을 계획했다는 말인가?
나는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에 잠겼다. 이상했다. 서열 제2위의 마왕이라고 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해도 괜찮을까? 바알이었다. 자그마치 서열 제1위의 대마왕이 협상을 준비해주고 있었다.
심지어 아가레스는 평원파뿐만 아니라 교섭자로 찍은 가미긴까지 배신했다. 말하자면 모든 이를 적군으로 돌려버린 셈이었다. 제아무리 아가레스가 강력하다고 한들, 열 손가락으로 태풍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대체 어디에서 자신감을 얻은 것이냐.
“이해할 수 없군요. 가미긴 님까지 저희와 함께한다면 아가레스 님에게 승산은…….”
“응? 무슨 소리야?”
그때 가미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계속 단탈리안 너랑 협상할 건데.”
무슨 말인가.
자기 영토를 침범당했고, 우군에게 배신당했다. 누가 봐도 이제는 서로 협력할 차례였다. 그런데 또 다시 협상이라니? 나는 등골에서 무엇인지 모를 불안감이 떨어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미긴 님. 실례합니다만, 지금은 협상을 거론할 때가 아닌 줄로 압니다. 어서 합스부르크로 귀환하여 마땅히 배신을 응징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걸.”
일순, 가미긴의 실눈 너머에서 새빨간 눈동자가 반짝거린 것처럼 보였다.
“왜 내가 아가레스한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건데?”
“……예?”
“아니, 단탈리안. 아가레스가 내 영토를 공격한 건 맞아. 괘씸한 일이지! 하지만 말이야. 적대하고 있는 세력이 마찬가지로 적대하고 있는 세력을 공격했을 뿐이야? 딱히 배신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이유는 없잖아.”
나는 상대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죄송합니다. 허나, 가미긴 님께서는 아가레스 님을 대신하여 특사로…….”
“아아. 나도 그랬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아니었더라구.”
가미긴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딱밤을 가볍게 먹였다.
“사실 기억을 더듬어보니까 아가레스가 나한테 외교권을 맡긴다고 얘기한 적이 없었어!”
“…….”
아아, 그런가.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방식으로 나왔는가.
“내가 니블헤임에 가려는데 아가레스가 뜬금없이 너 혼자 가라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나는 아, 얘가 나한테 교섭권을 전적으로 맡기려는구나아, 하고 제멋대로 생각했지. 상식적으로 그런 말이잖아. 아하핫.”
가미긴이 혼자서 떠들었다. 나는 마음이 점점 차갑게 식었다.
“내가 실수해버렸지. 아가레스한테 '공식적'으로 확인을 받았어야 하는데. 그만 마음대로 넘겨짚은 바람에 문서 한 장 없지 뭐야. 으응, 멍청하게 굴었어. 부끄러운걸. 전부 내 실수야. 책임을 지고 보상할게.”
“……한 마디라도.”
입술이 부들거리며 간신히 말했다.
“한 마디라도, 당신을 교섭자로 인정하겠노라는 말씀을 듣지 못하셨다고요?”
“응. 단 한 마디도.”
가미긴이 웃었다.
“전혀 듣지 못했어.”
“장난치지 마십시오!”
내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이건 최악으로 더러운 수법이었다. 아가레스와 가미긴은 고스톱을 짜고 치고 있었다. 아가레스가 너를 교섭자로 인정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미긴은 제멋대로 착각해서 자신이 교섭자임을 자처했다.
이것은 실수였다. 그렇지만 전쟁을 일으킨 것은 어디까지나 아가레스 한 명이며, 고로 전쟁의 책임은 아가레스한테 돌아갔다. 더 나아가서 아가레스는 가미긴의 영토까지 침범하는 수작을 부렸다.
전쟁에 한하여 가미긴은 어디까지나 피해자로 남게 되는 것이었다!
아가레스는 어떠한가.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은 분명히 비난받아 마땅했다. 그렇지만 아가레스는 협상의 자리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아가레스가 협상에 참여했다고 가미긴을 비롯하여 우리 전원이 마음대로 '착각'한 셈이었다.
고로 아가레스는 전쟁에 대한 책임은 있을지라도 교섭을 파탄냈다는 것에 대한 책임은 전무했다. 그리고, 빌어먹을! 현재 합스부르크에서 세력 다툼은 일상사였다. 바르바토스가 먼저 국지전을 벌인 적도 많았고, 아가레스가 먼저 공격해온 적도 많았다.
그저 전쟁을 벌일 것만으로 아가레스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즉……이번 교섭 자체가 장대한 기만작전이었다!
“어린아이라도 알 것입니다! 책임 소재를 돌려막아서 아예 증발시키려는 계획임을!”
“흐응.”
“당신은 바알 전하의 권위를 모욕했으며, 평원파의 의지를 깔아뭉갰습니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미긴은 우리의 방심을 이끌어내 기습공격을 이끌어냈지만, 애당초 그녀 역시 공격받았으므로 무죄였다. 가미긴에게는 그저 멍청하게 실수했다는 책임소재만이 주어지게 되었다.
아가레스는 교섭을 파탄내고 전투를 일으켰지만, 애당초 교섭에 동의한 적이 없으므로 무죄였다. 아가레스에게는 그저 일상적인 전투를 한 번 더 만들어냈다는 책임소재만이 주어지게 되었다.
두 명의 최고위 마왕이 암약하여 서로가 서로한테 피해가 가지 않는 방식으로 평원파에게 물을 먹였다! 개 같은 년들이!
“뭐어, 단탈리안. 네가 길길이 날뛰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데 말이야~.”
가미긴이 여유롭게 말했다.
“나한테 그렇게 분노해서 평원파에 좋을 게 없을 텐데?”
“이 상황에서 가미긴, 당신께 분노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분노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말했잖아. 나는 계속해서 교섭할 거라구.”
가미긴이 손에 깍지를 꼈다.
“자아. 단탈리안. 현재 아가레스는 네 곳의 영지를 제외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을 전부 점령했어. 이건 '나의 정보통'이니까 신뢰해도 좋아. 제국의 수도 빈드보나까지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덧붙여서 알려줄게.”
얼굴에 철면피를 발라도 수천 겹을 바른 것이 틀림없었다. 나의 정보통은 곧 자신이 아가레스한테 직접 정보를 받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고작 네 곳의 영지를 빼고 합스부르크 중북부 일대가 함락되었다는 것은 결코 희소식이 아니었다…….
“응, 평원파 일생일대의 위기라는 녀석이야. 그러면 단탈리안, 네 눈앞에 앉아 있는 마왕은 어쩌면 그 위기에서 벗어나는 걸 도와줄 수 있는 존재 아닐까아?”
“……가미긴, 당신.”
“나는 평원파를 도와줄 의향이 충분히 있어. 아가레스한테 당했으니 복수할 마음도 뜨겁구. 그러니까…….”
가미긴이 히죽 웃었다.
“글쎄에, 합스부르크 중북부에서 5할 정도의 영토를 넘겨주면 원군을 고려해보겠는데.”
내가 이를 꽉 물었다. 이것이 가미긴의 진짜 의도였다.
아가레스와 손을 마주잡고 협박질을 동원하여, 평원파로 하여금 강제로 부당한 영토분할에 동의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되겠는가. 결과적으로, 가미긴이 실수했다는 것조차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다.
가미긴이 눈웃음을 치며 내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부터 협상을 시작해볼까, 단탈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