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27화 (227/510)
  • 00227 마녀의 예언  =========================================================================

    이때 알림창이 푸르게 떠올랐다.

    「마왕 가미긴이 당신에게 '위압' 당했습니다!」

    「마왕 가미긴이 지력과 매력 능력치에 따라 상태이상에 저항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어떤 기적적인 확률에 의해 6으로 고정되었습니다! 당신은 '압도적인' 능력차에도 불구하고 상태이상을 성공시켰습니다!」

    요란하게 효과음이 울렸다.

    「기적적인 미션을 클리어했습니다.」

    「미션 보상으로 1개의 스킬이 강화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스킬 <연기>가 스킬 <면종복배(面從腹背)>로 강화되었습니다!」

    꽤나 의외였다. 이것이 얼마 만에 보는 스킬 습득인가.

    면종복배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아도 게임에서 외교와 음모를 실행할 때 보너스가 붙는다. <연기>처럼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모르는 잡스킬과 다르게 꽤나 써먹을 만하다.

    세상에, 플레이가 시작한 지 3년이 지나서야 그럭저럭 괜찮은 기술이 습득되다니. 지옥 같은 난이도에도 정도가 있다. 이게 진짜 게임이라면 플레이어들이 화염방사기를 들고 제작사에 돌격하겠지.

    “단탈리안…….”

    가미긴이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자그마한 틈새로 한숨과 같은 무언가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내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단탈리안, 미쳤구나.”

    “오. 우선 미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기준을 말씀해주십시오. 기준에 따라서 세상 사람들 전부가 미친놈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미 선을 넘어가버렸어. 마왕 중에 가끔 너 같은 작자가 있지.”

    가미긴이 내 오른손을 놓았다.

    “알고 있어? 그런 것을 지켜보는 게 즐겁다고 환희하는 마왕은 둘 중 하나야. 인생을 위험천만하게 사는 모험가이거나, 사시사철 자살하길 원하는 도박광이야. 어느 쪽이든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얼른 자기를 죽여주길 바라는 미치광이라고.”

    “그래서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요, 제가 미쳤다고 가정해봅시다. 뭐가 대단합니까? 살아남는 일 빼고는 전부 무의미하다고 내치는 당신은 안 미쳤습니까? 오직 마인들을 위해서 수백수천만의 인류를 죄다 쳐죽이자는 바르바토스는 제정신입니까? 다 미쳤습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두 사람의 대화가 신경 쓰이는지 이쪽을 힐끔거리는 마왕이 몇 명 있었다. 대다수는 자기네 파벌과 친목을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차단되어서 내 귀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한 장소에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분리된 느낌을 받으며 내가 말했다.

    “마왕은 미친 작자만 하는 것입니다. 미쳐서 하는 일이에요. 가미긴, 당신께선 제가 바르바토스를 도와줌으로써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하리라 지적하셨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바르바토스를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

    “아, 물론 가미긴 님. 당신도 좋아합니다.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그토록 겉표정과 속마음이 완전무결하게 분리될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언제 한번 진득하게 얘기를 나누어보죠.”

    가미긴이 실눈 너머에서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 기회가 된다면.”

    가미긴은 끝까지 미소를 잃어버리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그녀는 자기가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나에게 우호적인 마왕이 이곳에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혼자 남게 되었다.

    시트리가 나를 어딘지 애달픈 눈동자로 바라보았지만, 산악파 마왕들이 주변을 둘러싼 탓에 다가오지 못했다. 아마도 나한테 친근하게 접근한 것에 대하여 동료들한테 잔소리를 잔뜩 듣는 것 같았다.

    ─ 나 좀 도와줘, 단탈리안!

    시트리의 시선이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잔소리를 들어도 쌌다. 이제 파이몬이 아니라 네가 산악파의 대표주자이니까 어느 정도 자숙해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 포기해. 그리고 넌 좀 잔소리를 들을 필요도 있어.

    ─ 배신자! 거짓말쟁이! 평생 원망할 거야!

    시트리가 절망적인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원래 아프면서 성장하는 거란다.

    그외에도 몇몇 마왕이 이따금씩 내 쪽을 훔쳐보았지만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현재 마왕 단탈리안이 가지는 위치는 상당히 미묘했다. 일단 월맹군에서 거둔 전적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했다. 친분을 나누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마왕도 제법 있으리라.

    문제는 섣불리 친해지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평원파의 핵심 인사. 게다가 바르바토스의 애인으로 알려져 있다. 단탈리안과 친해지면 그 자체로 평원파에 가까워지려는 행보 아니냐고 의심을 받는다. 마계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과격분자로 유명한 평원파이다. 썩 달갑지 않겠지.

    더군다나 파이몬이 몰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뭐, 산악파 입장에선 눈에 가시라는 거다. 산악파와 척을 질 배짱이 없다면 나한테 다가서기 어렵다.

    ‘뭐. 홀로 즐기는 연회도 그 나름대로 편하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도회장 구석에 갔다. 거기엔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다과가 산더미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좀처럼 맛보기 힘든 사치품이었다. 훌륭하군.

    시종에게 포도주잔을 하나 건네받은 다음 나의 능력치창을 확인했다. 과연 스킬 부분에 <연기>가 사라지고 <면종복배>가 들어서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스킬의 세세한 효과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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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킬>

    1. 면종복배(面從腹背).

    A급 개인 약화계 엑티브 스킬.

    상대방의 호감도가 20 미만일 경우: 플레이어의 정치력 +10%, 매력 +10%.

    상대방의 호감도가 20 이상일 경우, 상대방을 공격했을 시: 상대방의 통솔력 -20%, 무력 -10%, 지력 -20%, 정치력 -20%.

    (※ <연기>가 강화된 스킬입니다. 발동 시에 <연기>의 효과가 유지됩니다.)

    ─────────────────────────

    “음. 괜찮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포도주를 머금었다.

    A급 스킬치고는 상당히 쓰레기스러운 효과였지만 이것이라도 어디인가. 연기 스킬에는 설명문이랍시고 적혀 있던 문장이 딱 하나, ‘상대방을 설득시킬 확률이 증가합니다’, 이것뿐이었다.

    나의 능력치에 대하여 관대해지기로 마음 먹은 지 한참 오래되었다. 그저 정치력과 매력을 10%씩이나 올려주어서 세상에 대하여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아, 무엇이든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했다. 사람이 겸손해야지.

    홀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다크엘프들로 이루어진 악단이 멋들어지게 악기를 켰다. 참고로 다크엘프는 이 세계에서 가장 예술적인 종족이었는데, 의외로 순혈 엘프는 대부분의 음악을 '저속한 예술'이라고 깔보아서 가까이 하지 않았다.

    “야. 너 구석에서 찌질하게 뭐하냐?”

    시간이 지나면서 마왕들이 속속 들어왔다. 그중에는 물론 바르바토스도 있었다. 그녀는 무도회장에 들어오자마자 스윽 마왕들을 훑어보더니, 나를 발견하고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내가 쿨하게 대답했다.

    “보다시피 연회를 만끽하고 있지.”

    “지랄이 풍년일세. 오늘 무대의 주연이라는 놈이 왕따처럼 궁상이나 떨고 있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바르바토스가 자신의 양쪽 허리에 손을 얹혔다.

    “네가 청승맞게 굴면 내 체면까지 구겨진다고 바로 얼마 전에 얘기하지 않았냐?”

    “후후. 바르바토스여, 너는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어. 나는 고독하되 그 고독은 결코 망망대해에서 바닷길을 잃어버린 선원의 고독이 아니야. 다만 홀로 뱃머리가 향할 곳을 결정해야만 하는 선장의 외로움…….”

    “혓바닥 뜯어버리기 전에 닥쳐.”

    네, 닥치겠습니다.

    바르바토스가 과자를 집었다. 입에서 와작와작 씹어먹는 소리가 장렬하게 들려왔다. 일단 너부터 체면을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할 뻔했지만, 혓바닥이 뜯기기는 싫었으므로 얌전히 닥쳤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새하얀 드레스를 입었다.

    바르바토스의 이미지 하면 무엇보다도 검은색과 붉은색. 전쟁터이든 무도회장이든 흑색과 적색의 옷만 입기로 유명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만큼은 눈처럼 하얀 옷을 입고왔다.

    바르바토스의 백발이랑 무척 잘 어울렸다. 눈이 야트막하게 덮힌 백야(白野)를 보는 듯했다. 그녀가 내면에 간직한 순수함과도 맞아떨어져 개인적으로 만점을 주고 싶었다.

    “왜 평소에 안 입던 옷을 입어?”

    “너한테 맞춘 거잖아, 둔탱아.”

    바르바토스가 내 손에서 포도주잔을 가로챈 다음에 꿀꺽했다.

    “크흐. 너 만날 우중충하게 검은색으로 된 누더기만 입잖아. 어차피 오늘도 그럴 것 같아서 그냥 내가 하얀색으로 맞춰줬다. 됐냐?”

    “이거, 이거. 황공무지로소이다.”

    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설원의 요정님. 저에게 첫 번째 춤의 영광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럴려고 온 거야, 둔탱이 신사님.”

    바르바토스가 웃으면서 내 손바닥에 손을 올렸다. 나보다 한참 자그마한 손. 그 여리고 부드러운 것을, 유리로 된 예술품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우리는 홀 가운데로 나아가며 가볍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춤 실력이 늘었는걸.”

    바르바토스가 즐겁게 말했다.

    “어디서 다른 여자랑 연습이라도 했나봐?”

    “춤 하나 제대로 못 춘다고 엄청나게 까대는 아가씨가 내 곁에 있어서 말이야. 구두굽에 밟히지 않으려고 꽤나 열심히 연습했지.”

    다름 아니라 바르바토스를 비꼬는 말이었다.

    “흥. 입만 살아가지고는.”

    “아까 전에 가미긴이 접근했어. 나한테 뭘 원하느냐고 협상을 제시하더군.”

    바르바토스가 호오, 하고 눈을 빛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냐?”

    “저는 어린애 취향이라서 당신처럼 쓸데없이 지방이 잔뜩 붙은 아가씨는 별로입니다, 라고 솔직하게 대답했지.”

    “깔깔깔.”

    바르바토스가 크게 웃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나는 바르바토스보다 가미긴 같은 육체가 취향에 가까웠다. 기분 좋으라고 말해준 것이었다.

    “그거 알아? 너 정말 밥팅이야.”

    “새삼스럽기는.”

    우리는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기분 좋게 춤을 추었다.

    *  *  *

    “어머나, 저거 보세요. 바르바토스 님이랑 단탈리안이에요.”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정말이었군요!”

    여자 마왕들이 수군거렸다. 가미긴 주변에 모여든 그녀들은 무소속 파벌이었는데, 정치적인 대립관계 따위에는 관심을 끄고 마왕으로서의 삶을 즐기는 데 집중했다. 연애담만큼 그들을 흥분시키는 것도 없었다.

    “꼭 작은 요정과 엘프가 춤을 추는 것 같아요!”

    “글쎄, 바르바토스 님은 확실히 아름답지만 상대방이…….”

    “어머나. 저는 저런 쪽이 더 취향인걸요.”

    가미긴은 조용히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두 마왕 사이에는 왠지 모르게 범접하기 어려운 공기, 저쪽과 이쪽을 구분하는 벽과 같은 것이 있었다.

    신뢰라는 물건이겠지.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고 있었다.

    ‘한없이 무가치해.’

    가미긴이 포도주를 들이켰다. 달콤한 술이었다.

    한 여마왕이 가미긴에게 말했다.

    “가미긴 님은 어떠신가요? 아까 단탈리안과 대화를 나누신 듯한데.”

    “으으음.”

    가미긴이 평소처럼 방실방실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생각했다. 여기서는 어떻게 반응하는 편이 좋을까? 단탈리안과 제법 깊은 사이라고 묘한 여운을 남겨줄까. 그래, 그쪽이 마음에 든다.

    여마왕들은 말하자면 사교계의 중심이요 소문의 진원지였다. 가미긴과 단탈리안이 각별한 사이라고 하더라, 그런 풍문이라도 돌면 평원파에 어느 정도 혼란을 줄지 몰랐다.

    “응, 부끄럽지만 약간 관심이 있다고 할까~.”

    “어머어머. 정말인가요!?”

    “혹시, 호감이 있다는 말씀이신지?”

    여마왕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가미긴은 능숙하게 정치적인 계산을 해내면서 여마왕들한테 얘기했다. 부끄럽다는 듯 홍조를 띄우는 것을 잊지 않고. 멋쩍게 미소를 짓는 것 또한 잊지 않고.

    그녀가 슬쩍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그곳은 여전히 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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