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28화 (228/510)
  • 00228 마녀의 예언  =========================================================================

    춤이 끝나자 무도회장 곳곳에서 박수를 보내왔다.

    어디에서 누가 박수를 보내었는가. 그것이 현재 마왕군의 세력구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가장 열렬하게 손뼉을 친 파벌은 평원파였다. 그들은 반쯤은 바르바토스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에서, 나머지 반쯤은 자기네 파벌이 배출해낸 최고의 책사에 대한 칭찬에서 손뼉을 쳤다.

    단, 바르바토스의 파트너 자리를 빼앗긴 벨레드와 제파르는 표정이 썩고 있었다.

    “크윽! 아우가 없었을 때는 내가 군단장 각하를 에스코트했거늘.”

    “각하께서는 전사보다 모사꾼을 좋아하시는 것인가……!”

    두 마왕은 수백 년 동안 매번 파트너 자리를 두고 경쟁했지만, 오늘만큼은 함께 피눈물을 흘렸다. 궁상맞게도.

    그 다음은 중립파였다.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를 비롯하여 이 소수의 양식파는, 단탈리안을 내심 이해심 깊은 동지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기에 단탈리안은 무식한 전쟁광밖에 없는 평원파에서 기적적으로 피어난 장미꽃이었으며, 유일한 양심이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에선 파이몬을 용서했고…….”

    “월맹군에서도 산악파를 너그러이 대우해주었지. 말이 통하는 자일세.”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관용과 균형을 중시하는 중립파에게 단탈리안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는' 정치꾼이었다. 그것은 이상적인 정치꾼이기도 했다.

    파이몬처럼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만인의 이익 따위를 울부짖는 자는 위험했다. 이쪽에서 이득을 제시해도 대의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 때문에 좀처럼 타협하지 않았다. 함부로 선을 넘어가서 폭주해버리는 타입 역시 위험했다.

    반면에 단탈리안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고, 언제든지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요컨대 말이 통했다.

    정신병자가 가득한 마왕군에서 말귀가 통하는 마왕이란 소중했다. 중립파로서는 단탈리안이 계속해서 평원파에 남아 전쟁광들에게 목줄을 채워주기를 기대했다.

    마지막은 물론 산악파였다.

    그들이 심기 불편한 낯빛으로 무도회장을 바라보았다. 박수가 터져나오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표정이었다.

    산악파 마왕들이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의 멸칭을 입에 담으면서 수군거렸다.

    “미치광이와 절름발이인가. 과연, 어찌보면 기가 막힌 조합이 아닌가.”

    “한 명은 양지에서 피를 몰아치고 다른 한 명은 음지에서 피를 빨아들인다. 평원파는 대단한 수장과 참모를 얻었어.”

    오로지 시트리만이 안절부절 못하며 주변의 동료들과 단탈리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단탈리안은 파이몬 언니가 죽을 뻔한 걸 살려준 은인이잖아?’

    솔직히 그녀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선제공격을 가한 것은 산악파였다. 평원파가 아니었다. 산악파는 책임을 지고 산산이 공중분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히잉.’

    단탈리안이 관용을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산악파는 파탄났을 거다. 시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째서 동료들이 고마워야 할 대상을 되레 증오하고 경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박수가 끝났다.

    단탈리안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다음 어디론가 걸어갔다. 바로 중립파가 모여 있는 장소였다. 어째서 평원파인 단탈리안이 중립파로 향하는가, 하고 여러 마왕이 고개를 갸웃하던 때였다.

    “저에게 당신의 첫 번째 춤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단탈리안이 중립파 마왕에게 춤을 신청했다. 마왕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탈리안에게 신청을 받은 마왕은――중립파의 거두,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였다.

    당연하게도 마왕 마르바스는 남성이었다. 단탈리안이 남성에게 춤을 신청했다!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제정신인가?”

    “미쳤군…….”

    이곳저곳에서 마왕들이 경악했다. 제아무리 마계가 동성애에 관대하다고는 하나 마왕의 무도회처럼 공식적인 자리에서 남자-남자 파트너가 허용되지는 않았다. 아니, 설령 허용된다 하더라도 서열 제71위에 불과한 단탈리안이 저지를 금기는 아니었다!

    마르바스가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단탈리안을 쳐다보았다.

    “흐음.”

    두 마왕 사이에 말없이 눈짓이 오갔다.

    마르바스는 두어 번 턱수염을 쓰다듬더니 옅게 웃었다.

    “물론이다. 바르바토스 다음으로 아름다운 꽃에 본인이 선정되다니, 영광이네.”

    “하하. 바르바토스가 제 친우가 아니었더라면 당신께서 첫 번째 꽃이 되셨을 것입니다.”

    “더더욱 영광이라네.”

    마르바스가 자신의 손을 단탈리안의 손바닥에 올렸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여마왕들이 흥분했다.

    “세상에나! 저것 좀 보세요, 마르바스 님이 춤추는 거 처음 봐요!”

    “설마, 설마하는 말이지만, 마르바스 님까지 단탈리안의 애인일까요!?”

    “꺄악! 어쩜 좋아!”

    자고로 남성의 동성애만큼 뭇 여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화제거리가 없었다. 그 남자가 마르바스처럼 댄디하고 인기가 많은 마왕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여마왕들이 눈에 불을 켜고 쉴 새 없이 ‘마르바스와 단탈리안, 둘 중 어느 누가 남성 역할인가’를 논쟁했다.

    가장 신난 사람은 단연 바르바토스였다. 그녀는 배꼽을 부여잡은 채 깔깔 웃었다. 벨레드 역시 두 마왕을 손가락질하며 크게 웃어댔다.

    “휘이이익! 잘한다! 더 해라, 더 해!”

    “남자가 리드를 정말 못하는구만!”

    이미 정숙한 무도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여마왕들이 산악파며 평원파며 파벌을 가리지 않고 환호성을 질렀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 자그마한 해프닝을 흥미롭게 지켜보았으나, 표정이 썩은 자도 일부 있었다.

    가미긴은 심기가 불편했다.

    이래서야 자기가 기껏해서 만들어내는 풍문이 쓸모가 없어졌다. 가미긴이 단탈리안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보다 마르바스가 단탈리안과 모종의 관계에 놓였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훨씬 더, 압도적으로 흥미로웠다.

    한동안 사교계에선 두 남자 마왕에 대해 신나게 떠들겠지. 자신이 조작한 풍문은 미처 퍼지기도 이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  *  *

    첫날 밤은 무도회만 열리고 끝났고, 두 번째 날부터 협상에 들어갈 예정이었지만――벌써부터 사교계에는 마르바스와 나의 얘기로 시끌벅적했다.

    “중립파가 단탈리안의 뒷배를 봐주고 있다.”

    “이번 협상에서 중립파가 평원파의 손을 들어주겠다는 의도이다.”

    게다가 근거 없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마르바스가 내 애인인 것이 아니라 그저 평원파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대범한 추측이었으나 사람들은 의외로 이걸 마음에 들어했다. 아귀가 들어맞는다면서. 애인 한 명 없이 청렴하게 살아온 마르바스가 뜬금없이 단탈리안과 사귄다는 것보다 자연스러웠다…….

    뭐, 그걸 의도한 것이었지만.

    마르바스 영감은 나한테 빚을 진 것이 여러 개 있었다. 그걸 이번 기회에 갚으라고 강요했다. 우리 둘은 서로 아무런 합의를 미리 건네받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동조했다. 아마도 내가 뭘 생각했는지 곧바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여간 정치력이 비상한 영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나한테 유리한 분위기 속에서 본격적인 협상이 열렸다.

    바알이 중재석에 앉아 있었지만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르바토스가 말한 대로 바알은 단지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이상으로 뭔가 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저쪽 대표로 나온 가미긴, 이쪽 대표로 나온 내가 논쟁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바알이 주변에 앉기만 했는데도 공기가 묵직해졌다.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게끔 압도하는 분위기가 바알에게 있었다. 연륜이라는 것일까.

    “합스부르크를 점령하는 데 공헌한 것은 평원파뿐만이 아니야.”

    가미긴이 말했다.

    “많은 군단이 함께 움직임으로써 얻어낸 거라구. 그쪽에서 제멋대로 합스부르크의 섭정을 자처하면서 몽땅 꿀꺽해버리면 곤란해~.”

    “누가 전쟁에 더 공헌했는가를 따지자는 것입니다.”

    내가 차분하게 반론했다.

    “합스부르크의 주력을 상대한 장본인은 우리 평원파였습니다. 파이몬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분쇄한 것도 우리 평원파였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영토는 마땅히 평원파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물론, 여타 군단에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흐응~?”

    “합스부르크의 영토에서 거둬들이는 재화를 상당량 제공하겠습니다. 만족할 만한 대가가 주어지리라 약속드리지요.”

    가미긴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장난질이야, 그거. 우리가 지금 금은보화가 부족해서 뗑강부리는 줄 알아? 대륙에 자신의 영토를 갖는다.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한 거야아. 솔직하게 말할게. 평원파만 마계의 영웅이 되려는 심보가 고약하다구.”

    “그렇다면 그쪽의 요구사항은 무엇입니까?”

    “평원파가 5. 아가레스랑 내가 각각 2.5씩. 어때? 이 정도면 타당한 분배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고개를 저었다.

    “평원파가 8. 가미긴 님과 아가레스 님이 각기 1씩 분배받는 것으로 합의하지요.”

    “흐으응.”

    가미긴은 길게 콧소리를 냈다. 방청석에서 다른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가미긴이 예의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면서 속삭였다.

    “전쟁을 하고 싶은 거야, 평원파는?”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지요. 누가 이번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습니까? 아가레스 님과 가미긴 님이 군단을 이끌었다지만 인간군과 정면대결을 피했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힘을 주어 말했다.

    “요새도시 크렘스를 점령한 것이 누구였습니까? 우리 평원파였습니다. 빈드보나를 함락한 다음에 잔존한 합스부르크 군대를 추격한 것은 누구였습니까? 우리 평원파였습니다. 가미긴 님. 당신은 합스부르크의 패잔병을 눈앞에 두고도 간단히 퇴각해버렸습니다.”

    “전략적인 후퇴라는 거야.”

    가미긴이 미소를 무너트리지 않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당장 추격전에 나선 바르바토스만 해도 군대를 말아먹었잖아. 그런 무의미한 전투에 병력을 소모할 만큼 우둔하지 않다는 말이지.”

    “무의미한 전투라…….”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인류를 물리치고 마인들을 위한 세상을 대륙에 마련한다. 그 지상명제에는 당연히 희생이 따릅니다. 무의미한 희생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희생이지요. 바로 그런 희생 덕분에 우리는 합스부르크 북부라도 얻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희생하길 거절한 사람이 희생한 사람의 영토를 탐낸다……정말로 훌륭한 태도로군요. 감탄했습니다.”

    “…….”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방청객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당연하다. 지나치게 나아가야 한다. 지금 나는 한 명의 마왕으로 자리한 게 아니다. 평원파 전체를 대변하는 자로서 나와 있다. 평원파 전체이다.

    가미긴이라는 마왕 한 명에게 저자세로 나갈 수가 없다.

    “여러분이 착각하는 것은 지금 협상을 세력 다툼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을 지키려는 우리 평원파와 사사로운 이익만을 탐하는 여러분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입니다.”

    “말이 조금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전혀 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중립파를 보십시오. 중립파 역시 추격전을 앞두고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중립파는 합스부르크에 남아 영토를 탐내지 아니하고, 폴리투니아 왕국으로 향해 진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신 있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나는 명백하게 비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그에 반해 가미긴 님과 아가레스 님이 보이는 태도는 솔직히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께서 담당하신 영역은 본래 합스부르크가 아니라 다른 지방입니다. 그곳으로 향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싸우기 싫다, 희생하기 싫다는 것 아닙니까? 싸우지도 않고 희생하지도 않는 자가 영토까지 얻을 수 있다니……언제부터 마왕이란 게 이처럼 편안한 직업이 되었는지, 소인으로서는 알기 어렵군요.”

    결국 그날 협상은 파탄났다.

    가미긴과 나는 각자가 제시한 협상안에서 한 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다가 마왕들의 다수결로 결정이 나겠지. 그렇다면 유리한 것은 가미긴이 아니라 나였다.

    나는 협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나갈 생각이었다. 최종적으로 평원파가 7, 가미긴과 아가레스가 각각 1.5 정도씩 먹으면 적절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음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내 숙소에 들어온 바르바토스를 보고, 나는 일이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가레스 년이 쳐들어왔어.”

    “뭐?”

    바르바토스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빈집털이를 했다고, 그 쌍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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